# 918
“할 수 없죠. 우리가 직영공장을 하루라도 빨리 만드는 수밖에요. 그렇죠?”
“끄으응! 그렇지 않아도 일이 엄청 많은데…….”
두바이를 여행하고 온 박 사장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마음이 온통 일에 쏠려 있어서 화장실에 갔다가 지퍼를 올리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공장을 지으라 하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럼 공장 짓는 걸 책임질 사람을 더 뽑으세요. 이실리프 브레인의 이준섭 전무이사에게 요청하면 적당한 사람을 뽑아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뽑는다 하여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믿고 맡길 사람이 더 있어야 업무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고 원활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나지막한 침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공사를 총지휘하고 완공된 후엔 전체적인 건축물 관리를 맡길 사람이면 되죠?”
“그래 주면 저야 고맙죠.”
박 사장은 비로소 안도가 된다는 듯 이마에 잡힌 주름을 편다. 살면서 이렇게 바쁘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해보았다.
요즘도 백화점과 대형 할인마트 바이어들이 수시로 전화를 걸어오거나 방문한다. 항온의류를 자신들도 취급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바이어들은 박 사장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에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하여 사장실엔 상당히 많은 양주와 전통주가 쇼핑백에 담긴 채 정렬되어 있다.
워낙 바빠서 술 마실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현수의 눈에도 즐비하게 정렬된 쇼핑백들이 보인다. 회사 차원에서 선물하려고 준비한 건가 싶었는데 아닌 듯하다.
쇼핑백이 제각기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백화점과 대형 할인마트에서 오나 보죠?”
“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찾아와서 너무 성가셔요.”
㈜까사의 영업부장일 때 그들의 푸대접과 냉대, 그리고 노골적인 접대 요구에 상당히 분개해했다.
하여 이실리프 어패럴 초기엔 그들을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술 사준다 하면 쫓아가서 얻어먹고 왔다.
예전에 들인 본전을 뽑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의 백화점 바이어들까지 몰려들자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건강 때문에라도 날마다 술을 마셔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절하면 서운하다고 한다.
그러다 차츰 그들의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줄 생각이 없으니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함이다.
아예 대놓고 직영점만 운영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몇몇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시로 드나든다.
그들은 항온의류가 엄청나게 풀려 나가는 것을 느끼곤 더욱 몸달아했다.
취급만 하면 백화점으로 손님이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가 상품 전략을 들고 왔다. 실력을 인정받은 디자이너의 작품을 소량만 제작하여 고가에 팔자는 것이다.
더 많은 이득이 생길 일이므로 당연히 마음이 쏠렸지만 박근홍 사장은 마음을 접었다.
주문받은 것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어찌 일을 또 벌이겠나 싶은 것이다.
“흐음! 이건 아이디어가 괜찮네요.”
“어떤 겁니까?”
현수가 들고 있는 건 탁자에 올려놓은 제안서이다.
“일부 부유층만을 겨냥한 다품종 소량 생산 및 고가정책 말입니다.”
“아, 그거요? L백화점 바이어가 제안한 겁니다.”
“한국의 부유층엔 서민들과 차별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도 항온의류를 원할 테니 한번 생각해 보죠.”
“정말… 이십니까?”
“네, 제안서의 내용대로 다품종 소량 생산해서 아주 비싸게 팔죠. 직영공장을 만들면서 이것만 취급할 생산라인을 따로 두면 되지 않겠어요?”
“……!”
박 사장은 진심인가 싶은지 대꾸 대신 바라만 본다.
“티셔츠는 50만 원쯤 받죠. 바지는 70만 원, 재킷은 150만 원 정도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서민들이 듣기엔 모두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농담하는 거 아니죠?”
“물론입니다. 디자이너 드레스 개념이라 선전하면 그 가격이라도 지갑을 열 겁니다.”
현수의 표정을 보니 진담인 듯싶다 판단했는지 박 사장은 다이어리를 꺼내 뭔가를 메모한다.
이때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브랜드는 이실리프 CP 정도면 어떨까 합니다.”
