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6
“그럼요! 주스를 줬는데 아주 맛이 있더군요. 향도 일품이었습니다. 근데 대체 뭐로 만든 주스인가요?”
게리 론슨은 실제로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방금 말한 대로 정말 끝내주는 주스였던 때문이다.
좋다는 걸 많이 접해보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주스 사업을 하면 대박 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좋았다.
‘쩝! 쉐리엔 열매를 착즙한 것을 준 모양이군.’
“뭘 드셨는지 제가 모르니 나중에 물어보죠. 그나저나 제게 무슨 용무가 있어서 찾아오셨는지요?”
“용무요? 아! 먼저 우리 미국에 투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이실리프 트레이딩에서 주식을 사고팔면서 생긴 수익 중 일부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다.
“그거 그렇게 되나요? 저는 미국 증시에 관심이 있어서 그리한 겁니다.”
“그럼, 투자 액수를 더 늘려주실 거죠?”
현수가 쉐리엔과 항온의류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음을 알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럴 겁니다. 더 많은 이익이 발생할 테니까요.”
“그렇겠지요. 그나저나 저는 금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금이요? 재무부에서 금이 필요한 건가요?”
뻔히 알면서 묻는 질문이다. 이를 모르니 게리 론슨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이곳 이실리프 자치령에 노천금광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말을 마친 게리 론슨은 현수와 시선을 마주친다. 진실을 말하라는 표정이다. 이에 넘어갈 현수가 아니다.
하여 표정 변화 거의 없이 대꾸했다.
“있죠! 금도 제법 많아서 쏠쏠한 재미를 보는 중입니다. 설마 게서 나온 금을 처분하여 이실리프 트레이딩 사업비로 충당하라는 말씀을 하러 오신 건 아니죠?”
“그, 그럼요! 하하,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게리 론슨은 속내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나 눈빛은 변하지 않고 있다.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음성이 이어진다.
“혹시 미국에서도 제 금을 사시려는 겁니까? 그렇다면 기꺼이 그럴 용의가 있습니다.”
“그래요? 품질만 좋으면… 사죠! 근데 얼마나 있습니까?”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겉보기엔 평범한 상담 같지만 서로 속마음을 알아보려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물론 둘 다 웃는 낯이다.
“많이 필요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걸 다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천금광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지나가는 말처럼 한 이야기이지만 눈빛이 조금 더 초롱초롱해진 것이 그 증거이다.
“이실리프 자치령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노천인지라 입지는 밝힐 수 없구요. 아시다시피 먼저 줍는 게 임자인 게 금 아닙니까?”
이실리프 자치령은 아직 펜스 설치가 되어 있지 않다.
노천금광의 위치가 소문나면 누군가의 침입이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막대한 손실이 우려된다는 뜻이다.
“흐음! 노천이라… 품질이 아주 좋은 모양입니다.”
11장 금광 만드는 법
흔히들 노다지라 불리는 금맥은 번쩍이는 금줄기가 아니라 금이 포함된 금광석 부위를 뜻한다.
그런데 돋보기를 들이대도 금가루가 잘 보이지 않는다.
과거엔 원석 1톤에 13g 정도 있어야 경제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지만 요즘엔 5g만 있어도 채광한다.
기술이 좋아진 결과이다. 다시 말해 지질학, 광물학, 자원 공학, 컴퓨터 공학이 발달되어 가능해진 일이다.
대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금괴가 만들어진다.
굴착 → 측량 → 금맥 발견 → 발파 →
채광 → 금광석 운반 → 선광 → 제련
이 중 선광(選鑛)이란 캐낸 금광석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잡석을 골라내는 과정이다. 이런 선광 공정을 거쳐 나온 것을 정광(精鑛)이라고 한다.
정광은 금, 은 등을 포함한 금속 가루이다. 이걸 제련하여 금괴, 은괴 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노천금광이란 굴을 파고 들어가면서 금맥을 찾는 게 아니라 땅거죽 근처에 금맥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하여 무한정 줍다시피 하는 것은 아니다.
