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54화 (953/1,307)

# 954

“네! 폐하!”

공손히 두 무릎을 굽혀 예를 취한 라이사는 근처에 있던 방갈로에서 작은 손수건을 들고 나왔다.

“여기 있사옵니다. 폐하!”

라이사가 다가와 공손이 그것을 건네자 현수는 허공의 선혈이 손수건에 배어들도록 했다.

2장 눈앞에 펼쳐진 기적

“하리먼! 이 피는 그대가 내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흘린 것이다. 그대 집안의 가보로 삼으라.”

하리먼은 4서클 마법사이다. 당연히 젊은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집안의 가보로 삼으라 하였다.

지금이라도 장가를 가서 자손을 보라는 뜻이다.

마법사의 전제조건은 빼어난 두뇌의 소유자여야 한다. 마나감응도는 그다음이다.

다시 말해 머리가 나쁘면 마법을 익힐 수 없다.

그리고 두뇌는 유전되는 듯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대체적으로 똑똑한 부모 밑에 영특한 자녀가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멍청한 부모 아래에서 천재가 태어날 수 있고, 영특한 부모가 바보를 낳을 수도 있다. 이는 잠재된 유전인자의 발현 또는 돌연변이 정도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하리먼은 두뇌가 개발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자손을 보지 않고 세월 따라 가버리면 국가적 손실이다. 하여 가문이란 말로 자극한 것이다.

“충-! 폐하의 고언 가슴 깊이 새겨 대대손손 이실리프 왕가에 대한 충성을 되새기는 징표로 삼겠나이다.”

국왕의 지엄한 명이 본인의 결혼이다. 이것부터 못하겠다고 하면 모양새가 빠진다. 그렇기에 하리먼은 어쩌면 귀찮을지도 모를 결혼 생활이라는 삶을 살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현수는 데이오의 징벌로 하리먼의 양어깨와 머리를 차례로 건드렸다.

“이제 그대는 이실리프 왕국의 초대 총리이다. 막중한 책무가 주어졌으니 혼신의 힘을 다해 짐을 보필하라.”

“충! 국왕 폐하의 지엄하신 명을 받자옵니다.”

“좋아, 이제 컬리 경과 로드젠 경은 앞으로 나오라.”

“네, 폐하! 컬리 대령이옵니다.”

“신, 로드젠 존엄하신 폐하의 명을 받자옵니다.”

둘이 나서서 나란히 설 때까지 사람들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막강한 권력자들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먼저, 컬리 경에게 묻겠다. 짐과 이실리프 왕국에 충성하겠는가?”

“신! 컬리, 지엄하신 국왕 폐하와 대대손손 영광 속에 있을 이실리프 왕국에 절대 충성함을 맹세하옵니다.”

쿵-!

보고 배운 게 있어서 그런지 뇌가 울리도록 이마로 바닥을 갈겨 버린다. 당연히 이마에선 붉은 선혈이 흘렀고, 엘리디아와 라이사가 또 한 번 움직였다.

컬리 역시 마법사이기에 아직 홀몸이다. 이미 50대에 접어들었지만 그 역시 결혼을 맹세해야 했다.

“컬리 경에게 내무대신의 직책을 하사한다. 이실리프 왕국 내부의 대소사를 관장하되 추호의 사욕이 개입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충-! 지엄하신 국왕 폐하의 어명을 받자옵니다. 신! 컬리, 청렴하고 공정하게 공직을 수행할 것임을 맹세드리나이다.”

“좋아! 그대를 믿겠노라.”

현수는 데이오의 징벌로 또 한 번 예식을 치렀다. 다음은 로드젠이다.

“로드젠 경! 그대에겐 이실리프 왕국 초대 군부대신의 직책을 하사한다. 짐과 이 왕국의 검과 방패가 되어 영토를 수호토록 하라.”

쿵-!

이는 이마 박는 소리이다.

“신, 로드젠! 존엄하신 국왕 폐하와 이실리프 왕국에 영세무공토록 충성할 것임을 엄숙히 맹세드리옵니다.”

“이런, 힐!”

샤르릉-!

