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1
“무슨 소리야?”
“지금부터 30분 주지. 네가 동원할 수 있는 인원 전부를 동원해. 권총이나 기관총을 가져와도 괜찮아. RPG를 가져와도 되고, 탱크를 끌고 와도 돼!”
“미친……! 무슨 소리야?”
영화에나 등장하는 아이언맨 또는 슈퍼맨이라면 모를까 맨몸으로 어찌 총탄 등을 감당해 내겠는가!
보아하니 현수는 말쑥한 슈트 차림이다. 가슴이나 옆구리를 봐도 권총 같은 걸 감춘 건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너무 당당하자 이상하다 여긴 것이다.
“혹시, 노보로시스크의 지르코프라고 혹시 알아?”
“미친……! 지금 족보 파는 거야? 그리고 노보로시스크에 있는 놈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노보로시스크까지는 직선거리로 따져도 1,000㎞가 넘는 곳이다. 게다가 둘 사이엔 거대한 카프카스(Caucasus)산맥이 있다.
러시아의 우랄(Ural)산맥이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면 아제르바이잔 북부에 위치한 카프카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경계한다 할 수 있다.
이 산맥에는 유럽 최고봉인 엘부르스(5,642m)가 있으며 높이 5,000m가 넘는 준봉도 다섯 개나 있다.
따라서 바쿠와 노보로시스크는 육로 통행이 쉽지 않다. 그렇기에 억시모프는 이상한 놈 다 본다는 표정이다. 족보를 팔아도 근처에 있는 놈을 팔아야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여전히 태연자약하다.
“윗선에 전화해서 확인해 봐. 지르코프가 누군지.”
“윗선? 가만……! 방금 지르코프라고 했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라는 표정이다.
“그래! 지르코프. 내 친구지. 연락되거든 김현수가 누군지 물어보도록!”
“친구? 김현수? 좋아, 기다려봐.”
억시모프는 품속의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른다.
누군가 전화를 받자 노보로시스크의 지르코프가 누군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상대방의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클럽에서 시비가 발생되어 조직원들이 폭행당했음을 이야기한다.
상대방의 음성을 들어보니 즉시 조직원을 보낼 테니 꽉 붙잡고 있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조직의 명예를 해쳤다며 비아냥거린다.
억시모프는 이 대목에서 할 말이 없다는 듯 알았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억시모프는 뒷주머니에 전화를 넣으려 한다. 이때 현수의 음성이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확인되기 전까진 가지 않을 테니 괜한 수작 부리지 마.”
억시모프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이때 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총 꺼내 봐야 소용없을 거야.”
“……!”
“헤이스트!”
“으앗!”
홱, 철컥! 티팅팅팅팅팅!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억시모프가 뒤춤에 차고 있던 리볼버 권총을 뽑아 드는 순간 현수의 신형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 결과 억시모프는 방아쇠에 손을 얹기도 전에 권총을 빼앗겼고, 바로 다음 순간 약실에 있던 총알 여섯 개 모두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군다.
가히 섬전과도 같은 움직이다.
“봐! 내가 소용없다고 했잖아.”
빈총을 건네자 억시모프는 얼떨결에 받기는 하는데 멍한 표정이다. 방금 어떤 일이 빚어졌는지 순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때문이다.
“못 믿겠으면 총알 주워서 다시 넣어봐.”
“…알았다.”
현수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읽은 억시모프는 들었던 권총을 내린다. 자신이 상대할 사람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이 정도로 몸놀림이 빠르고 정확하다면 열이 덤벼도 질 것이란 생각을 하곤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억시모프의 휴대폰에 진동한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전화 왔잖아. 받아야지.”
“…응! 그래. 나야.”
번호 확인 후 전화를 받은 억시모프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뭐어? 저, 정말? 그게 진짜야? 헐……! 응, 으응! 알았어. 그래, 알았다고. 그래, 그래!”
시선은 내내 현수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놀랍다는 표정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 등 그야말로 다양한 얼굴로 변한다.
통화를 마친 억시모프가 눈을 크게 뜬 채 바라본다.