“CP요? 무슨 뜻이죠?”
“자선냄비를 뜻하는 Charity Pot의 이니셜이죠. 발생된 이익금은 불우이웃을 돕는 데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런 뜻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한국의 부유층엔 노블레스 오블리주10)를 실천하는 이들이 매우 드물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에는 매우 인색한 편이다.
정말 딱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방송에 등장하여 도움을 청해도 그들을 돕는 손길은 주로 서민들이다.
자신들의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라면 거액을 쓸 수 있지만, 굶주린 이웃의 허기를 해결해 줄 푼돈은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백화점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어야 하니 이실리프 NNC라는 브랜드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건 또 뭐의 이니셜입니까?”
“Needy Neighbor Care죠.”
“아! 불우이웃돕기라는 뜻이군요.”
“네, 많이 벌어서 나눠 주자고요. 이것들은 너무 비싸서 백화점에서나 팔릴 품목이니 저기 있는 술은 이제 박 사장님이 다 드셔도 됩니다.”
현수가 즐비하게 늘어놓은 쇼핑백을 가리키자 박 사장은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괜스레 뇌물 받아먹다 걸린 기분이 든 모양이다.
“에구, 저건… 이따 가실 때 반쯤 가져가세요. 저 혼자 저거 다 먹으면 죽습니다.”
“하하! 그럴까요? 저, 사양 안 합니다.”
“네, 제발 좀 가져가 주세요.”
박근홍 사장은 사무실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 양주가 든 쇼핑백들을 바라본다. 수량으로 따지면 약 200여 개다.
박 사장은 말 나온 김에 현수가 가져갈 것을 고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이구, 아닙니다. 좀 전의 말은 농담입니다. 저 술 안 즐겨요. 저 주지 마시고 직원들 나눠 주세요.”
“직원 대부분이 여성이라 가져가라고 해도 안 가져가더군요. 그러니 회장님이 반이라도 가져가서 나눠 주세요.”
이실리프 어패럴의 본사 직원 대부분이 여성인 것은 사실이다. 몇몇 남자 직원이 있지만 그들은 이미 가져갈 만큼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고도 남은 게 200여 병이니 상당히 많은 사람이 드나든 모양이다.
“그럼 알겠습니다. 보내주세요.”
“정말이시죠? 다행입니다. 저걸 어디다 치울 수도 없고 해서 처치 곤란이었거든요.”
사다 준 사람들이 들으면 섭섭할 소리이지만 실제로 그러하다. 너무 바빠 술 마실 시간이 없는 박 사장에겐 짐이나 다름없었다.
“참! 여기 이거 한번 보시죠.”
가방 속에 있는 사진들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건 뭡니까?”
“이건 별장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이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를 고르십시오.”
“잠시만요. 좀 보구요.”
뭔가 알아보려는 것이 있어 그런다 생각한 박 사장은 무심한 시선으로 사진들을 뒤적인다. 그러다 하나를 뽑았다.
“제 눈엔 이게 제일 괜찮아 보입니다. 건물도 멋지고 화단도 아주 잘 가꿔져 있네요.”
아파트 생활을 오래하였는지라 한때는 전원주택을 꿈꿨다.
사진에 있는 것처럼 공기 맑고 물 좋은 곳을 찾아 멋진 집을 짓고 화단을 가꾸는 생활을 바란 것이다.
“이게 제일 나아 보인 겁니까?”
“네, 제 눈엔 전원주택을 지으면 그런 모양이 제일 좋을 것 같네요.”
“흐음! 알겠습니다.”
현수는 사진 뒤에 ‘어패럴 박 사장님’이라고 메모했다. 이걸 보고 있던 박 사장은 현수가 사진을 정리하자 묻는다.
“근데 그걸 왜 보여주신 겁니까? 어디 경치 좋은데다 별장 지으시려구요?”
“아뇨. 박 사장님께 한 채 선물하려구요.”
“네에?”
몹시 놀랐다는 듯 확연히 음성이 커진다.
