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3
“그래?”
“예! 불편하셔도 나가셔야 하옵니다.”
소피아가 공손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추곤 따라 나오라는 듯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현수는 의복을 정제하고 소피아를 따라나섰다.
“마탑주님께서 오셨다는 전갈을 듣고 곧바로 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 전하! 마땅히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오시니 송구합니다.”
“아이구, 아닙니다. 아닙니다.”
둘은 서로에게 정중한 예를 갖췄다.
“자아, 안으로 드시지요.”
“예!”
현수의 안내를 받은 국왕은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왕궁 바로 옆에 있지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기에 호기심이 인 것이다.
집무실 소파에 앉은 국왕은 그 푹신함에 눈을 크게 뜬다.
“어라……! 이건 뭐로 만든 겁니까?”
“스폰지라는 걸 넣은 건데 제 모국인 코리아 제국에서 만든 겁니다. 제가 그곳 출신이라는 건 아시지요?”
“네에,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곳의 백작이셨다고……. 어찌 된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마탑주가 고작 제국의 백작이었다는 소문에 국왕은 약간 난감했었다. 타국의 중간 정도 되는 작위를 가진 귀족과 대등한 관계로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수하들과 함께 유람삼아 바닷길을 나섰다가 큰 풍랑을 만나 아르센 대륙까지 떠밀려 왔지요.”
“아! 그러셨군요.”
“그때 수하들은 모두 죽고 저만 간신히 해변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님을 만났지요.”
“스승님이라면 저희 시조님을…….”
“네!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 그분이셨습니다.”
“아……!”
어떻게 해서 시조와 사제지간이 되었는지를 알게 된 국왕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근데 코리아 제국은 어떤 곳입니까?”
“코리아 제국은…….”
현수는 그간 뻥쳐왔던 것을 종합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서울은 본인의 영지이고 인구는 1,000만 명이 넘는 대영지라 하자 국왕은 화들짝 놀란다.
코리아 제국 전체 인구가 5,000만 명인데 그것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영지의 영주가 고작 백작이었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아드리안 왕국의 전체 인구와 엇비슷한 규모이다.
“제국엔 공작과 후작들이 몇 분이나 계셨습니까?”
“여럿 계셨지요. 하나 큰 힘은 없었습니다.”
“그렇겠지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데리고 있으니 작위가 높아봤자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작가에서 보유한 기사와 병사의 수만 해도 어마어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하다.
“백작가의 병력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현수는 내친 김에 조금 더 뻥을 쳤다. 기사와 병사들을 포함하여 60만 대군을 보유했다고 한 것이다.
“헉! 그렇게나 많았습니까? 무력이 어마어마하셨군요.”
“그렇지요. 병사들만 동원해도 드래곤 사냥이 가능했으니까요.”
“드, 드래곤을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병사들이……?”
국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지만 현수는 이에 대꾸하지 않았다.
꼭 답변을 듣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참, 우리 코리아 제국에선 신분증명서를 이렇게 만들어 줍니다.”
말을 하며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국왕은 정연한 글씨와 사진을 살피며 제국의 저력을 가늠해 보았다.
그런데 뭐로 만든 것인지 딱딱하면서도, 매끄럽고, 탄력이 있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릴 때 현수의 부언 설명이 이어진다.
“그거 재질이 드래곤의 비늘입니다.”
“헉! 네, 네에?”
너무 놀라 주민등록증을 떨어뜨릴 뻔한 국왕은 간신히 수습하고는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코리아 제국에선 병사들의 힘만으로도 드래곤을 사냥합니다. 하여 완전히 멸종되었지요.”
“아……!”
중간계의 조율자, 위대한 존재, 마법의 조종 등으로 불리는 존재의 비늘이라 한다.
비위를 거스르는 것만으로도 무지막지한 브레스를 뿜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능력자이기도 하다.
그런 존재를 죽이고 비늘을 뽑아 신분증명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여, 여기……!”
