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3
어디를 희망하는지 물었더니 대다수가 콩고민주공화국을 택한다. 러시아와 몽골이 인기를 끌지 못한 이유는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재산을 처분하기로 했고, 현수는 각자에게 이실리프 자치령에 대한 출입증을 발급하기로 했다. 이것만 있으면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 공항, 또는 마타디 항으로부터 자치령까지 이동이 허가된다.
참고로 콩고민주공화국 외무부와 협의된 내용이다.
모두가 돌아가고 난 뒤 노인수 커플만 남았다.
“다행이에요. 모두가 원하는 대로 돼서.”
사사키가 환히 웃는다. 본인은 내부 피폭으로 인한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도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이 기쁜 모양이다.
마음씀씀이가 얼굴만큼 고운 여인인 듯싶다.
“슬립!”
현수의 입술이 달싹이자 둘 다 고개가 떨어진다. 마법으로 재운 것인지라 웬만해선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될지 모르겠네.”
이주 희망자들과 대화를 하는 동안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노인수 커플처럼 본인이 아는 경우도 있지만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게 갑작스럽게 발병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차별 대우나 혐한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온 일이기에 나름대로 대처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사능은 아니다.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의료 선진국이다.
반면 콩고민주공화국은 제대로 된 의료시설조차 갖추지 못한 낙후지역이다. 병에 걸렸을 경우 제때에 치료 받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다. 하여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낸 것이다.
거주지도 제공해 주고 직장까지 주는데 무슨 염치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현수는 그러지 않았다. 생존과 직결된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여 이실리프 의료원 설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울러 반둔두 지역, 또는 비날리아 지역에도 여러 의료기관이 설립될 예정임을 알려주었다. 실제로 각각의 지역에 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의료시설을 지을 예정이다.
그러면서 미라힐Ⅰ, Ⅱ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재일한국인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련의 이야기를 하던 중 현수는 신성력을 깜박하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가이아 여신은 분명히 말했다.
12장 아제르바이잔에서
너는 내가 간택한 내 딸의 배우자!
선택 받은 인간이여!
누릴 수 있는 모든 복락을 누리며 살지어니 내 딸을 잘 보살펴 내 뜻이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하라.
나의 뜻에 따를 때 네 세상에도 나의 힘이 미치리라.
아직 합방을 한 것은 아니지만 스테이시는 본인의 배우자가 될 예정이다. 성녀 본인도 아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여신이 ‘네 세상’이라 일컬은 지구에서도 신성력 사용이 가능해야 한다.
문제는 신성력이 방사능 오염까지 어쩔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한 번도 시험해 본 바 없기 때문이다.
밑져야 본전이고 해보면 알 일이다. 하여 잠들어 있는 둘에게 손을 내밀며 나직이 속삭였다.
“가이아 여신의 이름으로 신성력을 베푸노라! 나쁜 것들은 모두 사라져라!”
슈라라라라라―!
현수의 손끝에서 뿜어진 신성력이 노인수와 사사키 노조미의 몸속으로 스며든다. 여전히 축 늘어진 모습이다.
이 순간 현수가 모르는 사실 하나가 있다.
신성력은 세상의 모든 불결함을 정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엔 방사능도 포함되어 있다.
다 썩은 물이라 할지라도 현수가 손가락 하나를 담고 신성력을 뿜어내면 약수보다도 깨끗한 물로 정화된다.
후쿠시마 원전 제1원자력발전소의 관측용 우물 지하수는 베타선을 방출하는 방사성 물질이 1L당 71만 베크렐이 넘는다. 리터당 10베크렐이 기준치이니 71,000배 이상 초과이다.
현수가 이 물에 손을 담고 신성력을 뿜어내면 기준치 이하로 완벽하게 정화된다.
혼자 하면 고작 10톤이 정화되지만 스테이시 아르웬 성녀와 함께라면 단숨에 500톤으로 양이 늘어난다.
성녀와 최초 합방 시 가이아 여신은 둘을 축복하는 의미로 또 한 번의 신성력 세례를 베풀 예정이다.
그 이후라면 현수 혼자 100톤, 둘은 5,000톤 정도를 정화시킬 수 있게 된다. 신성력이 고갈되면 기도를 통해 재충진시킬 수 있다. 그러면 추가 정화 작업이 가능해진다.
참고로 신성력 충진은 아르센 대륙에서만 가능하다.
“쯧쯧! 그러게 전에 준 명함을 잘 들고 다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잠들어 있는 둘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이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전에 준 명함을 어쨌느냐고 물은 바 있다.
노인수 커플이 이실리프 상사 회장의 명함으로 알고 있는 그것은 다른 것에 비해 무겁다. 뒤쪽에 고성능 정화 마법진이 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마법진까지 그려져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을 줄 때 이렇게 말하였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늘 소지하고 있다 제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전화 주십시오.”
분명히 그러겠다고 했는데 물어보니 명함첩에 넣어 고이 보관했다고 한다. 어이없게도 고성능 정화 마법진이 한낱 명함첩을 방사능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몹시 피곤한 듯 보인다. 너무 많은 심려 때문일 것이다.
“바디 리프레쉬! 어웨이크!”
샤라라라랑!
마나가 스며들자 잔뜩 찌푸리고 있던 인상이 스르르 펴진다. 그와 동시에 눈 아래 형성되어 있던 다크서클이 엷어지는가 싶더니 사라진다.
“끄응! 앗, 깜박 졸았군요. 정말 죄송해요.”
“어라? 어머, 죄송해요. 제가 요즘 신경 쓰는 일이 너무 많아서……. 아무튼 죄송합니다.”
사사키 노조미와 노인수는 대화하다 졸았다 생각하는지 연신 머리를 숙인다.
