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5
물론 같은 성과라 할지라도 포장하는 기술에 따라 커 보이기도 하고 하찮은 것이 되기도 한다. 하여 어찌 발표할 것인지, 어떤 타이밍에 말을 꺼낼 것인지를 사전에 준비한다.
어쨌거나 그 자리에서 이강혁 회장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천지통신, 천지섬유, 천지자원, 천지정유, 천지전자 등 모든 계열사가 장밋빛 미래를 발표했다.
물론 정점은 천지건설이 찍었다. 어떤 계열사도 따르지 못할 성과를 올린 결과이다.
반면 천지화학은 유일하게 현상 유지가 고작이었다.
다른 계열사에 비해 상대적 빈곤감을 느꼈고,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껴 자괴감이 일 정도였다.
당연히 가장 마지막에 자신 없는 음성으로 그간의 성과 발표를 마치자 이연서 회장이 쏘는 듯한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이강혁 회장은 절로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어 시선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연서 회장의 일갈이 있었다.
“너희 모두 잘 들어라. 내가 사업을 일으키느라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제대로 큰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녀석도 있다.”
“……!”
모두들 누가 제대로이고, 누가 아닌지를 생각하는지 대꾸가 없었다. 이때 이 회장의 발언이 이어진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사업도 중요하지만 가정도 중요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너희 중에 여자 좋아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안다.”
“……!”
이 대목에서 거의 모든 자식이 고개를 숙인다. 이 회장에게 들킨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사내라면 본인이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나중에 큰 벌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는 너희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한다.”
“……!”
또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혹시 느닷없는 후계자 발표인가 싶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의 시선이 이 회장의 입에 몰려 있다.
“오늘 이후로 여자 문제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녀석은 국물도 없다. 뭔 소리인지 알지?”
“네에!”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한다. 방금 전에 한 말이 본인에게 한 경고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이 회장의 시선이 둘째 아들인 이강혁 회장에게 향한다.
“강혁이 너!”
“네, 아버님.”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쏠린다. 후계자 목록에서 이강혁이 제외되는 순간인 듯싶었던 때문일 것이다.
“……?”
“아버님은 남의 부친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너와 난 아버지와 아들이다. 높여 부를 말이 없는 관계인 것이야.”
“아……! 네에,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래,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또는 사위가 장인에게 아버님이라 부르는 건 괜찮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 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남남인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
“좋아, 오늘 식사 끝이다. 다들 가고 강혁이만 남거라.”
이강혁 회장은 모두가 가고 난 뒤 신랄하게 깨질 것이라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둘만 남게 되자 이강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무엇이 죄송한 게냐?”
“화학만 성과가 없습니다. 모든 게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다. 네가 무엇을 잘못해서 죄송하다 했느냐는 뜻이다.”
“그건… 회사의 실적을 높이지 못해서…….”
이강혁 회장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이연서 회장이 중간에 끼어든 때문이다.
“아니! 네가 잘못한 건 그게 아니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느냐?”
“네? 아, 그럼요. 모두 기억합니다.”
“그래! 네가 잘못한 건, 아니, 화학만 성과가 없는 건 네 젊은 시절이 원인이다. 그때 네가 누구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또 반성해라.”
“네……? 그게 무슨……?”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지만 이 회장은 썩 물러나라는 손짓만 했을 뿐이다.
그날 이후 이강혁 회장은 본인의 젊은 시절을 여러 번 반추했다.
그때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빵빵한 지갑으로 원하는 것 거의 모두를 가지던 시절이다. 술집과 나이트클럽을 제집 드나들 듯 전전했다.
그때 만났던 많은 여인이 있다.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난 게 거의 대부분이지만 한동안 만남이 이어진 적도 있었다.
그들과의 결말을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집안 차이가 너무 심해 스스로 떨어져 나간 여인들도 있었고, 돈을 요구하여 몇 푼 집어주고 끝낸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천지화학 사장이 되었고, 그때 강진숙을 만났다. 젊고, 예쁜데다, 똑똑하고, 붙임성까지 있었다.