“저, 정말이십니까?”
눈빛, 어투, 표정, 몸짓까지 모든 게 바뀌었다.
“확인했어? 그럼 가도 되지? 내 일행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해줬으면 좋겠어.”
“무, 물론입니다. 그, 그런데 그냥 가시면…….”
“왜?”
“저, 저희 보스께서 보스를 뵙겠다고 출발하셨답니다.”
방금 전 통화에서 억시모프는 새롭게 각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현수가 레드마피아 전체 서열 10위이고, 모스크바의 지배자가 지목한 후계자라는 소리였다.
자신이 하늘처럼 여기던 보스마저 충성을 맹세해야 할 존재라는 뜻이다.
현수는 분명 동양인이다. 그리고 전혀 마피아 단원답지 않게 생겼다. 그럼에도 너무 어마어마한 신분이라니 아주 조심스런 표정이다.
“한참 기다려야 하나? 나도 가서 쉬어야 하는데.”
“그, 그럼 어디에 묵으시는지 말씀하시면…….”
“포시즌스 스위트룸.”
윌리엄 기장과 스테파니가 머무는 호텔이 4성급이라면 포시즌스는 5성급이다.
현수는 오늘 이 호텔 스위트룸을 쓸 예정이다.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하룻밤 숙박비만 한화로 약 340만 원 정도 된다.
박진영과 구본홍은 이보다 두 단계 아래인 프리미어 룸을 쓴다. 그래도 1박에 110만 원 정도 되는 호사스런 룸이다.
아무튼 현수의 어투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 그럼에도 억시모프는 조금의 불만도 없다.
오히려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자신의 보스보다도 높은 사람과 그 일행에게 무례를 범한 때문이다.
하여 고개를 들어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흠칫거린다.
‘아까 그 몸놀림! 서열 10위가 괜한 말이 아니었구나. 제기랄! 난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어. 그러니 당해도 싸다.’
억시모프는 본인의 잘못을 깨닫고는 주억거린다.
괜히 서열 10위가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권총이든 기관총이든 들고 와 보라고 하였다. 그래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내게 용무가 있으면 호텔로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보스!”
억시모프가 90도로 허리를 숙일 때 현수는 문을 열었다.
“……!”
문밖엔 약 10여 명의 사내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현수가 나오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선다.
“괘, 괜찮으십니까?”
지배인이 현수의 위아래를 살핀다.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니냐는 표정이다.
“아! 괜찮습니다. 원만하게 매듭지어졌으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가서 일 보십시오.”
“휴우! 다행입니다. 혹시 손님의 신상에 문제가 있을까 싶어 걱정했었습니다.”
진심으로 걱정을 해준 듯한 표정과 어투였다.
“고맙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그나저나 억시모프 패거리가 여기서도 보호비를 받아갑니까?”
“네? 아, 네에. 그건 관행이지요.”
지배인은 영업적 수익을 우선으로 여기지만 클럽 전반이 원활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책무 또한 맡고 있다.
이 클럽은 현재 필요로 하는 각종 식자재와 주류 등을 억시모프 패거리가 지정한 업자와 거래하고 있다.
품질은 나쁘지 않지만 납품가가 높은 게 흠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 업체와 거래를 끊으면 영업상 막대한 지장이 초래된다.
아무튼 이 클럽의 영업이익 중 15% 정도가 억시모프 패거리에게 가고 있다.
그걸 보호비라 생각하고 감수하는 중이다.
거래 대금은 매주 1회 억시모프에게 지급된다.
오늘이 그날이라 이 클럽에 온 것이다. 지급받은 돈 중 실비를 제외한 나머지를 챙기는 한편 공짜로 한잔하곤 했다.
그러다 오늘처럼 눈에 드는 계집이 있으면 재미도 봤다.
클럽에선 감히 뭐라 할 수가 없다. 그랬다간 극심한 경영난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밖으로 나왔던 현수는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 억시모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억시모프!”
“네? 아, 네에.”
