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7
구본홍의 물음에 현수는 짐짓 농담조로 말을 받는다.
“수주되면 좋겠죠?”
“그럼요, 그럼요! 당연한 말씀이잖아요. 그것까지 수주하면 우리 회사 엄청 커지는 거잖아요. 그쵸?”
구본홍의 고개가 정신없이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거까지 되면 우리 회사 세계 Top 10안에 들어가겠지.”
박진영 과장 또한 상기된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전에도 말했지만 삿된 마음 없이 진심으로 일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 일찍 귀국하세요. 가서 이곳 분위기 전해주고 빨리 검토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사장님은 어디 다른 데 가실 데가 있나 봅니다.”
“네! 콩고민주공화국과 러시아, 그리고 몽골과 북한을 들러서 갈 겁니다.”
“아! 네에.”
박 과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실리프 자치령을 둘러볼 생각인 것으로 인지한 것이다.
“그럼 가서 쉬세요.”
“네! 부사장님도 편히 쉬십시오.”
박진영과 구본홍이 나가자 현수는 창가에 서서 밖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지 위화감이 느껴진다.
“이건……! 살기? 블링크!”
챙, 와장창창!
창가에 있던 현수의 신형이 사라지던 순간 뭔가가 유리창을 깨고 날아든다. 다음 순간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들이 창가로 흩어진다. 이 순간 몇 발짝 뒤로 물러났던 현수의 입술이 다시 달싹인다.
“블링크! 블링크! 플라이!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객실 안쪽에 있던 현수의 신형이 두어 번 번쩍이더니 호텔 밖 허공에 나타났다. 그리로 바로 다음 순간 곧바로 안개처럼 흩어져 버린다.
저격소총을 갈긴 놈은 분명 흑룡일 것이다.
“이놈!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눈에 보이지 않는 현수의 신형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중이다. 위화감의 근원이었던 곳을 향한다.
이 순간 요란한 배기음이 터져 나온다.
부아아아아앙―!
“이런 빌어먹을! 또야?”
배기음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할리 데이비슨일 것이다. 현수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표적을 향해 달렸지만 그랜드 마스터라고 시속 150㎞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잠깐 정도는 가능하지만 지속적인 달리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다.
“매직 캔슬! 헤이스트!”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마법이 해제됨과 동시에 현수의 신형이 나타났는데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다.
놈이 직선으로만 도주하지 않으면 골목골목을 꺾을 때마다 속력을 줄여야 한 것이다. 그때를 노려본 것이다.
“이이잇!”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하자 두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100m 달리기 세계 기록은 2009년 베를린 대회 결승에서 우샤인 볼트가 기록한 9초 27이다.
이를 시속으로 환산해 보면 약 38.83㎞/h이다.
그런데 지금 현수는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아니, 쏘아져 간다.
100m를 거의 2초에 주파하고 있는 것이다. 시속 180㎞/h 정도 되니 할리 데이비슨과의 간격이 좁혀지는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의 막강한 체력 플러스 헤이스트 마법의 결과이다.
“멈춰―!”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오토바이의 뒤를 쫓자 도주하던 녀석이 뒤를 돌아본다. 이 순간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30대 중반, 스포츠머리, 찢겨져 올라간 눈, 매부리 코, 얇은 입술, 그리고 입가에 남아 있는 자상의 흔적을 보았다.
부아아아아아앙―!
놈이 스로틀을 당기자 할리 데이비슨의 속도가 빨라진다.
직선 코스였기에 거칠 것 없이 쏘아져 간다. 반대로 현수의 속도는 차츰 줄어든다.
사람인 이상 체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치잇―!”
달리기를 멈춘 현수는 놈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널찍한 어깨, 잘록한 허리 등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평상시 체력 관리를 하는 놈이다.
등에 지고 있던 케이스를 보니 체이탁인 듯하다.
“다음엔 놓치지 않겠어.”
돌아서 호텔로 되돌아왔다.