불같은 사랑을 했지만 재벌가의 결혼은 사랑만으론 이루어지기 힘들다. 하여 그녀를 버리고 현재의 아내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게 이수린이다. 이연서 회장이 현수와 짝지어주고 싶어 소개해 줬던 장본인이다. 사촌지간인 현우가 끼어들면서 자연스레 소멸된 관계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강진숙이 임신 7개월일 때 수린의 모친과 결혼했다. 너무 늦었지만 수술비를 주고 낙태를 강권했다. 그리곤 27년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꽃집에서 강진숙을 만났고, 강연희가 둘 사이의 딸이라는 것도 알았다.
친자 관계를 확인하겠다고 하면 문제이다.
회사 내부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망신이다. 하여 고심 끝에 현재의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천지화학이 태동할 때 주무장관의 하나뿐인 딸이라 결혼한 여인이다. 수린의 모친은 강진숙을 찾았고 유산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아울러 서울로부터 최소 200㎞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갈 것을 강요했고, 연희는 천지건설에 사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마치 죄 지은 여인 취급을 한 것이다.
그날 이후 강진숙으로부터 연락이 왔었으나 이강혁 회장은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서를 통해 더 이상 볼일이 없으므로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메시지만 보냈다.
그날 이후 아무런 접촉도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강진숙은 지방으로 이사했고, 강연희는 영국으로 장기 출장을 떠났다.
하여 일단락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본인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 중에 강진숙이 포함되어 있다.
하여 강 여사가 이사 간 곳을 찾아보도록 했다. 주민등록 이전은 되어 있는데 거주한 적이 없다고 한다. 천지건설에 확인해 보니 강연희는 퇴사 처리되어 있다.
같은 건물에 있는 천지기획으로 옮겨갔지만 개인 정보이므로 인사 담당자가 알려주지 않았기에 모르는 일이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 잠적한 것으로 여긴 이강혁 회장은 이들 모녀가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럴 만한 역량도, 돈도, 지위도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를 모른다.
어쨌거나 이 회장은 오늘도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
누군가 자신과 척지은 사람이 있어 콩고민주공화국으로의 진출이 무산되었는데 그게 누군지 알고 싶어서이다.
아버지인 이연서 회장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감히 물어볼 수는 없다. 그랬다간 후계자 대열에서 완벽히 쫓겨나는 신세가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이강혁은 심복들을 풀어 예전에 알고 지냈던 여인들에 대한 수소문을 진행 중이다. 그중엔 강진숙도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단에 끼워 넣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진숙이 귀국하여 양평 저택에 머물게 되면 눈치챌 수도 있다. 때로는 외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콩고민주공화국 진출의 열쇠는 현수가 쥐고 있다.
그런데 강 여사가 양평 저택에 머문다는 걸 알게 되면 틀림없이 접촉하려 할 것이다.
속은 어떤지 모르지만 강 여사는 마음속에서 이강혁을 지웠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만나게 되면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렇기에 귀국을 말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럼 예서 조금 더 머무세요. 나중에 부모님 귀국하실 때 같이 들어가시구요.”
“그래! 그러세. 그나저나 신경 써주어 고맙네.”
“고맙기는요. 당연한 일이지요. 참! 연희랑은 자주 통화하시죠?”
“그럼! 그래서 자네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아네. 고마워!”
“아이구, 그런 말씀 들으려 여쭤본 거 아닙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전 손님이 왔다 하여…….”
강 여사는 손님이 기다린다는 뉘앙스를 느꼈는지 얼른 가보라며 손짓한다.
“알았네, 어여 가게. 어여! 손님 기다리시겠어.”
“네, 내일 아침에 또 뵐게요.”
“그래! 그러게.”
빈관을 나선 현수는 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아리아니!]
