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0
공장 이전 문제 및 사원들에 대한 처우에 관한 대화였다.
박 대표도 다른 계열사 사장들처럼 유니콘 아일랜드의 별장 하나를 골랐다. 그걸 주겠다고 하자 좋아하면서도 몹시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현수로부터 받기만 하고 제대로 준 게 없다는 느낌 때문이다.
박 대표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공장을 지어 보이겠다면서 의욕을 보였다.
* * *
“보고드립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이곳은 천지건설 사옥 인근의 카페이다.
이 카페엔 커피를 마시면서 소규모 세미나를 하거나 그룹 스터디를 할 수 있는 별실이 몇 개 있다.
현수가 앉아 있는 별실은 외관은 평범하지만 실제론 결코 평범하지 않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몰래카메라나 도청 장치 등이 있는지 확인되는 방이다. 유리창은 삼중창으로 되어 있는데, 안쪽에서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가장 바깥쪽 것은 진동하지 않도록 특수 제작된 것이다.
현수의 앞에 레이저 포인터를 들고 보고하는 이는 이실리프 정보 3국장 최찬성과 4국장 배진환이다.
현재 지난 3월 9일에 부여받은 임무에 대한 최종보고가 진행되는 중이다.
“미리암 로리울 오버윌러가 현재 취리히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주소는 취리히……. 현재 별다른 경기가 없어 당분간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화면에는 스위스인 심판의 사진과 주소가 띄워져 있다.
김연아 선수의 엣지를 롱 엣지로 판정한 당시 스페셜리스트이다. 차이나 그랑프리에서도 3F―3T에 롱 엣지 판정을 내렸고, 수많은 네티즌에 의해 오심임이 밝혀졌다.
“좋아요. 다음은요?”
“다음 인물은 ISU의 오타비아 친콴타 회장입니다. 현재 베네치아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소는……. 이자 역시 소재지가 변경될 경우 즉각 보고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국제빙상연맹 회장인 친콴타는 현재 전 세계 빙상인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하여 퇴진운동이 진행되고 있지만 물러서지 않고 있다.
“좋아요. 히라마츠 준코는 어디에 있나요?”
“현재 도쿄 자택에 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미리암 로리울 오버윌러와 친분이 있으며 소치 동계올림픽 때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겠지요. 빙상 위의 마녀 타티아나 타라소바는 어디에 있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습니다. 주소는… 입니다.”
“다음은요?”
“제임스 휴이시입니다. 시드니에 머물고 있으며, 주소는… 입니다. 뉴질랜드에 별장이 있는데 이틀 후 그곳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곳 주소는… 입니다.”
제임스 휴이시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의 금메달을 빼앗은 인물이다.
8년 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선 여자 3,000m 쇼트트랙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우승한 한국 팀을 실격시킨 놈이다.
보고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상당히 많은 인원에 대해 개별적으로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고하기에 앞서 둘은 서로의 정보에 대해 확인했다. 각기 다른 보고 내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빚어지지 않았다.
절대 충성 마법에 걸려 있기에 무성의한 조사, 또는 허위 보고 같은 걸 상상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실리프 정보의 직원들은 현수에 대해 절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병헌 주연의 영화 ‘광해’의 도부장 같은 충성심이다. 현수가 위험에 처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구하겠다는 마음이다.
“이상으로 보고를 마칩니다.”
“조사하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그건…….”
최찬성 3국장이 머뭇거리자 4국장 배진한이 나선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요원들 훈련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국내여야 하는 건 아니지요?”
일반적인 훈련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물은 것이다.
“국내라면 더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군사훈련에 준해야 한다는 뜻이다.
“러시아에 마련하면 어떨까요? 레드마피아를 통해 각종 무기를 제공받을 수 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정원에 몸담고 있을 땐 국가 권력이 모든 걸 제공하고 보호했다. 이실리프 정보로 옮기면서부터 민간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훈련을 실시할 수 없었다. 사격장 같은 것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레드마피아는 무기밀매가 주요 소득원이다. 그렇기에 못 구할 게 없다는 것을 안다.
이실리프 정보는 국내뿐만 아니라 각국에 조성될 자치령에서도 활동해야 한다. 그렇기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자 러시아를 훈련지로 선택한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목록을 작성해서 이메일로 보고하세요. 아울러 훈련장 설계도면도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귀가한 현수는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곤 한참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조만간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코스를 찾기 위함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1시, 현수의 입술이 나직이 달싹인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언제나 그렇듯 아리아니는 즉각적으로 대답한다. 늘 현수의 곁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실라디아 좀 불러줄래? 시킬 일이 있어.”
“네, 알겠어요. 실라디아! 실라디아! 어서 와!”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라디아는 불과 20초 만에 대답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네, 아리아니님! 부르셨어요?”
“그래. 주인님 좀 도와드려.”
“네!”
실라디아가 바라보자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실라디아는 이게 뭔지 혹시 알아?”
현수의 서재엔 제법 큰 지구의가 있다.
장식용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텔레포트 좌표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그럼요. 지구의 축소판인 거 압니다.”
“그래? 아는군. 그럼 이제부터 내가 표시하는 곳의 안전좌표 좀 알아다 줘.”
“네, 말씀만 하세요. 그런데 이건 너무 작아서 정확하지 못할 수 있어요.”
“그건 걱정 마.”
현수는 인터넷으로 지도를 불러놓고 지구의 곳곳에 침을 박았다. 누구보다도 공정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편파 판정을 하여 많은 사람을 분노케 한 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이탈리아, 스위스, 러시아, 미국, 호주, 일본 등등이다.
각각의 도시에 침을 박고는 인터넷으로 확대된 지도를 찾아 일일이 확인시켜 주었다.