지표에 드러났거나 아주 가깝게 있는 것을 모두 걷어내면 결국 금맥을 따라 굴착해 가면서 지하의 것들도 채굴한다.
참고로 한국의 지난 2012년 황금 생산량은 392.5㎏이다.
그런데 이실리프 자치령의 노천금광에서 생산한 금은 벌써 1,000톤 이상 채굴되어 해외로 팔려 나갔다.
짧은 기간 동안 캐냈다 하기엔 그 양이 너무 많다.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하여 첩보원을 파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인공위성까지 동원하여 이실리프 자치령을 그야말로 샅샅이 뒤졌다. 이때 사용한 인공위성의 해상도는 0.5m짜리였다. 크기가 50㎝가 넘으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몇날 며칠 동안 요원들을 총동원하여 두 곳의 자치령을 샅샅이 뒤지고 또 뒤졌다.
그런데 너무 넓다. 그리고 두 곳 다 도로조차 없는 곳이 거의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기준이 될 만한 랜드마크가 전혀 없다.
정글이 우거진 곳이 너무 많아 여기가 거기 같고, 아까 본 것이 지금 보는 곳과 거의 같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여 두 눈 부릅뜨고 살펴봤지만 성과는 없었다. 각종 동물의 짝짓기 장면만 수없이 목격했을 뿐이다.
이렇게 찾다 찾다 찾을 수 없자 직접 온 것이다.
대놓고 CIA 요원이니 노천금광을 보여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 봤자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접견조차 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어떤 신분으로 접근할까 고민할 때 재무부 차관을 만났다. 아버지의 동생이다. 다시 말해 작은아버지이다.
재무부는 현재 비상령이 선포되어 있다. 대량의 황금을 긴급하게 채워 넣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FRB에 있는 것 중 일부는 미국 정부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보관 책임은 연방준비은행에 있다.
다시 말해 FRB가 책임지고 채워놓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 포트녹스에서 분실한 것은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책임이다. 이것 전부가 도난 내지 분실된 것을 야당이 알면 난리가 벌어질 일이다.
즉각 청문회가 열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관리가 자리를 잃을 뿐만 아니라 정권 자체가 위험해진다.
손실액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하여 재무부 차관보라는 가짜 신분을 만들어 온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노천금광이니 아무래도 그렇죠. 그나저나 얼마나 필요한 겁니까? 재무부에서 오셨으니 아무래도 양이 많겠죠?”
“……!”
별 뜻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왠지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어 게리 론슨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한국에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다는 걸 압니다. 얼마나 많이 생산되는지 알 수 없지만 제련된 양 전부를 매입하겠소.”
가에탄 카구지가 말하길 상당히 싸가지가 없다고 했는데 그 기질을 드러내려는 듯 어투가 살짝 바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모르는 척하고 넘어간다.
“네에? 정말요……? 금괴의 양이 상당히 많은데 정말 다 살 겁니까?”
현수는 짐짓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양이 얼마가 되었든 다 사겠소.”
2011년 4월 기준 국가별 금 매장량을 보면 호주가 1위이다. 7,300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위는 남아공 6,000톤, 3위 러시아 5,000톤, 4위 칠레 3,400톤, ……10위 우즈베키스탄 1,700톤이다.
10위까지 살펴봐도 콩고민주공화국은 없다.
그런데 미국이 필요로 하는 금의 최소량은 8,000톤이다.
현재는 포트녹스에 있던 금이 분실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적다. 보안만 유지하면 분실 내지 도난 사실을 감출 수 있다. 관계자 외 접근 금지 구역이기 때문이고, 미국 정부가 그 금을 사용할 일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채워놓아야 한다. 금이 없다는 게 드러나면 자칫 국가 신인도가 폭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장량 1위인 호주의 모든 금을 캐도 필요량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에 얼마가 있든 다 사겠다고 말한 것이다.
“있는 거 다 사신다니 좋군요. 저도 마침 돈이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언제 가져가실 겁니까? 인도 장소는 어디구요?”
