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7
현수는 스트마르크 백작성에 있을 때 주었던 메모를 꺼내 읽었다.
“홀로렌 영지? 영주가 백작이라고?”
아드리안 왕국의 변경백 중 하나인데 성정이 무척 급하고, 다혈질이라 쉽게 화를 내지만 냉정할 땐 상당히 냉정하여 뱀처럼 차갑다는 평을 듣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며, 휘하에 마법사 24명과 기사 120명, 병사 24,000명이 있다.
미판테 왕국의 변경백인 스트마르크 백작군 또한 강하기에 많은 군사가 집결되어 있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다프네가 팔려가면서 흔적을 남겼더라도 이미 시일이 많이 흐른 상태이다. 따라서 숲을 뒤지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곧장 날아올랐다.
“플라이!”
현수는 하늘에 올라 방향을 잡고는 곧장 홀로렌 영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성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주성이 지어져 있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 1시간이면 틴포스 마을이라 이름 붙은 성채에 도달할 거리이다.
아르센의 여느 성채와 다름없이 석재로 지어진 성은 겉보기에 우중충하다. 하지만 규모는 제법 크다.
테세린의 영주성보다 훨씬 크다.
“흐음! 영주의 별명이 콜드 스네이크라……. 세간의 평과 같은지 한번 볼까?”
현수는 C급 용병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이런 차림으로 가면 매번 문제가 생겼다.
하여 마법사의 로브로 갈아입었다.
멀린이 남겨준 것 중 하나로 청결마법이 인챈트되어 있어 늘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스태프도 가져가야 그럴듯하겠지?”
아공간에 있던 것 중 쓸 만해 보이는 것을 꺼내 들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타인과 말 섞는 것조차 싫어한다.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는데 말 시키면 귀찮기 때문이다. 하여 늘 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래서 현수 역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썼다.
영주성으로 다가가니 위병이 들고 있던 할버드로 앞길을 막는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함부로 대하진 않는다.
로브를 걸쳤다 함은 마법사라는 뜻이다. 잘못 건드리면 작살남을 알기에 정중한 음성으로 묻는다.
“마법사님! 이곳은 홀로렌 백작님께서 계시는 영주성입니다. 본 성에 용무가 있어 오신 겁니까?”
“그러하다. 안에 전갈해 주겠는가?”
“…알겠습니다. 그러하시다면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 신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아울러 어느 분을 만나러 오셨는지도 알려주십시오.”
마법사가 일개 병사를 만나러 왔을 리 만무하기에 병사의 어투는 정중했다.
“나는 이실리프 마탑에서 왔다. 그리고 내가 만나려는 사람은 이 성의 주인이다.”
“네에……? 바, 방금 이, 이실리프 마탑이라 하, 하셨습니까? 맞아요?”
이실리프 마탑은 아드리안 왕국에 닥쳤던 삼국연합의 공격을 말끔하게 밀어낸 은인과도 같은 곳이다.
게다가 마탑주는 국왕과 동급이다. 그렇기에 병사의 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실리프라는 이름에 압도당한 때문이다.
“그래! 이실리프 맞다. 가서 전하도록!”
현수는 부러 위압적인 어투로 대꾸했다. 이에 놀란 위병은 신분 확인 절차를 깜박한 듯하다.
“자, 잠깐만요. 진짜 잠깐만요.”
다다다다다다다-!
위병은 꽁지 빠진 수탉처럼 안쪽으로 달려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뒤쪽 초소에 가면 위병조장이 졸고 있을 것이다.
원칙은 그에게 먼저 보고하고 지시에 따라 안쪽에 전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실리프라는 네 글자가 혼을 빼버렸기에 이런 걸 모두 잊고 무작정 달려간 것이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현수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러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쿠울-! 쿠우울-! 드르렁! 드르르르렁-! 퓨우우!
초소 안쪽을 보니 벤치 같은 의자 위에 누워 잠든 기사가 보인다. 다리는 창턱에 걸쳐져 있다.
폼을 보니 자세가 딱 나온다. 상습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놈은 교육이 필요하다. 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누가 보고 있는 걸 눈치라도 했는지 코골기를 멈춘다. 그리곤 눈도 뜨지 않은 채 고함을 질렀다.