“이 사진은 제주도 섭지코지에 있는 유니콘 아일랜드의 별장들입니다. 천지그룹 이연서 회장님으로부터 50채를 선사 받았지요.”
“……!”
“저 혼자 다 쓸 수 없어 계열사 사장님들께 한 채씩 나눠 주는 중입니다.”
“지, 진짜 그 집을 준다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등기 이전 비용까지 제가 지불할 겁니다. 틈 날 때 내려가서 사모님과 푹 쉬다 오십시오.”
“회, 회장님……!”
다 망해가는 회사를 사서 확실하게 살려놓았다.
㈜까사에서 끝까지 의리를 지킨 직원들은 100% 고용 승계되었고, 밀린 임금 및 퇴직자의 퇴직금까지 모두 해결해 주었다.
게다가 대표이사 사장 자리를 제안했고, 현재 거주하는 32평짜리 아파트를 보너스로 주었다.
그런데 아파트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고 멋진 별장을 선물하겠다고 한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통이 너무나 크다.
그렇기에 박 사장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제주도에도 직영매장 있지요?”
“그, 그럼요. 제주도엔 서귀포시와 제주시에 각각 세 개씩 있습니다.”
“흐음, 그럼 이번 주말엔 거기 실사를 다녀오십시오.”
“회장님……!”
어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가!
박 사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격한 감정을 다스린다. 눈물이라도 쏟아지려는 듯 두 눈에는 습기가 가득하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 사장님.”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마음씀씀이는 정말 대인답다는 느낌이다. 하여 박 사장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사모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참, 저 집 짓고 이사했습니다. 조만간 집들이할 테니 그때 같이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연락만 주시면 꼭 가겠습니다.”
박 사장은 또 한 번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 * *
현수가 방문한다는 전화를 받은 이실리프 엔진의 김형윤 대표이사는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텅―!
현수가 내리고 스피드의 문이 닫힌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에구! 선배, 이러지 마세요.”
“아닙니다. 공식적인 방문인데…….”
“선배가 이러시면 저 불편해요. 그냥 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잠시 현수에게 시선을 준 김형윤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았다. 하지만 공식석상에선 네가 양해해.”
“물론이에요.”
“아무튼 환영한다. 안으로 들어가자.”
김 사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공장 구석을 샌드위치 합판으로 막아서 만든 자그마한 사무실이다.
안에는 책상 하나와 소파 한 세트, 그리고 책장 하나와 금고가 있을 뿐이다.
“사무실이 좀 그렇지?”
본인도 황량하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선배, 명색이 사장실인데 조금 그럴듯하게 하시지 왜 이렇게 황량해요? 조금 너무하셨네요. 돈이 부족…….”
현수의 말은 중간에 잘려야 했다.
“아직 엔진 하나 못 만드는 회산데, 뭐. 나중에 진짜 회사가 괜찮아지면 그때 제대로 꾸밀게. 그나저나 웬일이야?”
“여기 연구실 있죠?”
“그럼. 우리가 만들 엔진을 설계하는 팀하고 같이 있지.”
“정부로부터 형식 승인 받는 거 어려워요?”
김 사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어렵다기보다 까다롭지. 환경을 생각해야 하니까.”
“제게 자동차 엔진 설계도가 몇 장 있어요.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왔습니다.”
“아, 그래? 그런 게 있으면 큰 도움이 되지. 가만있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연구실로 가자.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전문가이니 척 보면 알겠지.”
“네.”
김 사장의 안내를 받아 공장 뒤쪽으로 돌아가니 샌드위치 합판으로 지은 건물이 보인다.
“이 공장 임대죠?”
“그래. 공장 터를 사서 새로 지으려 했는데 만만치 않아서 일단은 임대했어.”
“잘하셨네요. 조만간 충청도 쪽으로 이주해야 하거든요.”
“그래? 충청도라고?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누가 그래? 박 대표님이?”
“아뇨. 제가 그러는 거예요. 태안 쪽으로 이주할 생각 하고 계세요.”
“태안? 웬 태안?”
“본격적으로 외국에 수출하려면 선적하기 용이한 데 있어야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