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8
조금 전 헬멧의 바이저를 내리지 않았다면 얼굴에도 두 개쯤 박혔을 것이다.
화살이 격중될 때마다 로스톤은 나직한 비명을 지른다. 갑옷이 충격 대부분을 흡수했음에도 고통이 느껴진 때문이다.
현수는 팔짱을 낀 채 원맨쇼하듯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로스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술을 달싹인다. 이 정도로는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각한 것이다.
“파이어 애로우!”
말 떨어지기 무섭게 200개에 달하는 불화살이 허공에 나타난다. 정신없이 매직 미사일을 피하던 로스톤도 이것을 본 듯하다. 이 순간에도 갑옷은 곳곳이 찌르러든다.
챙! 핑! 탱! 타탕! 채쟁챙!
“아앗! 아아악! 자, 잘못했습니다. 아악! 큭! 컥! 억!”
“발사!”
쐐에에에엑! 쒸아앙! 쎄에엥!
200개의 불화살이 쇄도하자 로스톤은 휘두르건 바스타드 소드를 내던지곤 곧장 줄행랑을 놓는다.
“으아아!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으아아아아!”
이 순간 로스톤의 뇌는 백짓장처럼 텅 비어 있다.
뭔가 아주 대단히 많이 잘못되었는데 그게 무엇인지조차 가늠이 안 되는 상태인 것이다.
정신없이 발을 놀리지만 인간이 어찌 화살보다 빠르겠는가! 게다가 10서클 마스터가 작정하고 날린 것들이다.
탱! 쾅! 태태태탱! 채채채채챙! 타타타타탕!
“악! 컥! 헉! 끅! 켁! 헥! 아악! 커컥! 으으윽!”
갑옷은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을 정로도 움푹움푹 찌르러졌다. 파이어 애로우에 격중당한 곳은 그을음까지 묻어 완전 엉망진창으로 보인다.
“으으으! 자, 잘못했습니다. 으으으으!”
격렬한 고통은 지났지만 그 뒤로 느껴지는 작렬감 또한 만만치 않다. 로스톤은 쓰러진 채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신음만 토하며 엉금엉금 긴다.
기사로서의 당당함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로스톤! 자리에서 일어서라. 기사가 그래서 쓰겠어?”
“으으! 잘못했습니다. 마법사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땐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가늘고 길게 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얼른 무릎을 꿇는다. 로스톤은 영주의 둘째 아들이다. 형은 소영주로서의 교육을 받는 중이고, 동생들은 형을 도와 이 영지의 행정을 맡으려 아카데미에 가 있다.
로스톤 역시 아카데미를 다녔지만 자퇴했다. 고리타분한 교육과 엄격한 규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될 확률은 없다. 형은 같은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었다.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했는데 이는 훗날을 위한 행정학을 부전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처리도 빈틈이 없어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
동생들은 일찌감치 행정 쪽으로 방향을 틀어 착실히 준비하고 있지만 로스톤은 그럴 수 없다.
늦은 감도 있지만 성질이 급해 차분하게 앉아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가 없으면 나태해지고, 희망까지 없어지면 제멋대로 굴게 된다. 현재의 로스톤이 그러하다.
“이제 일어나야지, 로스톤!”
“으으! 으으으! 잘못했습니다. 으으으!”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겨워 입술을 깨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걸 보면 아주 못돼 먹은 놈은 아닌 듯싶다.
하여 한마디 더 하려는데 안쪽으로부터 후다닥 달려오는 무리가 보인다.
“……!”
“헉헉! 헉헉헉! 마법사님! 헉헉!”
“그래, 밀튼!”
“여, 영주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헉헉헉!”
선두에 있던 밀튼이 차오르는 숨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할 때 장년인 하나가 황급히 뛰어오더니 멈춘다.
편한 복장이긴 하나 귀족임이 분명하다.
“헉헉! 헉헉헉!”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장년인은 현수를 살펴본다.