땅바닥에 이마를 박는 순서가 바뀌어 말을 마칠 때쯤 되자 선혈이 턱까지 흘러내렸다. 엘리디아와 라이사가 또 수고하였다.

손수건에 묻은 선혈의 양이 많아 그런지 하리먼이나 컬리의 것보다 조금 더 붉다.

“그대 역시 그것을 가문의 보배로 삼으라.”

“충-! 폐하께서 하사하신 충성의 증표는 대대손손 저희 집안의 자랑이 될 것이옵니다. 또한 매일 아침 이를 보며 충성을 다짐토록 하겠나이다.”

점점 더 말이 길어지고, 수사(修辭)가 붙는다.

하리먼과 컬리, 그리고 로드젠이 물러서서 현수 전면 좌우에 시립하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다음번 호명자가 누구인가 싶은 것이다.

“다음, 라이사는 앞으로 나오라.”

“네……? 저, 저요?”

“그래! 라이사 앞으로 나오라.”

“네, 폐하!”

라이사는 자신의 이름이 불릴 것을 전혀 예상 못해 몹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현수 앞에 선다.

“라이사! 짐과 이실리프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는가?”

“소, 소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지엄하신 국왕 폐하와 이실리프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옵니다.”

“좋아! 그대에게 곧 지어질 궁내 시녀장의 직책을 하사한다.”

“네에……? 소, 소녀가 어찌 감히 그런 막중한 일을……?”

“하면, 못하겠다는 뜻인가?”

현수는 무릎 꿇고 있는 라이사를 굽어보았다. 그런데 못 볼 것이 보인다. 린넨으로 만든 옷이 약간 큰지 두 개의 수밀도가 반 이상 보이는 것이다.

하여 급히 시선을 돌리려는데 라이사가 조금 더 앞으로 엎드린다. 덕분에 아래까지 훤히 다 보고 말았다.

‘끄응, 고무줄부터 보급해야 하는 거야?’

현수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라이사의 입술이 열린다.

“아, 아니옵니다. 하, 하겠사옵니다. 한데 아무런 경험도 없는 소녀에게 어찌 그런 큰일을 맡기시려는지…….”

“그대는 능히 그 일을 해낼 만한 능력이 있어 맡긴다. 자, 허리를 세우라. 그대에게 직위를 내리겠다.”

허리를 세우면 가슴이 보이지 않기에 한 말이다.

“아, 알겠사옵니다. 폐하! 소녀, 충심을 다해 정성껏 뫼시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래! 이실리프 왕국 초대 국왕인 나 하인스 멀린 킴이 그대 라이사에게 초대 시녀장의 직위를 내리노라.”

라이사 역시 데이오의 징벌이 몸에 닿을 때마다 전율을 느끼는 듯 움찔거린다. 오리하르콘의 서늘함 때문이 아니다.

심리적 황홀감 때문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왈로드 지안 반 루이체는 라이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라이사에게 한눈에 반한 것이다.

모든 예식이 끝나고 라이사가 물러나자 하리먼과 컬리, 그리고 로드젠은 정중히 맞이하며 자리를 비워준다.

아까까지만 해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여인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이실리프 왕국이 탄생하였다. 원래는 왕궁을 지어놓고 왕국 선포를 했어야 마땅하나 이 자리를 빌었다. 방금 보았듯이 이실리프 왕국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였다. 하나 나아갈수록 창대해질 것인즉 모두 노고를 아끼지 말라.”

현수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무릎을 꿇는다.

“충-! 국왕 폐하의 말씀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왕국 건설에 앞장서겠나이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맹세한다. 짐은 국왕으로서 굶주림 없는 왕국을 만들 것이다. 또한 아픈 자는 고쳐줄 것이다. 너희 중 질병이 있는 자 앞으로 나서라.”

현수의 말이 떨어지자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우르르 몰려나온다. 해적들 밑에서 노예처럼 살았다.

인권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치도 않는 세월이었다. 먹는 건 시원치 않은데 매일매일 중노동을 해야 했다.

어찌 멀쩡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 이곳에 처음 온 이들을 뺀 나머지 중 90% 이상이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기에 앞으로 나온다.

