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44화 (943/1,307)

# 944

“장모님! 그동안 안녕하셨지요?”

이리냐의 모친 안나 게라시모바 체홉은 현수가 올리는 큰절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는데 이젠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 회복포션과 리커버리 마법, 그리고 균형 잡힌 영양식이 제공된 결과이다.

어쨌거나 현수가 무릎까지 꿇자 안나는 안절부절못한다.

“아이고, 이러지 않아도 되네. 사위!”

“아닙니다. 이건 한국식 예절입니다.”

“아이구, 체첸어는 또 언제 익혔누?”

“장모님께 인사드리려 시간 날 때다마 틈틈이 공부한 겁니다. 어색하지 않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는 거짓말이다.

“어색? 아닐세. 마치 체첸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네. 그래, 사위도 잘 있으셨는가?”

“그럼요! 장모님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시죠?”

“그럼, 그럼! 모든 게 만족스러워. 아주 잘 지내네.”

“여기 오래 계셨는데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고향……? 거긴 별로네. 좋은 기억이 별로 없어.”

안나 장모님의 표정은 금방 어두워진다.

체첸 반군으로 참전했던 남편과 아들을 잃었던 곳이다. 그 후론 정말 지겨운 가난으로 점철된 곳이기도 하다.

이리냐가 없었다면 아직도 그곳에서 끼니 거를 걱정을 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춥고, 배고프고, 힘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곳이다. 그렇기에 고향이라는 말만으로도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거기서 어렵게 사셨다는 이야긴 들었습니다. 사시는 동안 신세 진 분들도 있을 텐데 그분들이라도 보고 오세요.”

“신세 진 사람들……?”

생각해 보니 이웃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모녀가 굶주렸을 때 양식을 빌려줬고, 이리냐의 학비를 마련하려 동분서주할 때에도 돈을 빌려줬던 이들이 있었다.

가난했지만 이웃과의 정은 나누고 살았던 것이다.

“제 비행기를 타고 다녀오세요. 가셔서 신세 진 분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구요. 이건 여비에 쓰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다 쓰셔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현수가 내민 봉투를 바라보는 안나 장모의 눈에 금방 습기가 오른다. 작은 일에도 마음 써주는 사위가 고마워서이다.

“거기 가시기 전에 모스크바 먼저 들르세요. 거기도 집 있는 거 아시죠? 가셔서 이리냐 데리고 가세요. 참, 거기서 친지에게 드릴 선물도 사시구요. 아셨죠?”

말을 하며 봉투를 조금 더 밀었다.

“고맙네, 사위! 정말 고마워. 흐흑!”

기어코 눈물을 흘리신다. 고마워서, 좋아서 흘리는 것인지라 말리지 않았다.

“제 비행기에 쉐리엔과 듀 닥터, 그리고 항온의류가 있어요. 장모님 마음대로 선물하셔도 되는 겁니다.”

“…그 비싼 쉐리엔과 듀 닥터, 그리고 항온의류를?”

이곳 킨샤사에도 뚱뚱한 여인은 있다. 그녀들 역시 쉐리엔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살아가는 중이다.

워낙 공급되는 물량이 적어 통관이 마쳐지는 날마다 쟁탈전이 벌어질 지경이다. 당연히 정가보다 비싸게 거래된다.

듀 닥터 역시 상당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피부에 트러블이 있거나 민감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애용한다.

수요가 적을 것으로 판단되어 통관되는 양이 아주 적다. 하여 이것 역시 원래의 가격보다 비싼 값에 암거래된다.

항온의류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옷이다. 입으면 더위를 느낄 수 없게 되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천지약품과 천지건설 직원들에게 작업복 개념으로 하나씩 지급되어 그 효능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10장 아버님이라 부르지 마라

처음 항온의류가 들어왔을 때 한국의 추적60분 또는 PD수첩 같은 방송에서 이에 대한 여러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아무리 더워도 그것 하나만 걸치고 있으면 전혀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방송 이후엔 문의가 빗발쳤다.