“헤이스트나 블링크만으론 부족해. 늘 이런 식이면 내 눈에 보이는 곳으로 즉시 이동하는 마법을 만들지 않으면 놈을 잡을 수 없어.”
실제로 흑룡은 현수에게 총을 쏜 직후 즉각 자리를 떴다.
결과조차 확인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 것이다. 성공 여부는 신문 또는 방송에서 확인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매번 이렇게 저격하고 즉각 자리를 떠버리면 영원히 잡을 수 없다. 항상 경호원들을 천지사방에 깔아놓지 않은 한은 그러하다.
그런데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방금 전의 생각처럼 즉시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마법이라도 개발해야 한다.
블링크처럼 불특정 방향으로의 위치 이동이 아니다.
원하는 곳으로의 이동이다.
워프나 텔레포트는 좌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 거리가 가까울 수도 있고, 멀 수도 있다. 따라서 평범한 마법은 아닐 것이다.
“흐으음! 두고두고 생각해 볼 일이군.”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조용한 곳에서 차분히 연구를 해도 오래 걸릴 일이다. 관련 마법들의 룬어 배열을 일일이 확인하는 시간만 해도 상당할 것이다.
“가만! 매직미사일은 목표물을 따라가잖아. 그렇다면 텔레포트나 블링크를 하되 타깃이 정해지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근데 어떻게 해야 하지?”
현수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수학이란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를 명쾌한 방법으로 설명하거나 해결해 내는 학문이다.
몹시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금방 실마리를 잡은 듯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접근 방법을 발견했다 하여 반드시 해결까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하여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땡―! 스르르르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스위트룸 앞에 있던 박 과장이 얼른 다가온다.
“아! 부사장님! 다행입니다.”
“네?”
“외출하셨던 겁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뭔 소리예요?”
“어떤 미친놈이 부사장님이 머무실 객실에다 대고 총을 쏜 모양이에요.”
“……!”
현수는 아차 했다. 에티오피아 정부에서 특별 경호를 해주고 있음을 깜박한 것이다.
‘밖에 나갔다 온 걸 뭐라 설명하지?’
본인이 룸 안에 들어간 후 바깥엔 여섯 명의 경호원이 있었다. 이들의 눈을 피해 외출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밖에서 들어왔으니 의아할 것이다. 현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군복 차림 사내가 정중히 고개 숙인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누군가 총격을 가해 객실 창문이 깨졌습니다. 머무실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객실을 준비했으니 옮기시지요.”
“…그러죠.”
바뀐 방 역시 스위트룸이다. 다행히도 안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바깥에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현수는 방으로 들어가 한 번 훑어보고는 차량을 요청하였다.
요구 사항은 즉시 받아들여졌고, 현수는 경호 차량에 둘러싸인 채 코리안 빌리지로 이동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셨지요?”
현수의 인사를 받은 한국전 참전용사 바샤 아스토우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어서 오시구랴, 성자 양반!”
“에이, 성자라뇨. 그냥 미스터 킴이라고 불러주세요.”
“미스터 킴? 그려, 본인이 원하면 그리 불러주지. 한데 여기는 웬일인감?”
“그냥 인사드리러 왔어요. 몸은 괜찮으시죠?”
“그럼, 그럼! 성자님이 돌봐줘서 아주 멀쩡해. 올가을엔 새장가를 가도 될 정도이네.”
바샤 아스토우 할아버지는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다. 어찌 장단을 맞춰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하! 그럼 축하드리러 또 와야겠네요.”
“그려, 그려! 또 와, 또 와야지. 이렇게 보면 반가운데.”
환히 웃는 바샤 아스토우 할아버지는 앞니가 하나도 없다. 치과 진료를 받을 형편도 못되지만 아디스아바바에선 치과 진료를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치과라고 할 수 있는 건 달랑 세 곳뿐이다.
당연히 고관대작 및 부자들의 전유물이고, 그나마 외국인들이 이용할 만한 건 없다. 한마디로 열악하다.