“괜찮아요.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그나저나 이쪽의 일은 두 분에게 일임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요. 언제든 통보만 해주시면 곧장 떠나겠습니다.”
사사키 노조미가 소속된 연예기획사는 내부 피폭 판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여 당분간 쉬겠다는 통보에 흔쾌히 허락했다. 방사능 문제가 예민한 이때에 이름난 배우 겸 탤런트가 나서면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한 때문이다.
사장이 우익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두 분이 주무시는 동안 잠깐 생각해 보았는데 아예 내놓고 광고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네? 광고요?”
“네, 해외에서 근무할 인력을 뽑는다고 하면 조금 더 빨리 일이 진행될 것 같아서요. 제 의견은…….”
잠시 현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일본도 비정규직이 많다. 시급은 낮고 근무 시간은 길어 정규직이 아닌 사람들은 먹고살기에도 바쁘다.
따라서 광고를 하면 많은 사람이 몰려들 것이다.
이들을 인터뷰할 때 올웨이즈 텔 더 트루스 마법진이 그려진 의자에 앉게 한다. 진실을 듣기 위함이다.
일단 재일교포 위주로 뽑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일본인 전원을 탈락시키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 가운데에도 지극히 양심적이며 선량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이실리프 자치령은 텅 비어 있다. 그곳을 일궈줄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다익선이다.
그러니 혐한과 우익성향이 있는 자들을 배제한 나머지를 데려가는 것은 어떨까 싶다.
대강의 설명을 마치자 노인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과연 인터뷰할 때 진실을 말할까요? 요즘 한국에서 문제되고 있는 모 웹사이트 회원들도 거기 회원이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잖습니까?”
노인수가 말한 곳은 개만도 못한 종자들이 몰려서 찧고 까불며 계속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웹사이트일 것이다. 현수가 이실리프 계열사는 물론이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회사로 하여금 채용을 금지시킨 바로 그곳이다.
“그냥 지나치는 말처럼 물으면 본심을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면 어때요?”
현수가 말을 얼버무린 것은 마법진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이다.
“좋기는 한데 비용도 많이 들고…….”
“광고비는 내가 내죠. 사무실 얻는 비용과 유지비용 역시 제가 부담합니다. 제가 고용할 사람들이니까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노인수는 걱정된다는 표정이다. 일본은 물가가 비싸다. 하여 의외로 많은 비용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수 씨를 인력담당 일본팀장으로 임명하죠. 사사키 노조미 씨는 부팀장 하세요. 급여도 지불하겠습니다.”
노인수는 잠시 현수와 시선을 교환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니 금액은 물어보지도 않는다.
“…알겠습니다. 제가 맡죠.”
“좋아요. 그럼…….”
잠시 상세한 내용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며칠 후, 도쿄, 오사카, 교토 등 재일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의 유력 신문마다 광고가 뜬다.
이실리프 자치령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다는 내용이다.
직종은 거의 모두 망라되어 있다. 다만 AV 관련 업종 및 도박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빠져 있다.
일본에서 취득한 모든 자격증이 인정되며 그와 관련된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가급적 가족 모두 이주하는 조건이며, 면담을 통해 합격 여부가 결정된다.
급여는 일본 평균의 절반 정도 된다.
2014년 현재 일본 근로자의 월평균 급여는 한화로 환산했을 때 316만 8,300원 정도 된다.
자치령으로 이주하면 아주 저렴한 임대료로 거주지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실리프 자치령 근로자가 될 경우엔 월 15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다.
그래놓고 아래에 다음과 같은 표를 명기했다.
거의 모든 것이 일본의 8분의 1 수준이다. 일본에서 지불하는 돈의 12.5%만 내면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매월 가장 큰 지출 항목인 아파트 임차료의 경우는 무려 76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거의 거저다.
게다가 자동차 등록비는 아예 없다.
당연히 난리가 벌어진다. 멀고 먼 타국으로 이주해야 하지만 가기만 하면 인상 찌푸리고 살 일은 없을 것 같다.
날씨가 덥기는 하겠지만 살다 보면 적응될 것이다.
게다가 방사능 오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청정 지역이다.
언제 뽑느냐는 문의가 빗발치자 노인수와 사사키 커플은 현수에게 얼른 의자를 보내달라고 청을 했다.
이에 특급 항공 운송으로 300여 개의 의자가 운송된다.
그리곤 곧바로 면담이 시작되었다.
신청 서류를 접수시키면 면담 일정이 통보된다. 면담할 때엔 이주를 원하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질문부터 한다.
재일한국인이 있는 경우는 가산점을 주되 혐한이나 우익 성향이 강한 자들은 모조리 배제된다.
아울러 야쿠자 역시 불합격이다.
한 번 주먹을 휘두른 자는 환경이 바뀌더라도 또 그럴 것이므로 아예 싹을 자른 것이다.
점점 노인수와 사사키를 돕는 인원이 늘어나고 일본 내에서는 재산을 처분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렇지 않아도 떨어져 있던 부동산 가격은 더 떨어지지만 일본 정부로선 막을 방도가 없다.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해외로 직장을 구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적을 포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재일한국인들 사이엔 은밀한 소문이 번진다. 조총련계도 마찬가지이다.
그간 당한 차별에 이를 갈던 이들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일제히 접수창구로 몰려든다.
이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이실리프 자치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이 주어진다.
얼마 후, 일본의 거의 모든 공항에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뜬다. 직항로 전세기이며 항상 만석이다.
차츰 재일한국인의 숫자가 줄어들자 재특회는 개점휴업 상태가 된다. 몰아내고픈 사람들이 알아서 나가주니 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 * *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네, 반갑습니다. 장관님께서 이렇게 마중까지 나오시다니요. 많이 바쁘실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