실라디아는 지난 수억 년 동안 지구를 수천만 번도 더 돌고 돌았기에 금세 알아차린다.
안전좌표란 글자 그대로 텔레포트를 해도 안전한 좌표를 뜻한다. 그런데 지구는 아르센 대륙과 달리 급속도로 발전하는 중이다.
며칠 전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건물이 들어설 수도 있다. 텔레포트할 좌표에 콘크리트 기둥이 있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신신당부를 했다.
실라디아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밤새도록 지구를 누볐다.
그리곤 텔레포트하려는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안전좌표를 확인해 왔다.
번개에 버금갈 속도로 움직였지만 가려는 장소가 여러 곳인지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마스터, 이동하기 전에 제게 먼저 말씀하시면 즉각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래? 그거 다행이군. 참, 이실리프 군도의 지도는 어떻게 되었어?”
“종이만 주시면 그려 드릴게요. 근데 좌표도 함께 표시해 드려요?”
“그래 주면 나야 좋지. 잠깐만.”
아공간에서 켄트지11) 전지를 꺼내 네 장을 이어 붙였다.
실라디아는 인간들이 지도를 그리듯 해줄 테니 물감을 꺼내라고 한다. 오랫동안 존재했기에 정령치고는 인간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요구대로 파레트 위에 색색별로 물감을 풀어놓자 바람이 그 위를 휘감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디흰 백지 위에 59개의 섬과 아르센 대륙 일부가 그림으로 그려진다. 수채화에 가까운 그림인데 물감이 묻으면 금방 마른다.
바람의 정령다운 솜씨다. 그 위로 덧칠이 되는가 싶더니 금방 지도가 완성된다. 실로 마법과 같은 일이다.
“다 되었어요.”
“…대단해. 그리고 고마워.”
“헤헤! 칭찬 고맙사옵니다, 마스터.”
“고맙긴,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수고했어.”
실라디아가 돌아간 후 이실리프 군도와 그 주변을 그린 지도는 아공간 속에 담겼다.
현수가 서재를 나선 것은 새벽 무렵이다.
곤히 잠든 지현의 곁에 몸을 뉘였다. 그리곤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잠을 청했다.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런 감촉을 느끼는 것이 행복한 순간이라 여긴 때문이다.
현수가 보듬자 지현은 기다렸다는 듯 품을 파고든다. 잠든 모습도 참 예쁘다. 하여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해줬다.
짹, 짹, 짹!
“하아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던 지현은 남편의 잠든 모습을 잠시 바라본다. 행복하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현수의 뺨에 뽀뽀하고는 살그머니 일어난다. 사랑하는 낭군을 위해 아침밥을 지어주고 싶은 것이다.
살금살금 까치발로 걸어 밖으로 나간 지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 식구들과 함께 아침 준비를 한다.
잠시 후 연희도 내려와 거든다.
지현이 나간 뒤 눈을 뜬 현수는 양치만 하곤 트레이닝복을 걸쳤다.
“리노! 셀다!”
컹컹! 컹컹―!
저택 뒤쪽에서 놀고 있던 둘이 후다닥 달려온다.
현수는 녀석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셀다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뜬다.
“어라! 너 새끼 가졌어?”
컹컹! 컹컹!
리노는 자랑스럽다는 듯 짖어대고 셀다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꼰다.
“하하! 녀석들, 안 되겠다. 셀다, 너는 오늘부터 운동 금지야. 리노와 다녀올 테니 우리에서 쉬고 있어.”
컹컹!
현수와 리노는 저택 인근에 조성된 조깅 코스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가 와도 사용할 수 있도록 약간 북돋아진 조깅 코스는 전체가 잔디로 포장되어 있다.
처음엔 발목 보호를 위해 푹신한 느낌이 드는 우레탄 트랙을 고려했으나 납 성분이 많다 하여 잔디로 바꾼 것이다.
어쨌거나 잔디 깔린 길도 달려보니 푹신하다.
‘가만, 늑대의 임신 기간은 60일에서 62일 정도 되지? 보통 4∼6월 사이에 새끼를 낳는데 많게는 열 마리까지도 낳는다고 했어.’
오늘은 4월 3일이다. 새끼를 낳을 시기인 것이다. 하여 달리면서 리노에게 말을 걸었다.
“리노, 어떤 녀석들이 나올까? 아빠로서 기대되지?”
컹컹! 컹컹!
그렇다는 듯 짖으며 따라온다.
‘크리스마스에 결혼했고 이제 4월인데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는 아직인가?’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부관계가 뜸한 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왕성한 편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임신 소식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런 기색이 없어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다.
“내 몸에 이상이 있을 리 없고, 아내들도 그런데 왜 그러지? 뭐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킨샤사에 계신 부모님은 하루라도 빨리 손주를 봤으면 하실 것이다. 그런데 결혼 후 석 달이나 지났다.
“융프라우에서 열흘 동안 그걸 해서 그런가? 그렇다면 아직 석 달이 지난 건 아니네.”
달리면서 나직이 중얼거리자 어깨 위에 있는 아리아니가 쫑알거린다.
“주인님,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려요?”
“아내들이 임신할 때가 되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주인마님들이요?”
“그래. 아직 소식이 없잖아.”
짧게 대꾸하고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달려서는 운동이 안 되기 때문이다. 리노가 금방 뒤처진다.
다리가 넷이나 있으면서 현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
22만평이나 되는 부지 외곽 길을 빠른 속도로 두 바퀴를 달리자 비로소 땀이 나기 시작한다.
달리기를 마친 현수는 체력단련실로 들어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원래는 무산소 운동을 먼저 하고 유산소 운동을 나중에 해야 한다.
무산소 운동은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여 근육을 발달시킨다.
유산소 운동은 주로 지방을 에너지 연료로 쓰고 운동 후 피로 물질이 축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