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3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엘리디아는 가장 먼저 호명받은 것이 기쁘다는 듯 나직이 포효했다.
물론 현수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이다.
순식간에 수백 가닥으로 몸을 나눈 엘리디아는 중인들의 몸을 그대로 훑고 지났다.
다음 순간 모두가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흠뻑 젖어버렸다. 사전에 이렇게 하도록 지시를 내린 결과이다.
어쨌거나 장내의 모든 사람은 생수로 목욕을 한 것처럼 깨끗해졌다. 그 순간 모두의 눈에 경애의 빛이 흐른다. 정말 물의 최상급 정령을 부린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이다.
이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다시 달싹인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라디아는 여기 있는 모든 이의 옷을 말려주도록 하라.”
휘이이이이잉-!
고요하던 공기가 요동치는가 싶더니 사람들의 옷이 펄럭이기 시작한다. 실라디아의 머리카락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난 때문이다.
“으아! 내 옷이 순식간에 다 말랐어.”
“허억! 그러게. 방금 전까지 물이 뚝뚝 흘렀는데.”
“바, 바람의 최상급 정령님이 말려주신 거야.”
“우와! 진짜…….”
사람들 모두 놀란 표정이다. 대부분 정령의 능력을 처음 체감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입술이 파랗게 변한 사람들도 있다. 너무 서늘한 바람이 불어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진 때문이다.
이 역시 사전에 협의된 결과이다.
“으으! 근데 너무 추워.”
“으드드드! 나도 너무 추워. 으드드드!”
“어머! 입술이 왜 파래요?”
의료계에선 이걸 청색증(Cyanosis)이라 한다.
피부나 점막이 푸른색을 띠는 증상으로 심폐질환에서 볼 수 있는 증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는 산소와 결합하지 않은 환원 헤모글로빈의 양이 혈액 100ml당 5g 이상으로 늘어날 때 생긴다.
이것의 원인은 크게 중심성과 말초성으로 나뉜다.
중심성은 동맥혈의 산소 포화도가 낮아져 일어나며, 심장이나 호흡기질환에서 자주 나타난다.
호흡기질환으로는 폐의 가스를 바꾸지 못하여 생기는 폐결핵, 폐렴, 폐기종, 기흉, 흉막염 등이 있다.
말초성은 말초동맥과 정맥이 순환하지 못할 때 생긴다.
말초 혈류가 막히거나 가득 차서 생기는 심부전의 경우나 국소 정맥을 누를 때 나타난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도 추운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거나 정신적으로 심하게 긴장하면 생길 수 있다.
현수는 추위에 떨고 있는 많은 사람을 보곤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불의 최상급 정령 이그드리아는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온기를 베풀도록 하라.”
후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을 향해 따뜻한 기운이 뿜어져 가자 파랗던 입술이 이내 빨간색으로 되돌아온다.
“아! 따뜻해. 부, 불의 최상급 정령님의 기운이야.”
“아아! 너무 따뜻해.”
또 한 번 웅성거릴 때 현수의 입술이 다시 달싹인다.
“땅의 최상급 정령 노에디아는 바닥을 편평히 하며, 흙속의 돌로 위를 포장토록 하라.”
그그그그그그그긍-!
“헉! 이, 이건…….”
“우와! 바닥이 움직여.”
“으앗! 흐, 흙은 내려가고 돌이 올라온다.”
사람들이 서 있는 상태에서 바닥이 바뀐다.
울퉁불퉁하던 표면이 편평해짐과 동시에 흙속의 자갈 등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놀라서 웅성거릴 때 모든 일이 마쳐졌다.
이때 현수의 마나 실린 음성이 다시 울려 퍼진다.
“오늘 나는 우리가 함께했던 이곳을 이실리프 광장이라 이름 붙인다. 이제 파이렛 군도라는 명칭은 없으며 59개의 섬을 일컬어 이실리프 군도라 이름 한다.”
“……!”
