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3
“…아! 네에, 그러지요.”
내무부를 나선 현수는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킨샤사 저택의 총책임자 피터스 가가바가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그의 뒤에 있던 모든 경호원 역시 직각으로 허리를 꺾는다. 이들의 뒤에는 시녀장 엘린 가가바를 비롯한 시녀들이 공손히 고개 숙이고 있다.
“네, 별일 없죠?”
“그럼요!”
피터스 가가바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는 사이에 현관을 들어선 현수는 엘린 가가바에게 시선을 주었다.
“부모님들은요?”
“세 분 모두 빈관에 계십니다. 방금 전에 저녁 식사를 하셨지요. 마드모아젤 강만 쇼핑 나가셨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곧 오실 겁니다. 출발했다는 연락이 있었거든요.”
도착을 했으니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려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식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하니 약간은 뜸을 들여야 한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출출하군요.”
“그럼, 즉시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특별히 원하는 음식이 있으신지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그냥 준비된 거 주시면 됩니다.”
언제 저택의 주인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그렇기에 늘 신선한 식재료를 준비한다. 물론 소모되지 않는 것은 사용인들이 조리하여 먹게 된다.
“네! 주인님.”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 엘린의 손짓에 시녀들이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간다. 오랜만에 저택을 찾은 주인님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들려는 것이다.
“아! 맛있었습니다.”
오늘의 요리는 연어 빠삐요뜨(Papillote)였다. 연어의 살을 종이에 싼 뒤 스팀으로 익힌 것으로 프랑스 요리이다.
레몬과 대파의 향이 비린내를 잡아주어 아주 좋았다. 현수는 타르타르 소스를 곁들여 빵과 함께 식사했다.
“입에 맞으셨나 봅니다.”
“그래요, 엘린! 아주 맛이 좋았어요. 음식 솜씨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귀한 식재료를 많이 축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건가요? 아무튼 맛이 괜찮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엘린은 공손히 절을 하곤 한 발짝 물러선다. 현수가 식탁을 벗어나면 시녀들로 하여금 뒷정리를 시키기 위함이다.
식당을 벗어나 이 층으로 오르려는데 피터스 가가바가 다가온다.
“주인님! 손님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누구요?”
현수의 말에 피터스 가가바는 손에 들고 있는 명함으로 시선을 돌린다.
“…게리 론슨이란 분입니다. 미국 재무부 차관보입니다.”
“흐음……! 오랜만에 왔으니 부모님부터 뵈어야겠습니다. 접견실에서 기다리게 하세요.”
“네! 주인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피터스 가가바는 현수의 표정이 살짝 굳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이 층에 오른 현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곤 빈관에 머무는 부모님부터 찾아뵈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왔습니다.”
“아! 그래!”
낚싯대를 닦고 있던 아버지는 무덤덤한 표정이다. 물론 어머니는 다르시다!
“에구, 이 녀석아! 소식 좀 자주 전해라. 이러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얼굴 잊어먹겠다.”
어머니의 타박에 현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간 자주 연락드리지 못한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근데 불편한 건 없으세요?”
“왜 없겠니? 있지, 있어도 아주 많다.”
“아! 그러세요? 뭐 부족한 거라도 있는 거예요?”
돈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무엇이든 대령시킬 수 있기에 한 말이다.
“우선 손주가 없구나. 아들이 결혼한 지 석 달하고도 열흘쯤 지났는데 아직도 손주 가졌다는 며느리가 없어.”
“……!”
이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안 생기면 안 되는 일이기에 현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둘째! 니 아버지 심심해 미친다. 말은 안 통하지 같이 놀아줄 친구는 없지. 피터스 가가바라는 양반과 이틀 걸러 한 번씩 술 마시는 거밖엔 할 일이 없다고 하시는구나.”
이 말은 사실이다.
어머니는 이리냐와 연희의 모친인 안나 여사와 강진숙 여사가 있어 대화 상대라도 있지만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언어 장벽이 있어 의사소통 불가능이다.