아직 이실리프 어패럴이 진출하지 않은 상태인지라 이실리프 그룹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일반 판매를 할 정도로 상품이 만들어지지 않아 본격적인 판매는 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돈이 있어도 상품을 살 수 없다고 하자 작업복으로 지급받은 걸 팔라는 흥정이 오갔다.

돈이 급한 직원들이 자신의 작업복을 팔았지만 이내 후회했다. 값은 계속해서 올랐고, 더위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항온의류 역시 비싼 값에 거래된다.

킨샤사의 어떤 신문에는 오늘의 시세라는 란(欄)이 있다.

여기엔 매일매일 쉐리엔과 듀닥터, 그리고 항온의류의 실거래가가 표시된다. 이것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값이 조금씩 오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들여온 것의 양은 정해져 있고, 날이 갈수록 이것을 사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니 이럴 수밖에 없다.

안나 장모는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을 했다. 하여 프랑스어 과외 교습을 받는 중이다. 그게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교습이 시작된 것이 지난 10월부터이니 벌써 반년이 넘어 초보 단계는 넘어서 있다. 같은 어순인지라 한국인보다는 불어를 배우는 속도가 빠른 모양이다.

하여 요즘은 회화와 독해 등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이때 사용되는 교재가 바로 신문이다. 기사를 읽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새로운 소식도 알게 되고, 불어 실력도 늘어나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그렇기에 듀 닥터와 쉐리엔, 항온의류의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안나 여사의 방을 나선 현수는 본관으로 가려다 걸음을 돌렸다. 연희의 모친인 강진숙 여사가 조금 전에 당도했다는 전갈이 있었던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안나 여사는 현수가 준 봉투를 열어 보고 화들짝 놀라고 있다. 안에 담긴 금액은 미화 100불짜리 100장이다. 1만 달러이니 1,200만 원쯤 된다.

안나 여사는 이걸 보고 놀란 게 아니다. 봉투 안에는 달러화 이외에도 작은 쪽지 하나가 더 있었다.

거기엔 체첸어로 쓰인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사랑하는 안나 장모님께!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리냐를 제 아내로 주신 장모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결혼식 날 말씀드린 대로 평생토록 아끼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향에 다녀오실 때 부족함이 없도록 비행기에 따로 300만 달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봉투 속의 돈은 선물 사시는데 쓰시고, 나머지는 친지들을 돕는 데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체첸을 떠나 이곳 킨샤사에 자리 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데려오셔도 됩니다. 기꺼이 돕겠습니다.

―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위 김현수 올림.

“세상에……!”

쪽지를 모두 읽은 안나는 나지막한 경악성을 토한다. 사위의 통 큼에 감탄한 것이다.

체첸에서 300만 달러는 엄청나게 큰돈이다.

러시아와의 분쟁 이후 체첸은 불안한 전쟁 속에 놓였다. 살인과 약탈, 그리고 폭력이 이어졌다.

당연히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하다. 따라서 이 돈이라면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은 데려오라는 말은 무척 고무적이다. 오기만 하면 이실리프 그룹에 채용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나 장모가 이렇듯 좋아할 때 현수는 강진숙 여사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장모님! 그동안 안녕하셨지요?”

“그럼, 그럼! 자네 덕에 아주 잘 지냈네.”

회복 포션과 리커버리 마법 덕에 10년은 젊어 보이는 장모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다.

우중충했던 평상복을 벗고 세련된 옷을 입고 있으니 누가 봐도 귀부인이라 할 정도로 우아하다. 게다가 완숙한 미모까지 겸비되어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도 다시 볼 정도이다.

“쇼핑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과일 사러 갔다 왔네.”

“네? 그걸 왜 장모님이…….”

“나 혼자 갔다 온 게 아니라 알리사랑 마리나를 데리고 갔었네. 저택에서 쓸 식재료를 살 겸해서.”

한국에선 꽃집을 했다. 이곳에 와선 소일거리가 없으니 심심해서 식재료를 살 때 늘 동행했던 모양이다. 다른 나라 풍광도 구경하고 심심함을 타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장모님! 혹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한국으로……? 아닐세, 내가 가면 사돈어른 심심해서 안 되지.”