현수의 어깨 위에서 발장구를 치며 놀고 있던 아리아니가 반색하며 대꾸한다.
[네, 주인님!]
[전에 이야기한 대로 집 뒤에 바이롯 재배 농장을 지을 거야. 전단토를 이전시키는 거 생각해둬.]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노에스에게 얘기하면 하룻밤이면 이루어질 일이니까요.]
[그리고 엘리디아 불러서 여기서 쓰는 수질 좀 더 좋게 하라고 해.]
[네에! 그럴게요. 근데 지금 해요?]
[응! 기왕이면 빠른 게 좋지 않겠어?]
[네에, 알아서 모시겠어요.]
아리아니는 엘리디아를 불러 작업 지시를 내리려는지 훌훌 날아오른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어두워져 있다.
저택의 진입로부터 이쪽까지 수은등이 켜져 있는데 제법 고즈넉한 기분이 든다.
‘게리 론슨이라고……? 재무부가 아니라 CIA이구만.’
국안부 제3국 자료에 언급되어 있는 인물이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비밀 첩보요원이 아니기에 신원이 드러난 듯싶다.
‘근데 이자가 왜 노천금광에 관심을 갖지?’
정말 재무부 관리라면 이해가 된다.
하루라도 빨리 포트녹스에서 사라진 8,350톤의 금괴와 FRB 지하에 보관하고 있던 8,000톤의 금괴를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금괴를 도난당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미국의 신인도는 폭락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달러화 역시 기축 화폐로서의 자리를 잃을 확률이 매우 높다.
잃어버린 8,350톤의 황금은 약 4,676억 달러의 가치가 있다. 며칠 새 가격이 올라 100톤당 56억 달러가 된 때문이다. 한화로 환산하면 무려 561조 1,200억 원이나 된다.
제아무리 천조국 소리를 듣는 미국 정부라 할지라도 휘청거릴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따라서 도난 사실은 극비에 붙이고, 얼른 채워 넣으려 노력할 것이다.
연방준비은행 FRB도 마찬가지이다.
잃어버린 금괴 중 상당 부분은 보관료를 받고 맡아준 것이다. 8,000톤에 달하는 금괴는 4,480억 달러의 가치이다.
한화로 환산하면 537조 6,000억 원이다.
이들 둘을 합치면 무려 9,159억 달러, 1,098조 7,200억 원이나 된다.
미국 정부와 FRB는 금괴 도난 사실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동병상련이 된 둘은 달러화를 무제한 찍어내서라도 이를 메우려 할 것이다. 물론 새로 찍어낸다는 것은 비밀이다.
어쨌거나 게리 론슨은 재무부 직원이 아니다. CIA에서 본인을 찾아왔다면 뭔가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알 수 없다.
‘확 마법을 써서 세뇌시켜 버릴까? 아냐, 일단은 올웨이즈 텔 더 트루스 마법으로 뭘 알고 싶어 왔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저택을 한 바퀴 돌았다. 시간을 끌기 위해 일부러 한 일이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손님은 어디 계시죠?”
“저쪽입니다, 주인님!”
피터스 가가바가 손짓한 곳을 보니 흰색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집주인이 왔다니 예의상 일어나는 모양이다.
“김현수입니다.”
“반갑습니다. 재무부 차관보 게리 론슨입니다.”
천연덕스럽게 재무부 로고인 수평저울과 열쇠가 찍힌 명함을 건넨다. 수평 저울은 정의, 공정, 공평을 뜻하고 열쇠는 직권을 뜻한다.
이곳에선 국내외 재정 정책의 수립을 건의하고, 조세 정책을 세우며 각종 세금을 징수하고, 화폐 및 국채의 발행과 관리를 담당하며, 국립은행을 감독한다.
하여 미국의 기업인들은 재무부 관리들과의 접촉을 꺼린다. 한국식으로 치면 거의 저승사자를 만나는 기분이 들어서일 것이다.
“차는 대접 받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