“…그러… 시죠. 죄송해요 여기 계시면 안전해서…….”
암살 명령을 이행하려 애쓰는 흑룡은 프로이다.
따라서 타깃이 아닌 부모님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부모님을 미끼로 쓰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서울에 있으면 아버지는 추씨 공방으로 출퇴근할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대화와 소일거리가 필요한 때문이다. 경호원을 붙여주고 싶어도 그 사람들을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하는 게 미안하다며 싫다 할 것이 분명하다.
퇴근 후엔 며칠에 한 번 꼴로 공방 사람들 또는 친구들을 만나 한잔할 것이다. 그리곤 얼큰해진 상태로 휘청거리며 귀가한다. 완전 무방비 상태로 움직이는 것이다.
어머니는 성당 활동을 하면서 천지 사방을 쑤시고 다닐 것이다. 봉사도 하고, 친교도 쌓겠지만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할 것이다.
어머니 역시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는 걸 내켜하지 않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여기기에 폐를 끼친다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호원 없이 다니면 흑룡은 언제든지 부모님 중 하나를 납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현수는 운신의 폭이 확 줄어들게 된다.
하여 가장 안전하다 싶은 킨샤사에 모셔다 놓았는데 갑갑함을 토로하고 있다.
“어머니! 그럼 모스크바에 가 계시는 건 어때요? 거긴 사돈 내외가 다 계시잖아요.”
“모스크바……? 아이고, 얘야! 나는 괜찮지만 그쪽 바깥사돈이 레드마피아인지 뭔지 하는 거 최고 두목이라면서? 니 아버지가 꽤나 내켜하시겠다.”
“끄으응!”
어머니의 말이 맞다. 아버진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다. 현수가 출세하지 않았다면 소시민 축에도 못 낄 수도 있다.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다 소리 없이 스러지는 존재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반면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마음만 먹으면 50만 명에 이르는 조직원에게 전쟁을 명령할 수도 있다.
모스크바에 커다란 저택뿐만 아니라 자가용 비행기와 초호화 요트도 소유하고 있다. 은행에 얼마만한 예금이 있는지는 본인만 아는 일이다.
치열한 권력 다툼 끝에 최정상에 오른 그의 카리스마는 아버지를 주눅 들게 할 것이 분명하다.
둘은 대화 상대도 될 수 없다. 아버진 러시아어를 모르고, 이바노비치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설사 언어가 해결되더라도 둘의 대화는 접점이 없다.
이바노비치에게 이리냐는 친딸이 아니다. 따라서 그녀의 어린 시절 또는 성장기를 주제 삼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이리냐가 며느리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따라서 둘은 이리냐를 화제 삼아 나눌 대화가 없다.
있다면 현수에 관한 것인데 이것도 한 30분쯤 이야기하면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너무 평범하게 자란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요?”
“우리 도로 그 집으로 가면 안 되겠냐?”
“…여기가 불편하세요?”
“아니다! 나쁘진 않아. 집도 크고, 음식도 맛있고,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좋아. 하지만 여긴 우리와…….”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를 생략했음은 충분히 짐작된다.
“알았어요. 그럼 가세요. 대신 경호원들 꼭 데리고 다니셔야 해요.”
“아이고, 얘야! 여기서도 경호원들 따라다니는 게 영 성가시다. 우리가 뭐라고 사람들이 우르르…….”
곁에 있던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쯤 되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야 한다.
“어머니!”
“왜?”
“저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너를……? 누가……? 왜……? 니가 뭘 어쨌다고?”
어머니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현수처럼 너그럽게 대하는 사람도 드물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저택 사람들 때문에 든 생각이다.
피터스 가가바를 비롯한 경호원과 엘린을 비롯한 시녀들 모두 현수의 너그러움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경호원들은 대통령궁으로부터 받는 월급의 5배를 추가로 지급받는다. 시녀들은 경찰 월급의 3배쯤 된다.
지난 몇 달간 받은 급여로 모든 부채를 청산했다.