“아울러! 이제 이 땅은 이실리프 왕국의 영토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이실리프 왕국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위대하신 국왕 폐하 만세! 만세! 만세!”
“와아아아아아아아!”
모두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터뜨린다.
현수는 잠시 이들의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환호성이 잦아들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실리프 왕국엔 귀족과 평민 같은 계급은 없다.”
이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귀족은 로드젠 준남작뿐이다. 그나마 단승이라 자식이 있어도 작위를 물려줄 수 없다.
그렇기에 귀족이 없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뜬다.
“……!”
대신 입은 닫고, 귀는 활짝 열었다. 이제부터 들리는 말을 단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 왕국은 내가 임명하는 관리들에 의해 다스려질 것이며 모두의 신분은 평등하다. 다만 해적들은 짐의 윤허가 있을 때까지 노예의 신분이 유지된다.”
잠시 말을 끓었지만 아무도 뭐라 입을 열지 않는다. 이것으로 끝날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가 유지되려면 체계화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내가 임명하는 관리의 말에 절대 복종하되 불합리하다 판단되는 것은 언제든 내게 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
아르센의 다른 국가들은 국왕이 귀족을 임명하면 그는 평민을 다스리고, 노예들을 부린다.
상부에서 잘못된 지시를 내려도 이를 시정할 방법이 없다. 불편부당한 일이 자행되어도 그대로 당해야만 한다.
많은 국가에선 사문화되었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실행되는 초야권 같은 것이 그러하다.
초야권이란 결혼 첫날밤에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동침하는 권리이다. 주로 영주가 이 권리를 행사하며 드물게 신전 사제가 행하기도 한다.
이걸 피하려면 제법 액수가 큰 결혼세를 내야 한다.
아무튼 이런 불합리한 일이 시정될 길을 터준다니 획기적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여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어찌 이 뜻을 못 알아차리겠는가!
“이곳 이실리프 광장엔 고루(鼓樓)가 생길 것이다. 누구든 억울한 일을 당하거든 와서 그것을 쳐라. 이 북의 명칭은 신문고라 하겠다. 아울러 하소연을 들어줄 전담 부서를 만들어줄 것이며 내가 친히 그것들을 챙길 것이다.”
“……!”
모두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종을 치는 장면을 상상하는 듯하다. 이때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짐은 이실리프 왕국의 초대 총리로 마법사 하리먼을 임명한다. 하리먼은 앞으로!”
“네, 폐하!”
하리먼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는다.
현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아공간 오픈! 아리아니, 나의 검을 다오!”
“네! 주인님.”
어깨 위에서 여태까지의 상황을 지켜보던 아리아니는 이제야 할 일이 생겨 기쁘다는 듯 환히 웃고는 현수가 애검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데이오의 징벌’을 꺼내주었다.
이름 모를 어떤 드워프가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든 이것은 통짜 오리하르콘이다.
가장 강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것의 폼멜 아래엔 Deio's Punishment라 파여 있다. 참고로 데이오는 대지를 관장하는 가이아 여신의 짝인 ‘전쟁의 신’이다.
처음 이것을 보았을 때 폼멜에 푸른색 초특급 마나석이 박혀 있었고, 라이트닝 마법이 인챈트되어 있었다.
현수는 이것을 손봐 놨다.
명색이 위저드 로드가 쓰는 검이다. 어찌 라이트닝 마법 같은 하위마법에 어찌 만족하겠는가!
하여 기존에 새겨진 마법진을 지우고 새롭게 9서클 궁극마법인 라이트닝 퍼니쉬먼트를 인챈트시켰다.
이 마법은 시전자 본인으로부터 5m 이상 떨어진 곳으로부터 200m 이내로 범위가 정해져 있다.
125,521㎡이니 약 0.125㎢이다. 이 면적에 떨어진 벼락의 수는 약 1,000만 개다.