“야! 밀튼. 물 좀 떠와.”
밀튼은 조금 전에 안쪽으로 뛰어간 병사의 이름인 듯싶다.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러자 또 소리친다.
“밀튼! 물 떠오라는 소리 안 들려? 나, 목말라.”
눈도 뜨지 않고 소리만 지르더니 아무런 반응도 없자 벌떡 일어난다. 그리곤 냅다 고함을 지르려다 현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짜증난다는 표정이다.
“뭐야? 넌! 뭐하는 놈인데 여기 들어와 있는 거야? 엉?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왔어? 썩 나가! 밀튼! 밀튼!”
밀튼이 밖에 있는 줄 알고 소리를 치지만 없는 사람이 어찌 대꾸하겠는가! 그런데 그 음성이 별로 듣기 좋지 않다.
“밀튼은 없네.”
“뭐? 없네? 이, 자식이 지금 누구에게……. 야! 너 뭐하는 놈이야? 그리고 여기 왜 있어? 나가란 소리 못 들었어? 밀튼! 밀튼! 내 이놈의 자식을……!”
불러도 대꾸가 없자 기사는 벽에 기대놓은 검을 집어 든다. 그걸로 두들겨 패려는 모양이다.
“밀튼 없다니까.”
“뭐야? 이건? 왜 내 말에 끼어들어? 뒈지고 싶어? 날 봐. 내가 누구로 보여? 엉? 어서 대답 못해?”
그러고 보니 술 냄새가 난다. 근무 전에 한잔하고 와서 여태 잠만 자다 갈증 때문에 깬 듯싶다.
“내 눈엔 근무태만인 기사로 보이는데 이래도 되나?”
“뭐? 근무태만? 이 자식이 지금 누굴 뭘로 보고. 야! 내가 근무태만 하는 거 본 적 있어? 엉?”
눈을 부라리며 대드는데 성깔 있어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그 성깔로 자기보다 아랫사람들을 괴롭히곤 한다.
“근무시간에 잠을 잤으면 태만한 거 아닌가?”
“뭐? 너, 내가 자는 거 봤어? 봤냐구?”
“봤지. 조금 전에!”
“이, 이런… 씨브날탕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래도 기사라는 듯 소리친다.
“너! 검 없어? 뽑아! 어서 뽑으란 말이야.”
“보다시피 난 검이 없어. 그런데 방금 한 말은 우리 둘이 한바탕해 보자는 말이지?”
“뭐야? 이건! 오호라, 그러고 보니 로브를 걸쳤네. 그럼 마법사야? 흐음, 보아하니 이제 겨우 1서클인 것 같은데 그걸로 나하고 한번 해보자고?”
기사의 눈에도 현수는 스물다섯 살 애송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 나이엔 진짜 천재가 아닌 이상 1서클이 고작이다.
그래서 그런지 호기충천이다.
“좋아. 넌 마법! 난, 검! 한판 붙어보자고. 근데 여긴 좁으니 밖으로 나와.”
말을 마치곤 먼저 나가 버린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현수는 아무도 없는 초소 안에 계속 있을 수도 없어 따라나섰다.
“어이! 애송이 마법사. 오늘 임자 한번 제대로 만난 거야. 나중에 아프다고 울기 없어. 알았어?”
스르르릉-!
말을 마치곤 검을 뽑아 든다. 그리곤 검끝을 까딱거리며 다시 입을 연다.
“해봐! 이 형이 아주 따끔한 맛을 보여줄 테니.”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감히 10서클 마스터이자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로 소드 익스퍼트 초급인 기사가 먼저 공격하라고 소리친다.
“나더러 먼저 공격하라고?”
“그럼 기사인 내가 먼저 하리? 하수가 먼저 공격하는 게 예의잖아. 어디서 1서클 따위가……! 잡소리 말고 덤벼!”
“허어! 나아 참……. 어이가 없네.”
“뭐야? 어이가 없어? 니 눈엔 내가 어의로 보여? 덤벼, 인마! 이제 와서 꼬리 빼는 거야? 겁먹었어? 응? 그런 거야?”
