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60화 (959/1,307)

# 960

모두 정렬하자 백작은 잡혀온 자들을 일견하고는 입을 연다.

“지금 본성에 이실리프 마탑의 위대하신 마탑주께서 왕림하여 계신다.”

“……!”

팔머 백작의 말이 떨어지자 형틀에 묶인 헤센 남작을 비롯한 모두가 놀라 고개를 든다.

이실리프 마탑주는 국왕과 동격이다. 모든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지고무상한 존재이다.

그런 사람이 와 있다는 걸 이 자리에서 밝힘은 현수가 이 일에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하는 말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이 오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너희 중 누군가 지난해 연말에 미판테 왕국 스트마르크 영지의 해밀턴이라는 노예상과 거래한 자가 있다.”

“……!”

백작의 말이 잠시 멈추는 동안 몇몇이 움찔거린다.

지난해 연말 노예상 해밀턴과 관련된 자들 모두 깜짝 놀랄 만한 거래가 있었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200골드에 거래된 여인이 있다.”

몇몇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다. 여자 노예치고는 너무 비싼 거래였다. 200골드에 사서 1,600골드에 넘겼으니 1,400골드라는 어마어마한 이문이 남는 거래였다.

팔머 백작은 잠시 말을 끓고 헤센 남작을 비롯한 그의 휘하와 노예 사냥꾼들을 노려본다.

“그분의 성명은 다프네이시다. 장차 마탑주의 부인이 되실 분이시다.”

“헉……!”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온다. 마탑주의 부인이라면 아드리안 왕국의 왕비에 버금갈 위치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어떤 노예 사냥꾼이 잡아서 팔아넘겼다. 모르고 한 일이지만 삼대가 멸족당하고도 남을 일이다.

하여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을 때 백작의 말이 이어진다.

“아울러 그분은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이시자 위대한 존재이시며, 중간계의 조율자이고 마법의 조종이신 라이세뮤리안님의 딸이라 한다.”

“허억……!”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는 성정 흉포한 레드 드래곤이다.

인간 알기를 개미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는 그런 존재의 딸을 잡아다 팔아먹었다.

이건 구족을 멸하는 정도로 다스려질 일이 아니다.

자칫 미판테 왕국과 아드리안 왕국이 아르센 대륙의 지도에서 지워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노예상과 관련된 자들뿐만 아니라 기사와 병사, 그리고 마법사들까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물러선다.

“분노하신 마탑주께서 친히 왕림해 계신다. 따라서 진실만을 토로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라도 동원할 것이다. 너희가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너희는 물론이고, 너희의 일가붙이 전부를 죽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팔머 백작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헤센 남작 등은 저항할 의지를 완전히 잃은 표정이 되었다.

고통은 당했지만 풀려나기만 하면 중앙에 선을 대어 같은 귀족을 정당한 이유 없이 핍박한 팔머 백작을 징치할 것이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탑주와 드래곤이 관련되어 있다. 중앙 아니라 중앙의 할애비라도 감히 손댈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협조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 팔머 백작이 다시 입을 연다.

“불어라! 누가 이 거래에 관련되어 있는지를……! 아울러.”

팔머 백작이 말을 이으려던 순간 헤센 남작이 먼저 입을 연다.

“제, 제가 했습니다. 제가 그분을 거래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

“지난해 연말 스트마르크 영지의 해밀턴 무리로부터 기가 막힌 물건을, 아니, 엄청나게 어여쁜 여인, 아니, 마탑주님의 부인 되실 분을 팔겠다는…….”

헤센 백작은 필사적으로 날짜와 시간, 그리고 이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라도 거짓말을 하면 지옥보다 더한 것을 경험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진실만을 말했다.

“그래서 지금 그분은 어디에 계시느냐? 설마 손을 댄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그분께 손을 대다니요. 그런 일 절대 없습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고결하셔서 감히 그런 생각조차 품지 못했습니다. 백작님!”

헤센 남작의 말은 사실이다.

5장 현수의 가짜 제자

200골드에 다프네를 샀을 때 그녀는 다소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스트마르크 영지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자루 속에 담겨왔기 때문이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상태인데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게다가 정신적 충격을 잔뜩 받아 겁먹고 있었다.

함께 거래된 다른 여인들이 해밀턴 무리에 의해 수없이 능욕되는 것을 본 때문이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다프네는 현수에게 연정을 품었다. 혼돈의 숲을 안내하는 동안 저절로 생겨난 마음이다.

내기에서 졌으니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품고 있던 연심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예상들에게 몸을 버리게 되면 곁에 있을 자격조차 잃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겁먹은 것이다.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들만 있는 마을로 보내져 살아왔기에 배운 건 없지만 순결이 무언지는 어렴풋이나마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헤센과 해밀턴의 거래는 오래되었다.

그간 신용이 있었기에 이어진 거래이다. 하여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기가 막힌 미녀라 하여 거금을 주고 구입은 했다.

거래 후 시녀들로 하여금 다프네를 목욕시켰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날 헤센은 ‘세상에 이런 미녀도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해밀턴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예뻤다면 본인이 첩으로 거두었을 것이다. 이미 열두 명의 첩이 있으니 하나쯤 늘리는 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다프네는 한낱 남작의 첩이 될 미모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여 많은 돈을 들여 가다듬었다.