가장 먼저 근무하기 시작한 피터스 가가바를 비롯한 24명의 대통령궁 소속 경호원은 지금까지 7번의 급여를 받았다.
이것 이외에도 9월과 12월, 그리고 3월에 보너스를 받았다. 총 10번 받은 셈이다. 대통령궁으로부터 지급되는 급여까지 포함시키면 지난 7개월 동안 57개월치 급여를 받았다.
고통스러웠던 가난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게다가 경호원 모두에게 주거가 제공되고 있다.
이는 시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주거지가 저택 입구에 지어져 있고 입주까지 마친 상태이다.
4인 가족은 실면적 30평, 5인은 38.5평, 6인은 46평짜리 연립주택이다. 한국의 32평형 아파트는 전용면적 25.7평이다. 이보다 넓은 주거를 제공받은 것이다.
전기, 수도, 가스 사용 요금은 없으며 퇴직할 때까지 사용할 수 있다. 모두 새집이니 아주 쾌적하고, 편안하다.
현대식 주방이 있으며. 킨샤사에선 찾아보기 힘든 수세식 화장실도 있다. 붙박이장이 있으며 가전제품도 모두 설치되어 있다. TV, 라디오, 세탁기, 컴퓨터 등이다.
이 모든 것이 현수의 덕이다. 따라서 현수를 좋아하고 칭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어머니 생각에 현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 성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수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걱정하실까 봐 말씀 안 드렸는데 벌써 여러 번 총격을 당했어요.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들렀던 에티오피아에서도 절 총으로 쐈구요.”
예상대로 두 분 모두 화들짝 놀란다.
이건 폭력을 휘두르는 해코지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빼앗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잘난 아들이 총 맞아 죽을 뻔했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일어선 어머니는 현수의 몸을 살핀다.
“뭐, 뭐라고? 어,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응? 다친데…….”
“다행히 아직은 괜찮아요. 근데 누가 범인인지 알지만 아직 못 잡았어요.”
“누구냐? 그 나쁜 놈이!”
어머니 역시 표정이 굳어 있다.
“…흑룡이라는 지나에서 파견한 살인청부업자예요.”
두 분은 살인청부업자라는 말에 또 한 번 흠칫하신다.
결코 평범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섬뜩한 기분이 느껴진 때문이기도 하다.
“사, 살인청부업자? 돈 받고 사람 죽이는……?”
“네! 한번 임무가 주어지면 목표물에 대한 저격이 성공할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주 나쁜 놈이죠.”
“아이고 얘야! 어떻게 하냐? 그놈 못 잡아? 여기 경찰에게 말하면…….”
생각해 보니 이곳은 만리타국이다. 일가족 모두 외국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경찰에게 이야기해 봤자 아무 소용없겠다는 생각에 말끝을 흐린다.
“경찰에게 잡히면 그게 프로겠어요? 그놈은 여기는 몰라요. 그래서 두 분을 이쪽으로 모신 거예요. 한국으로 가시면 양평 새집으로 모실 건데 가급적 외출하지 않으셔야 저를 돕는 겁니다. 거긴 안전하거든요.”
“양평? 우미내 집은 어쩌고?”
“집 다 빼서 이사했어요.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 더 쓸 수는 있지만 거긴 안전하다 장담 못해요.”
“……!”
어머니는 다니던 성당 식구들과 작별 인사조차 변변히 하지 못하고 양평으로 이사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이때 아버지가 나서신다.
“그냥 여기에 있으마. 그놈이 잡히면 귀국할게.”
“아버지……!”
현수는 그렇게 해도 괜찮겠느냐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조금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우리가 가서 납치라도 당하면 문제가 될 거다. 그러니 그놈이 잡힐 때까지는 꾹 참으마.”
남자라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신 모양이다.
“알았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여기도 정 붙이고 살려면 못 살 곳은 아니니 괜찮다. 우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아들! 나도 괜찮아. 그냥 여기 더 있을게.”
“…고맙습니다.”
현수는 고개 숙여 마음을 표현했다. 아들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려는 부모의 마음을 어찌 짐작 못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