화들짝 놀란 국왕은 얼른 주민등록증을 건네준다.
현수는 말없이 받아 지갑에 넣었다. 그런데 지갑이 약간 독특해 보인다.
검고 흰색이 섞여 있는데 표면이 우툴두툴한 것 같다.
“그건 뭡니까?”
“이건 지갑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분 증명서 등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가오리 가죽으로 만든 거죠.”
“가오리요?”
“네! 바다에 사는 납작한 물고기 중 하나지요.”
“물고기의 껍질이 이토록 단단하단 말입니까?”
“잘 처리하면 그렇게 됩니다.”
말을 하며 보고 싶으면 보라고 국왕에게 지갑을 건넸다. 지갑 안에는 신용카드 몇 장이 꼽혀 있다. 흰색도 있고, 검은색과 초록색 카드도 있다.
국왕은 이를 화이트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 그리고 그린 드래곤의 비늘이라 인식했는지 만져보지도 않는다.
그러다 지폐를 보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그려진 10,000원 권 지폐이다.
“이건 뭡니까? 사람 얼굴이…….”
“아! 그분은 우리 코리아 제국의 선대 황제시지요. 제국에서 사용하는 문자를 창제해 내신 분입니다.”
“문자를 창제해요?”
“네! 아주 뛰어나신 분이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국왕은 별 흥미를 못 느꼈는지 도로 집어넣는다.
귀족으로서 선대 황제를 기리는 의미로 들고 다니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방금 보신 건 코리아 제국의 화폐입니다. 금화나 은화를 들고 다니는 건 너무 무거워 그렇게 만든 겁니다.”
“어진(御眞)이 아니라 화폐라고요?”
“네! 선대 황제를 기리는 의미도 있지만 화폐로서의 역할이 더 크지요. 지금은 한 가지밖에 없지만 여러 종류가 있어 금전 거래할 때 아주 편합니다.”
“아……! 그런데 이건 뭐로 만든 겁니까? 종이 같기는 한데 조금 질긴 것 같습니다.”
아르센 대륙에도 종이가 있기는 하다. 물론 지구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훨씬 더 조악하고, 잘 찢어진다.
국왕이 보기엔 종이이다. 그런데 이리저리 당겨 봐도 찢기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종이처럼 보이지만 솜으로 만든 겁니다.”
“솜이요?”
“네, 목화라는 식물의 씨앗에 달라붙은 털 모양의 흰 섬유질을 가공한 겁니다. 부드럽고, 가벼우며, 탄력이 풍부하고, 흡습성과 보온성이 뛰어나죠. 제국에선 이걸 가공하여 직물 등으로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목화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요?”
국왕은 관심이 간다는 표정이다.
“아공간 오픈!”
현수는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곤 부팅시킨 후 백과사전에서 목화 부분을 찾아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이건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잡초와 아주 비슷하군요.”
“아! 여기도 이런 게 있습니까?”
“네!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걸 본 적이 있거든요.”
국왕은 확신한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뭐라 부르지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별 쓸모없는 잡초라…….”
사용방법을 모르니 잡초라 하는 게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목화라 이름 붙이십시오. 이걸 잘 가공하면 솜은 물론이고, 따뜻한 옷감까지 만들 수 있습니다. 솜으로는 이불과 요 등을 만들 수 있으며,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누비면 추운 겨울을 나기에 한결 편해집니다.”
“그래요? 근데 모카라 하셨나요?”
“아니요. 목화입니다. 아국에선 그리 부르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목화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국왕으로서 백성들이 편해진다니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이걸 어떻게 하여 솜으로 만들고, 실을 만들며, 천을 짜는지는 제가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내친 김에 아공간 속에서 목화이불솜을 꺼냈다.
겉감은 TC186이고, 충전재는 천연목화 65%에 폴리에스테르 35%짜리 이불이다. 슬쩍 살펴보니 원래는 49,000원짜리인데 24,900에 할인판매 한다는 태그가 붙어 있다.