잠시 지켜보던 현수가 다시 입을 연다.

“자기 몸에 조그마한 이상이라도 있으면 나서라. 다시는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힘들 것이다.”

현수의 말이 떨어지자 또 한 무리가 튀어나온다. 파이렛 군도에 있던 사람 중 97%쯤 된다.

심지어 내무내신 컬리와 군부대신 로드젠도 끼어 있다.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라이사 역시 대열에 끼어든다.

성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뜻이다.

컬리는 비타민C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Scurvy)에 걸려 있었다. 하여 잇몸에서 피가 나고, 잇몸이 물러지면서 치아가 흔들거리는 증상을 겪고 있다.

로드젠은 심한 각기병을 앓고 있다. 팔다리에 신경염이 생겨 통증이 심했고. 퉁퉁 붓는 부종이 나타나는 상황이다.

더 진행되면 신경조직, 특히 팔과 다리의 신경이 약해지고 근육이 허약해지며, 심장병이나 경련이 나타나게 된다.

라이사의 경우는 빼어난 미모 때문에 여러 해적로부터 시달림을 당해 임질(Gonococcal infection)을 앓고 있다.

자궁경부에 염증이 있고 소변을 볼 때마다 통증을 겪는다.

이들 셋이 이러하니 다른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세실리아를 따라온 사람들은 이미 아르센 대륙에 있는 동안 현수의 고침을 받았기에 아무도 나서지 않고 보고만 있다.

현수는 내심 측은한 마음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마나 실린 음성을 뿜어낸다.

“증세 심한 자부터 앞에 서라.”

말 떨어지기 무섭게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대열이 변한다.

가장 앞에 선 자를 보니 다리가 썩어문드러진 듯하다.

칭칭 감아놓은 더러운 헝겊은 고름과 선혈로 오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 엘리디아에 의한 물세례를 받았음에도 얼룩진 것은 보니 증상이 심하다.

그의 곁에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노인이 서 있다.

눈알이 빠지면서 곪았는지 뺨으로 누런 고름이 흘러나와 있다. 이 밖에 절름발이, 귀머거리, 맹인 등이 있다.

현수는 한쪽에 시립해 있던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엘리디아!”

“네, 마스터!”

“여기 있는 모든 이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라.”

“네, 마스터!”

샤라라라라라랑-!

사전에 약속된 대로 엘리디아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일부러 소리를 낸다. 아무튼 엘리디아의 길다란 동체가 스치고 지나자 누런 고름이 흘러내리던 다리는 모든 상처가 아물어 버린다.

이 순간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멀린의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마법이 가장 효율적으로 시전되도록 돕는 매개체이다.

현수는 두 팔을 벌려 들고는 나직이 읊조렸다.

“마나여,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다오. 매스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엘리디아는 상처를 치유시키는 능력은 있지만 잘못된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힘은 약하다.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마법을 구현시킨 것이다.

엘리디아가 스쳐 지나고 마나가 스며들자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우와! 보인다. 보여! 내가 보인다고…….”

“나, 날 봐! 이제 지팡이가 없어도 돼! 아아, 내 다리가 다 나았어. 만세, 만세!”

“허억!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제 고름이 안 나와. 다 나았어, 내 아픈 팔이 다 나았어.”

“이, 이보게. 내 등 좀 봐주게. 등창, 등창이 어떻게 되었나? 아직도 있어? 응? 아직도 있냐고.”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온다. 물론 모두가 제 병이 다 나았음을 떠드는 것이다.

곁에서 이들을 지켜보던 이들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치유되는 기적의 현장을 보고 있었던 때문이다.

맹인은 눈을 떴고, 절름발이는 지팡이를 버렸다.

다 썩어가던 상처가 사라짐은 물론이고, 흉터는 원래의 피부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건 한국의 사이비 목사들이 보여주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다. 목사 본인이 힘주어 밀면서 성령의 힘에 의해 쓰러진다고 사기 치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환호성을 울릴 때 현수는 하리먼과 대화 중이다.

“총리! 식량은 어떠한가?”

현수의 말은 국왕다운 엄숙한 어투였다. 이에 하리먼은 즉각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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