1㎡당 100개 정도이니 산술적으로 따져보면 100㎠ 당 하나이다. 다시 말해 가로세로 10㎝짜리 사각형 하나에 번개 하나가 떨어진다.
적이 누가 되었든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덩치 큰 자라면 더 많은 벼락에 맞아 뒈질 것이다.
이 마법이 효과적으로 시전되도록 폼멜에 박힌 초특급 마나석 주변에 고성능 마나집적진을 그려 넣었다.
한번 시전되면 마나석이 품고 있던 모든 마나가 완전히 소진되므로 다시 충진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마나 농도에 따라 완충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를 것이다.
평범한 곳이라면 꼬박 1개월이 걸리겠지만 세계수 아래라면 이틀이면 채워진다.
이 마나석 이외에도 하나의 마나석을 더 박을 생각이다.
이건 다른 마법들이 구현되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다른 마법이란 텔레포트를 의미한다.
전능의 팔찌에 새겨진 그것처럼 검의 주인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자동으로 멀린의 레어로 가도록 한다.
도착 즉시 앱솔루트 배리어가 형성되고, 타임 딜레이에 이어, 컴플리트 힐과 리커버리 마법도 구현된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후손을 위한 조치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앱솔루트 배리어로 보호될 공간엔 적어도 몇십 년은 먹고살 수 있도록 음식물과 생필품을 가져다놓을 예정이다.
어쨌거나 단번에 수만 내지 수십만 명을 죽일 수도 있는 이 검은 아무나 쓸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대륙의 모든 왕가 및 황가는 혈통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일종의 유전자 감응진을 새겨 넣을 생각이다.
현수 본인과 유전형질이 어느 정도 이상 일치하지 않으면 설사 마법사라 할지라도 마법은 구현되지 않는다.
데이오의 징벌은 오리하르콘으로 제작된 검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세상을 살 것이다.
1,200년 가까운 세월이니 이 검에서 라이트닝 퍼니쉬먼트가 시전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아리아니로부터 데이오의 징벌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이 장면이 사람들의 눈에는 아주 신기하게 보인다.
아공간은 현수의 등 뒤에서 열렸고, 데이오의 징벌만 꺼낼 만큼 입구가 좁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커먼 아공간의 입구를 본 사람은 없다. 아울러 아리아니는 사람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마치 허공에서 검이 솟아나는 듯했다. 마치 은빛 찬란한 검이 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검은 전투의 신의 높은 이름을 딴 ‘데이오의 징벌’이란 것이다. 나는 이 검을 우리 이실리프 왕가의 징표로 삼는다.”
잠시 말을 끊은 현수는 데이오의 징벌을 번쩍 추겨들었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쏠렸는데 기다렸다는 듯 햇볕이 번쩍이는 반사광을 만들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나는 이 검으로 하리먼을 이실리프 왕국의 초대 총리에 임명한다. 하리먼! 그대는 짐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신! 하리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위대하신 국왕 폐하를 보필할 것이옵니다.”
“좋다! 그대의 충성 맹세를 짐은 받아들인다. 그대는 짐을 보필하여 우리 이실리프 왕국이 자손만대까지 번창하도록 초석을 쌓는 일을 하도록 하라.”
“감히! 국왕폐하의 어명을 받자옵니다.”
쿵-!
감격에 겨운 하리먼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이 순간 이마의 살이 터지면서 선혈이 배어나온다.
고개를 든 하리먼의 눈빛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넘치는 감격에 겨운 눈빛이다.
“힐!”
샤르릉-!
마나가 쓰며들자 흘러내리던 선혈은 이내 멈춰버린다.
“엘리디아! 닦아줘라.”
“네, 마스터!”
엘리이아가 하리먼의 얼굴을 스치자 흘러내렸던 충성의 선혈이 얼굴에서 떨어져 허공에 둥둥 떠 있다.
이런 일이 빚어지면 이렇게 하라고 사전에 지시한 결과이다.
현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라이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라이사! 깨끗한 천을 가져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