“이건……?”
“가져가셔서 덮어보십시오. 가볍고, 따뜻할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국왕이라 마름질이 아주 잘된 짐승 가죽을 덮고 잔다.
원래 심한 냄새가 났지만 마법 처리하여 냄새를 죽여 놓은 것이다. 그래도 습기 많은 날엔 가끔 냄새가 난다.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싫지만 어쩌겠는가!
아르센 대륙에도 천은 있지만 덮어도 따뜻하지 않다. 추위를 물리치려면 엄청 두껍게 겹쳐 덮어야 한다. 당연히 매우 무겁다.
그런데 눈앞의 이불은 백설처럼 희다. 만져보니 보드랍고, 가볍다. 너무 가벼워 덮어도 덮은 것 같지 않을 듯싶다.
코를 대고 킁킁거려 봤는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과연 마탑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현수는 목화솜으로 만든 요도 꺼냈다. 태그를 보니 퀸 사이즈이고, 가격은 40,000원이다.
그러고 보니 이불과 요 모두 커버가 없다. 하여 요와 이불의 커버 역시 꺼냈다. 연한 쪽색이다.
현수는 익숙한 손길로 커버를 씌웠다. 천지건설에 입사하기 전까진 이런 일도 곧잘 했기에 작업은 금방 끝났다.
그러고 보니 베개가 없어 이것도 꺼냈다.
하나는 연한 코발트색이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파스텔톤 주황색이다. 두 개만 가지곤 부족하다 싶어 연두색과 노란색도 꺼냈다. 이것들도 파스텔톤이다.
베개 겸 쿠션으로 쓰라는 의도이다.
“이걸 왕궁으로 보낼 테니 써보십시오. 모두 목화로 만든 겁니다.”
“네에? 이거 전부가 그렇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목화를 가공하여 만든 겁니다. 따뜻하고, 가벼우며, 흡수성과 보온성 또한 좋습니다. 사용 후 가끔은 햇볕에 말려주시는 것 잊지 마십시오.”
“……!”
현수의 설명에도 국왕은 대꾸가 없다. 대신 이불과 요, 그리고 베개를 만져보느라 여념이 없다.
너무도 푹신푹신하고, 가볍고, 보드랍기에 마치 연인을 쓰다듬듯 하고 있다. 신기하기도 하고, 한시라도 빨리 사용해 보고 싶기도 해서이다.
“국왕 전하!”
“…아! 네에. 말씀하십시오.”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파이렛 군도의 해적 모두를 제압하여 노예로 삼았습니다.”
“네에? 해적들 전부 말씀이십니까? 마탑주님께서요?”
“그러합니다. 바다의 악이니 당연히 그리해야 했지요. 모두를 죽일 수 없어서 제 노예로 삼았습니다.”
해적들 모두를 죽이면 그야말로 피바다가 된다. 너무 인원이 많기에 하여 국왕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 준다.
“아아! 정말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해적들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아드리안 왕국은 해적들의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위해 바다를 오가는 상선들만 나포당한 것은 아니다. 수시로 상륙하여 노략질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곡식 등이 약탈되었고, 많은 사람이 잡혀갔다. 사내들은 노예가 되어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고, 여인들은 노동력뿐만 아니라 몸까지 제공했다.
국왕은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지만 불행히도 아드리안 왕국은 해안선이 길다. 게다가 파이렛 군도에서 가장 가까운 세 나라 중 하나이다.
뿐만이 아니다. 뭍에는 해적의 끄나풀이 많이 있다. 하여 병사들이 없거나 경계가 느슨한 곳마다 털렸다.
삼국연합의 공격이 우려되었을 때엔 특히 더했다.
군사들을 그쪽에 배치할 수 없음을 알고 아예 내놓고 노략질을 벌였던 것이다. 참으로 골치 아픈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