말은 그렇게 해도 가고 싶기는 한 듯하다.

현수는 잠시 이맛살을 좁혔다.

강진숙 여사는 한국으로 가도 된다. 연희가 아내라는 걸 흑룡이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지 말아야 한다.

현재 천지그룹 계열사 거의 전부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대박 행진을 하는 중이다.

천지정유는 비날리아 인근 지역의 원유 채굴권 획득뿐만 아니라 콩고민주공화국 동쪽 끝에 위치한 루웬조리 산(5,109m) 아래에 대규모 정유 시설을 건설하는 중이다.

이웃 나라 우간다와 접경지대인 이곳에서 새로운 유전이 발견된 결과이다. 정유된 것은 콩고민주공화국 각지로 송유 된다. 땅 짚고 헤엄치는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시설은 천지건설에서 짓는다.

또 다른 계열사인 천지통신은 킨샤사를 비롯한 주요 도시의 전화 및 인터넷 연결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으로 치면 KT 같은 회사가 되려는 것이다.

국영 통신사가 있기는 하나 기술력 및 자본이 형편없어서 이 방면 사업 전체가 민영화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사업 지분의 50%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가 갖는다. 반만 민영화되는 셈이다. 이게 오히려 더 좋다.

정권이 교체되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업비 전액 지하자원으로 지불받기로 했다. 당연히 각종 지하자원에 대한 채굴권이 주어졌다.

하여 천지자원이라는 회사가 추가로 꾸려졌다. 이 회사는 희유 광물을 우선적으로 채굴할 계획이다.

값비싼 콜탄과 니오븀이 그 대상이다.

이것들을 운반할 철로 공사 역시 천지건설에서 수행한다.

천지전자는 요즘 킨샤사 외곽에 공장을 짓는 중이다.

이곳에선 콩고민주공화국 내수에 쓰일 라디오, 비디오, TV,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이 생산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다리미, 전자레인지, 믹서, 전화기 등도 제작한다.

한국으로 치면 LG전자 같은 회사가 될 것이다.

이 공장도 천지건설이 짓는다.

현수에게 디오나니아 잎사귀의 성분을 분석해 준 김국환 연구실장이 근무하는 천지섬유 역시 대박 예정이다.

계열사인 천지방사, 천지방직, 천지염색, 천지어패럴을 진출시켰다. 이곳에서 실을 잣고, 천을 짜내며, 염색한 뒤 의복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인구가 많으니 당연히 대박일 것이다.

이처럼 계열사 전부가 훨훨 날고 있는데 딱 하나 천지화학만은 아무런 성과가 없다.

천지화학 대표이사 이강혁 때문이다.

연희는 생물학적 아버지인 이강혁을 부친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의 일생을 짓밟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파렴치한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지화학 대신 조경빈의 부친 조인성 회장이 경영하는 백두화학이 콩고민주공화국에 진출해 있다.

현재 지어지고 있는 공장에선 고밀도 폴리에틸렌과 PVC, 그리고 아크릴 등 석유화학계 기초 화학물질이 만들어진다.

이것들은 아프리카 전역에 공급할 것들이다.

천지화학에서 눈독 들이던 사업이 백두로 넘어간 것이다.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한 이강혁 회장은 왜 이런 일이 빚어졌는지를 확인하도록 했다.

다른 계열사 사장들은 모두 현수를 만났다. 그 자리엔 콩고민주공화국의 담당 공무원들이 함께했다.

그런데 그냥 평범한 공무원이 아니라 거의 장, 차관급인지라 일사천리로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현수와 일대일로 만나지 못했다.

왜 본인만 접근할 수 없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하여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다가 계열사 회장단 회의, 그러니까 격주 주말마다 있는 이연서 회장 가족모임에 가게 되었다.

말이 가족 모임이지 실상은 치열한 권력 다툼의 장이다.

총괄회장 이연서가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사망하면 서로 그 자리를 이어받으려 각축전을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주먹을 휘두르거나 뒷구멍에서 음모를 꾸미는 등의 일은 없다. 정정당당하게 사업을 하고 그로 인한 성과를 보고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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