좋은 의복을 입혔고, 좋은 음식을 먹였으며, 예의범절과 학문을 가르치기까지 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 20골드가 소모되었다.

그래도 아깝지 않았다. 다프네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존재였던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이 넘도록 베풀기만 하자 다프네는 경계하는 마음을 줄였다.

그래서 가끔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센은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치미는 욕정을 억누르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견뎌낼 수 있었다.

현재는 가장 낮은 작위인 남작이지만 다프네를 바쳐 중앙의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면 단숨에 자작 또는, 백작으로 승작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프네는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다. 치장하면 할수록 아름다워졌고, 학문적 성취는 나날이 깊어졌다.

교양이 쌓이면서 우아함과 고결함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가 되자 헤센 남작은 다프네를 데리고 멀린으로 향했다. 가장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찬스라 생각한 것이다.

수도에 당도한 헤센 남작은 사람들을 풀어 소문을 퍼뜨렸다. 지상 최고의 미녀가 멀린에 왔음을 알린 것이다.

예상대로 고위 귀족가로부터 연통이 왔다. 지상 최고의 미녀를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헤센 남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비싼 값에 팔려면 상대의 몸이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기막힌 미녀라는 소문만 퍼뜨렸다. 그러자 초청장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초청장이 수북하게 쌓일 때쯤 헤센은 모든 공작가와 후작가, 백작가에 경매일을 고지했다.

너무 많은 분이 찾으시는데 일일이 응대할 수 없음을 양해해 달라는 정중한 표현이 곁들어진 통지문을 보낸 것이다.

그 아래엔 경매 일시와 장소, 그리고 경매 시작가가 기록되어 있다. 대금은 당연히 현장 지불 조건임도 밝혔다.

아드리안 왕국 역사상 가장 비싼 여자 노예가 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자 소식을 들은 거의 모든 고위 귀족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치열한 호가 경쟁이 벌어졌다.

다프네의 미모가 모든 이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결국 낙찰되었다. 최종가는 1,600골드이다.

상품 여자 노예 하나의 가격이 30골드인 것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무지막지한 가격인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좋아! 다프네님을 낙찰받은 이는 누구인가?”

경매에 참가했던 사람의 최하 작위가 백작이라 하니 팔머 백작은 ‘놈’이라든가 ‘자’라는 표현을 쓰지 못한다.

“모릅니다.”

“뭐야……?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정말 모릅니다. 복면을 써서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 낙찰가를 받은 전표는 어떤 것이었는가?”

상단 간의 거래에 무거운 금화나 은화를 매번 들고 다닐 수는 없다. 하여 그들끼리만 유통되는 전표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자기앞수표 내지 어음이다.

그것엔 지불 보증한 금액과 더불어 발행일, 발행 장소, 발행인, 그리고 수취인의 성명까지 기록된다.

이것은 상인들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통되고 있다. 일반 서민과 달리 거래 단위가 크기에 매번 무거운 금화나 은화를 들고 다닐 수 없어서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르센 대륙에서도 전표에 이서하는 관습이 생겼다. 지구에서와 같이 사기꾼들이 있었던 때문이다.

이서(裏書)란 어음이나 증권 등의 뒷면에 증권에 드러난 모든 권리를 누구에게 양도한다는 뜻의 글과 함께 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받은 전표의 뒷면을 보면 최초 발행자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건넨 사람까지 기록되어 있다.

팔머 백작은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게… 낙찰가를 전표로 받은 게 아니라 전액 금화로 지급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럼 현금으로 1,600골드를 들고 다녔다는 말이냐?”

1,600골드라면 10골드짜리 160개 또는 100골드짜리 16개이다. 하나당 무게가 상당해서 들고 다니기엔 무겁다.

헤센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아공간 주머니를 사용하더군요.”

“끄응!”

팔머 백작은 나직한 신음을 토했다. 이 대목에선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럼, 그자의 얼굴을 못 보았으나 신체적 특징이라든지 체형 이런 건 기억하느냐?”

“네, 그자는 왼손 약지가 비정상적으로 짧았습니다.”

“약지가 짧아?”

“네! 새끼손가락과 거의 같았습니다. 그 외에 특징은 다소 뚱뚱하다는 것입니다. 신장은 180㎝ 정도인데 체중은 적제 잡아도 120㎏은 족히 나갈 정도입니다.”

“그 밖의 것은…?”

“온통 검은색 옷이었습니다. 마법사의 로브 비슷한 그런 건데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못 본 복식입니다. 제 생각엔 흑마법사의 로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흑마법사라고……?”

“아뇨! 꼭 흑마법사가 아니라 그럴 것 같다는 것입니다.”

“흐음! 그래? 그럼, 또 다른 특징은?”

“네, 그자는…….”

헤센 남작의 말은 이어졌다. 간간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거나 헷갈려 하는 부분은 부하들에게 물어 확인까지 시켰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개입되어 있기에 조금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까발렸다.

이렇듯 자신의 치부가 될 수 있는 부분까지 말한 이유는 괘씸죄까지 얹어지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이다.

헤센 남작의 부하들 역시 가감 없는 답변을 했다.

조금이라도 숨기는 구석이 있었다간 신의 분노와 버금갈 무시무시한 처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아! 대답 잘 들었다. 나는 이 길로 마탑주께 갈 것이다. 너희에 대한 처분은 그분께서 직접 결정하실 것이다. 그때까지 여기서 대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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