“가급적 빨랐으면 좋겠소. 그리고 우리가 직접 가져갈 겁니다. 인도 장소는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노천금광 제련소였으면 좋겠소.”
“……!”
결국 노천금광을 보고 싶다는 뜻이다. 하여 현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없는 금광을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어야 하나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있소?”
“…확인해 봐야겠지만 일단 2,000톤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헉!”
게리 론슨은 화들짝 놀란다. 상상 이상이었던 때문이다. 이때 현수의 놀라운 말이 이어진다.
“한 두세 달쯤 시간을 주시면 그 정도를 더 매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헉! 두세 달 만에 추가로 2,000톤이나 생산 가능하다는 말씀이시오?”
게리 론슨은 정말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다.
“근데 값은 어떻게……? 요즘 금 시세가 100톤당 한 56억 달러 정도 하죠? 한 며칠 시세가 얼만지 확인을 안 해봐서 모르겠네요. 얼마나 됩니까?”
요즘 금 시세는 날마다 오르는 중이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지나가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중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말한 시세는 며칠 전의 것이다. 오늘의 종가는 이보다 3% 정도 오른 57억 6,800만 달러이다.
게리 론슨은 이를 알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렇소.”
“요즘 값이 계속 오르고 있었는데…….”
현수가 짐짓 흥정을 시작해 보자는 표정을 짓자 게리 론슨은 바싹 다가앉는다. 금괴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이 되기 때문이다.
“57억 달러면 어떻소?”
“57억이요? 금방 58억 달러까지 오를 거 같은데요. 어쩌면 59억 달러가 될지도 모르구요. 요즘 오르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우리가 사려는 건 양이 많으니까 조금 할인된 값에 주면…….”
“에구, 잘 아시면서 그런다! 금은 그 자체가 돈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많이 산다고 할인해 주고 그러는 거 아니지요.”
“그야, 그렇지만…….”
뭐라 대꾸해야 할지 옹색해진 게리 론슨은 말끝을 흐린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말을 잇는다.
“선금! 맞아요! 나머지 2,000톤에 대한 대금도 선금으로 줄 수 있습니다.”
게리 론슨의 어투가 살짝 바뀐다. 갑을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 때문일 것이다.
“몇 달 후면 금값이 더 오를 텐데 선금이 무슨 소용 있어요?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안 그래요?”
현수의 말이 또 옳다.
금값은 나날이 오른다. 몇 달 사이에 10%라도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시중은행 금리는 1년에 불과 2% 수준이다.
이자세를 떼고 나면 1%대가 되고, 이마저도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아예 제로 금리. 그러니까 은행에 예금을 해도 이자가 한 푼도 붙지 않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의 가격으로 선금을 받는 것은 오히려 손해일 수 있다.
“우리와 거래하면 여러모로 편하실 겁니다. 이실리프 자치령을 여러 군데에 만드는 데 필요한 게 많지 않을까요?”
“많기야 하지만 거의 전부 한국에서 들여올 건데요?”
“그래도…….”
진짜 할 말이 없는지 게리 론슨은 한참을 머뭇거린다. 명색이 CIA 비밀요원이면서 특별요원이다.
비밀요원은 신분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고, 특별요원은 재량권이 제법 크다는 뜻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1,000만 달러까지는 사전 승인 없이도 지출을 결의할 수 있다.
군부에 협조를 요청하면 잠수함이나 수송기를 얼마든지 쓸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지금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다.
이쯤 되면 조금은 풀어주는 것이 낫다.
‘그나저나 노천금광은 왜 보자고 하는 거지? 냄새를 맡은 건가? 이쯤 해서 속내를 한번 알아봐?’
생각을 정리한 현수는 주스 잔을 들어 올려 달싹이는 입술을 가린다. 이때 시선은 게리 론슨에 닿아 있다. 대인 마법을 시전하려는 것이다.
“올웨이즈 텔 더 트루스!”
샤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자 게리 론슨의 눈빛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