그리곤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친다.
“위대하신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시며,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이신 위저드 로드이시자, 모든 검사의 하늘이신 그랜드 마스터님을 알현하옵니다. 충-!”
사내의 말이 끝나자 엉거주춤 일어서려던 로스톤은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 오금에서 힘이 빠지면서 균형을 잃은 탓이다.
와당탕-!
“헉! 세, 세상에…….”
자기가 누구에게 덤비라고 했는지, 왜 힘 한번 못 써보고 엄청난 고통을 당했는지를 깨닫는 순간 로스톤은 바보가 되고 말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눈과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침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현수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장년인에 이어 로스톤과 비슷하게 생긴 청년 또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4장 노예 상인들의 수난
“소, 소인 해럴드 팔머 드 홀로렌이 감히 검의 하늘을 알현하옵니다. 충-!”
정중히 군례를 올린 해럴드는 그랜드 마스터인 현수를 자신의 하늘로 삼은 바 있다.
살아생전에 볼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너무도 위대하여 신과 동급이라 여긴 탓이다.
그런데 직접 대면하게 되자 심장이 터질 듯 부푸는 느낌이다. 심박수는 무한대로 늘어나고, 체온은 미친 듯이 올라가는 것 같다. 정신까지 아득해지는 느낌이었지만 해럴드는 특유의 냉정을 찾으려 애쓰며 현수의 얼굴을 살핀다.
무엄하다는 것은 알지만 영원히 뇌리에 새기기 위함이다.
같은 순간, 속속들이 당도한 기사단장 및 마법사들의 요란한 수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마법사들은 국왕보다도 우선인 위저드 로드를 향해 극경(極敬)의 말을 토해놓는다.
기사들이라 하여 다를 것은 별로 없다. 전 대륙에 오로지 하나뿐인 그랜드 마스터이다. 어찌 평범히 영접하겠는가!
한바탕 인사가 끝나자 현수의 입술이 열린다.
“영주의 성명은 무엇인가?”
“소, 소인 룬드그렌 팔머 드 홀로렌이라 하옵니다. 작위는 백작입니다. 마스터!”
“좋아! 팔머 백작. 자네 아들인 것 같은데 로스톤을 내가 데려가 훈육해도 되겠는가?”
“네……? 아, 그, 그럼요!”
잠시 둘째 아들을 바라본 팔머 백작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같은 순간 로스톤의 얼굴을 창백해진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에게 함부로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으아! 나 이제 죽었다.’
털썩-!
다시 일어서려던 로스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전히 멍한 표정이지만 낯빛은 창백하다. 겁에 질린 탓이다.
“나는 이곳에 사람을 찾으러 왔네.”
“말씀만 하십시오. 즉각 찾아 대령하겠습니다.”
이 영지에서 팔머 백작은 왕에 준하는 권력자이다. 따라서 그의 말처럼 명만 떨어지면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나서서 원하는 사람을 찾아올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 있는 표정이다.
“작년 연말쯤 미판테 왕국 스트마르크 영지에서 여자 노예를 매입한 자들이 있네.”
“여자 노예요?”
“그래! 이름은 다프네. 나이는 23세이지. 내가 찾는 사람은 다프네이네. 200골드에 거래되었고, 파미르 산을 넘어 이곳으로 왔다고 들었네.”
“네에? 200골드요?”
팔머 백작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다. 젊은 여자 노예는 상품이 30골드, 중품 20골드, 하품 10골드에 거래된다.
아르센 대륙 거의 모든 나라의 공통점이다.
그런데 상품의 7배에 가까운 가격에 거래되었다면 특상품 중에서도 최고인 듯싶다.
“저어, 실례지만 다프네라는 여노는 왜 찾으시는지요?”
마탑주가 한가하게 여자 노예나 찾으러 다니진 않을 것이기에 물은 것이다.