살살 상대방의 부화를 돋워놓고 달려들면 그걸 빌미로 행패를 부리는 놈 같다. 당연히 적당한 교육이 필요하다.
“좋아! 먼저 공격하라니 그러지. 나중에 두말하지 없다.”
“미친놈! 1서클 따위가 어디서 감히! 시끄럽게 주둥이 놀리지 말고 어서 시작이나 해. 그리고 반말로 지껄인 죄는 내가 아주 철저하게 교육해 주지.”
이 영지는 미판테 왕국에서도 무력으로 이름나 있는 스트마르크 영지와 접경하고 있다. 하여 마법 전력이 다른 곳에 비해 강한 편이다. 거의 전부 수도에 있는 영광의 마탑 소속이지만 일부는 아니다.
수도 멀린에 위치한 영광의 마탑엔 변화가 있었다.
모든 마법사의 로브에 스태프와 검이 교차하는 그림을 수놓은 것이 그것이다. 가슴 부위에 커다랗게 수를 놓아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는 이실리프 마탑의 문양 중 일부이다. 스스로 이실리프 마탑의 아래임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 문양이 수놓아진 로브를 걸친 마법사는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고위 귀족들도 그러하다. 이는 아드리안 공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영광의 마탑 소속 마법사들은 아르센 대륙의 어느 나라로 가든 적절한 예우를 받는다. 홀대하거나 적대하면 자칫 이실리프 마탑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장 그 국가의 멸망과 관련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가급적 마찰이 일지 않도록 알아서 기어주는 것이다.
어쨌든 현수가 위저드 로드인 것을 몰랐을 때에도 모든 국가의 국왕 또는 황제들도 예를 갖춰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마탑주일 뿐만 아니라 위저드 로드이고,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하다.
아드리안 왕국의 경우에 현수는 시조인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이다.
항렬로 따지면 현재의 국왕은 손자의 손자뻘도 안 된다.
하여 아무도 영광의 마탑 소속 마법사들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어서 공격하라는 기사의 도발적인 눈빛을 보고 피식 실소를 지었다.
“원하니 그렇게 하지. 그전에 나는 하인스라 한다. 너는……?”
“나? 나는 라이온 기사단 소속 기사 로스톤 팔머 드 홀로렌이다. 네놈을 혼내줄 이름이니 잘 기억하도록!”
“……!”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이곳은 홀로엔 영지이고, 이 녀석의 이름엔 홀로렌이란 세 글자가 들어 있다.
영주의 직계 자손 또는 방계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영주라면 근무시간에 잠 좀 자는 것 정도로는 처벌받지 않을 것이기에 이토록 뻔뻔스런 것이다.
하여 고개를 끄덕일 때 로스톤은 현수의 로브를 살핀다.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은 평범한 것이다. 영광의 마탑 소속이 아니라면 자유 마법사라는 뜻이다.
마찰이 생겨도 지원해 줄 세력 없음이다.
“자아, 통성명까지 다 했으니 이제 시작하지. 하인스라 했나? 뭐해? 어서 공격하지 않고.”
로스톤은 검을 고쳐 잡으며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문다. 너 정도는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매직 미사일!”
현수의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마법 화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서클 마법사인 경우엔 딱 하나만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되는 마법 화살을 본 로스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낯빛이 하얘진다.
“너, 너… 넌!”
“발사!”
“누구냐? 아앗! 아아아앗!”
로스톤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갑옷을 걸치곤 있지만 쇄도하는 화살들이 너무 빨랐던 때문이다.
그러면서 황급히 자리를 바꿨다. 하지만 현수가 발사시킨 건 유도기능을 가진 매직미사일이다.
로스톤이 자리를 옮기자 곡선을 그리며 따라간다.
팅, 탱, 텅, 퉁, 퍽, 퍼퍼퍽! 티티팅! 태댕탱탱!
“으아……! 아아아아! 아앗! 아악! 큭! 컥! 헉! 컥!”
수십 개의 화살이 로스톤의 갑옷을 강타했다.
판금갑옷은 강력한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맞을 때마다 찌그러진다. 머리, 어깨, 등, 가슴, 배, 팔, 다리 할 것 없이 전신 모든 곳이 찌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