‘근데 리야 아스토우는 뭐한 거야? 치과에 모시고 갔어야지. 참! 비싸서 그랬을까?’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아스토우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양철집이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는 걸 감안하면 치과 진료는 꿈도 못 꿀 일이었을 것이다.
내일 아침, 현수는 킨샤사로 갈 예정이다. 가면 의료원 건립 문제 등을 알아볼 생각이다.
‘흐음, 그러고 보니 의료기관을 거의 못 봤어. 근데 로마우 바이할 의무부장관은 주무장관으로서 뭐를 하는 거지? 상당히 개혁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인 것 같았는데.’
2014년 국가별 GDP를 비료해 보면 한국은 1조 1,295억 3,600만 달러이고, 에티오피아는 425억 1,600만 달러이다.
한국이 26.5배나 더 많다.
따라서 한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만 현수는 그것을 망각한 채 낙후된 의료 환경을 왜 개선시키지 않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자 양반! 이렇게 왔으니 잠시만 기다리시우. 금방 가서 커피 한 잔 가져올게.”
“네? 아, 아닙니다. 커피 안 주셔도 됩니다.”
“아니긴……! 리야가 그랬네. 성자 양반 커피 좋아한다고.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네.”
말을 마친 아스토우 할아버지는 밖으로 나간다. 현수는 시선을 돌려 집 내부를 살폈다.
아직 공사 중인지라 완공된 것은 아니지만 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단열시공이 제대로 잘되었는지 덥지 않다는 느낌이다.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서울의 여느 아파트 부럽지 않은 시설이 갖춰져 있다. 내친김에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한창호 건축사 사무소에서 파견 나온 현장감독 이정빈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김현수입니다.”
“네, 압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아주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고개 숙인다.
“공사는 어때요? 잘 진행됩니까?”
“그럼요! 아주 잘 진척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정빈 현장감독은 이곳에 와서 몇 번을 놀랐다.
첫째는 열악한 환경이다. 처음엔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둘째는 공무원들이 매우 협조적이면서도 양심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허가를 받아야 할 일이 있거나 공무원들의 도움이 필요한 걸 이야기하면 그야말로 재까닥 이루어진다.
천지약품이 들어설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다. 그렇기에 공사에 앞서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대부분이 기우였다. 건축허가는 서류접수 후 두 시간 만에 떨어졌다.
그리곤 곧바로 가설전기가 들어왔다. 공사장 진입로 정비도 공무원들이 나서서 해결했다. 국제전화가 가능한 전화선과 유선 인터넷선도 말하기 전에 공사장까지 끌어왔다.
그야말로 공사함에 있어 조금도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알아서 챙겨주었던 것이다.
하여 뇌물을 바라나 싶어 봉투에 돈을 넣었다.
기회를 보아 찔러줄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예 그런 걸 바라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기회를 잡아 돈이 든 봉투를 주었더니 열어 보고는 화들짝 놀란다. 그리곤 봉투를 돌려주고 도망갔다.
그날 이후엔 아예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는다.
일정한 간격 밖에 서서 협조해 줄 것이 무어냐고 묻곤 한다. 또 봉투를 줄까 싶어서인 듯하다.
세 번째는 이곳 사람들이 너무 순박해 놀랐다.
코리안 빌리지 사람들은 원래부터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다. 현수의 무료 봉사 이후에 더 심해졌다.
그래서 뭐라고 말만 하면 다 들어준다.
예를 들어, 공사현장에서 설계변경을 하여 도면을 출력하려 하는데 플로터 용지가 없었던 적이 있다. 하여 지나가는 말로 그게 없어 불편하다고 투덜댔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것은 다 썼고, 아디스아바바에선 어디에서 그걸 파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때문이다.
그랬더니 누군가 이 말을 듣고 시내로 나가 용지를 구해왔다. 용지를 구매한 금액 이외에도 교통비를 주려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여 몹시 미안했었다.
그래서 함부로 투덜대지도 못한다. 말을 꺼낸 게 미안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던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