“내 아내가 될 여인이네. 그리고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의 딸이기도 하지.”
“네? 네에……? 뭐라고요? 헉!”
팔머 백작의 두 눈알이 튀어나오려 한다. 너무도 놀라 더 이상 클 수 없을 정도로 부릅뜬 때문이다.
마탑주의 아내는 아드리안 왕국의 왕비와 버금갈 위치이다.
이런 여인이 노예로 팔렸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무시무시한 레드 드래곤의 딸이라니 혼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이는 비단 팔머 백작만 그런 것이 아니다. 주위에 몰려 있던 모든 이의 뇌리가 텅 비어지는 상황이다.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 확실하다 하니 서둘러 찾아봐 주게.”
“아, 알겠습니다. 해럴드! 모든 마법사와 기사들을 집합시켜 마탑주께서 말씀하신 고귀하신 분을 찾아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라이온 기사단! 타이거 기사단! 모두 영주님의 말씀 들었지? 지금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산개하여 고귀하신 분을 찾아라.”
“충! 명을 따르옵니다.”
기사들 모두 벌떡 일어나 사방으로 튀어간다. 다음 순간 해럴드의 입술이 다시 열린다.
“마법병단 소속 마법사들은 들어라! 지금 즉시 노예 상인 및 노예 사냥꾼들을 잡아서 영주성 마당에 대령토록 하라.”
“충-! 명을 받으옵니다.”
절도 있게 고개 숙인 마법사들 또한 일제히 달려간다.
어떤 미친놈들이 하늘같은 로드의 부인이 되실 분을 감히 노예로 거래했다. 당연히 다 잡아들인 뒤 엄히 처벌해야 한다.
그냥 엄한 처벌이 아니다.
반쯤, 아니, 거의 죽을 정도로 강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분노한 표정으로 달려간다.
움직이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마법사들이지만 도저히 분기를 이길 수 없었던 때문이다.
남은 건 여전히 낑낑대고 있는 로스톤과 팔머 백작뿐이다.
털썩-!
“마, 마스터께 감히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소인의 목숨을 거두소서.”
로스톤은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있다. 두 주먹은 무릎 위에 있는데 앞에는 자신의 목을 쳐달라는 뜻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얌전히 내려놓고 있다.
“……!”
“마, 마스터! 이놈이 혹시 하늘같은 마스터께 무례를 저지르기라도 해, 했습니까?”
팔머 백작은 천방지축인 로스톤이 현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기에 조심스런 표정이다.
국왕조차 예를 갖춰 맞아들여야 하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아드리안 왕국의 모든 귀족 또한 극고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
현수는 피식 웃어주었다.
“로스톤이 몸이 근질근질하다 하여 잠깐 놀았네. 몇 년 데리고 있다 보내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아……! 그렇습니까?”
백작의 얼굴이 환히 펴진다. 잘하면 작은아들이 마스터의 제자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한 것이다.
현수가 예정에도 없던 로스톤을 이실리프 왕국으로 데려가려는 이유는 에드워드 코린 반 호마린 자작의 아들 스미든과 함께 굴리려는 의도이다.
혼자보다는 둘이 굴러야 더 잘 견딜 수 있다. 서로를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전우애 비슷한 것이 샘솟을 수도 있다.
둘의 우정이 돈독해지면 더욱 좋다. 미판테 왕국과 아드리안 왕국 사이의 가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분간 죽을 고생이야 하겠지만 이실리프 왕국에서 수업받고 왔다는 것만으로도 외국 유학 가서 박사학위 따온 것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스미든과 로스톤이 나이 들면 두 나라의 제법 높은 자리를 차지할 확률이 매우 높다.
어쨌거나 팔머 백작은 현수가 작은아들을 데려간다는 말에 고무되었다. 가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마스터! 누추하지만 제 성으로 가시지요.”
“허험! 그러지.”
“로스톤! 어서 일어나 마스터를 호종하지 못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