“앞으로 이 클럽에선 보호비를 받지 않았으면 하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억시모프는 얼른 허리를 숙인다. 여기서 뜯어낸 보호비 중 80% 정도는 상납된다. 나머지 20%는 활동자금으로 쓴다.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없어도 궁색해지진 않는다. 다른 데서 뜯는 돈도 많기 때문이다.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을 정도는 못되지만 빈티 나지 않게 치장할 정도는 된다.
대부분 그러하듯 별 힘 들이지 않고 번 돈이기에 쉽게 나가는 게 흠이라면 흠일 뿐이다.
쿵―!
문을 닫고 돌아서자 지배인과 웨이터들이 다시 한 번 직각으로 허리를 꺾는다.
“감사합니다.”
“또다시 보호비를 뜯어내려 하면 후세인굴루 바기로프 장관에게 연락하십시오.”
“네? 누구요? 후, 후세인굴루 바기로프 환경천연자원부 장관님 말씀이십니까?”
지배인이 몹시 놀란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실세 장관의 이름이 튀어나왔으니 그러할 것이다.
놀란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네! 한국의 김현수에게 이야길 전해달라고 하면 됩니다.”
“김현수요? 그, 그럼……? 아아! 영광입니다.”
상기된 표정이 된 지배인은 뒤에 있던 웨이터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웨이터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을 짓는다.
답답했는지 지배인이 소리친다.
“이런 답답이……! 얼른 가서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고.”
“네? 갑자기 그건 왜……?”
여전히 왜 그러는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이다.
“이런, 바보 멍청이! 축구의 신이잖아. 어서, 어서! 빨리 가서 종이와 펜 가져와. 이제 알아들었나?”
“네? 아, 네에.”
지배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웨이터는 황급히 물러난다.
그런데 아제르바이잔어로 축구의 신은 Futbol Allah이다.
이 소리를 들은 웨이터들은 일제히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곤 현수를 바라본다.
“아! 맞아. 축구의 신!”
“우와! 진짜다! 종이, 종이와 펜이 필요해.”
현수의 얼굴을 확인한 웨이터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물론 종이와 펜을 가지러 가기 위함이다.
이곳 아제르바이잔에도 축구리그가 있다. 아제르바이잔 프리미어리그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유럽인이 그러하듯 이곳 사람들도 축구를 즐긴다는 뜻이다.
조금 전의 어리바리했던 웨이터를 제외한 대부분이 현수의 축구 동영상을 보았다. 그렇기에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현수는 곧바로 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지만 표정을 바꾸진 않았다. 나이트클럽의 지배인과 웨이터들이지만 입소문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현수는 모든 웨이터에게 게 사인을 해주었다.
그런데 인원이 많은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쿵쾅거리던 음악이 꺼져 있다.
그리고 웨이터들의 뒤엔 모든 손님이 줄서 있다.
춤도 좋지만 축구의 신으로부터 사인을 받으려는 것이다.
사내들과는 사인을 해주고 악수를 했고, 아가씨들과는 포옹까지 해야 했다. 그걸 원한 때문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클럽을 나선 현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다시는 클럽 가지 말아야지.’
* * *
똑, 똑, 똑!
“네에, 문 열려 있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현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며 소리쳤다.
문이 열리고 제법 장대한 체격의 사내와 두 명의 수행원이 들어선다.
“인사드립니다. 나미크 압둘라이에프라 합니다.”
“나미크 압둘라이에프 씨요? 처음 뵙는군요?”
“네! 저는 아제르바이잔의 조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아랫것들이 보스께 무례를 저질렀다 하여 이렇게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아……! 억시모프요? 놀다 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이지요. 자, 일단 앉으세요. 저는 옷 좀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상대는 정장 차림인데 샤워가운만 입었으니 한 말이다.
“네! 감사합니다. 보스!”
나미크 압둘라이에프는 자리에 앉은 후 눈짓으로 수행원들로 하여금 나가게 하였다.
조직의 일로 전쟁을 벌이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감히 그럴 수도 없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현수는 캐주얼하면서도 튀지 않는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미스터 압둘라이에프! 제가 룸서비스를 부탁했습니다. 괜찮죠?”
“물론입니다,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