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5
국왕은 이 이야기를 들었던 시기를 가늠하며 입을 연다.
“……! 혹시, 1,600골드에 팔렸다는 그…….”
“맞습니다. 이름은 다프네! 나이는 23세입니다.”
“아! 역시…….”
지상 최고의 미녀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었던 것이 아니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 왕국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사려됩니다. 꼭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꼭 찾아서 이곳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국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마탑주의 부인 되실 분이니 의당 그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다프네는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 라이세뮤리안의 딸입니다.”
“네에……?”
국왕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다. 감히 드래곤의 딸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먹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당했다면 아드리안 왕국의 수도 멀린은 화염의 브레스로 불타오를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진다. 한가롭게 담소를 나눌 상황이 아닌 것이다.
“지, 지금 당장 그분을 찾아보라고 지시해야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그, 그럼 이만……! 또 찾아뵙겠습니다.”
국왕은 현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나가 버린다.
나라의 존폐까지 우려될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 벌어져 있으니 어찌 급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 귀족과 근위기사단 전원이 마치 놀란 기러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나같이 창백한 낯빛을 띠고 있다.
보통 급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왕은 가장 먼저 노예 경매에 관여했던 자 전원에 대한 긴급체포를 지시했다. 노예상과 그 가솔은 물론이고, 경매 진행자까지 압송될 예정이다.
그러는 동안 솜씨 좋은 화공들을 데려다 놓도록 했고, 그날 경매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도 집합시키라 하였다.
대부분이 귀족가의 집사지만 일부는 백작급 이상의 귀족 본인도 있다. 이들 가운데 예외는 없다.
만일 귀족이라 하여 못 오겠다고 뻗대는 자가 있다면 즉시 작위를 폐하고, 전 재산을 몰수토록 할 것이며, 산간오지로 귀양살이를 보낼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들을 부르는 이유는 다프네의 용모파기를 그려서 전국에 수배하려는 의도이다.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왕국의 모든 병력은 전국 각지로 흩어질 만반의 준비를 하게 된다.
이때 국왕은 모든 영지를 샅샅이 뒤질 수 있도록 인솔 귀족 또는 기사에게 복명서를 줄 생각이다.
이것엔 다프네가 이실리프 마탑주의 부인이 되실 분이시며, 라이세뮤리안의 딸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를 보고도 수색에 동참하거나 협력하지 않을 귀족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법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영지엔 왕실 마법사들이 파견되어 즉각적인 통신이 이루어지도록 조치를 취한다.
그야말로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국을 샅샅이 뒤지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현수는 이실리프 왕국에서 필요로 하는 곡물과 생필품 이야기를 미처 하지 못했기에 이를 문서로 작성하였다.
이것들을 왕국 최남단의 항구도시 콘트라로 보내달라는 내용이다.
“소피아!”
“네! 주인님!”
소피아 공주는 부친인 국왕이 황급히 물러가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집무실 밖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걸 왕궁에 전할 수 있도록 해줘.”
“네! 주인님!”
소피아는 현수가 건네는 봉투를 공손히 받는다. 그리곤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고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이 모습을 본 현수는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는 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이곳엔 밤시중을 위한 여섯 여인이 기거하고 있다.
이들의 시중을 들어줄 여인들과 이들에 의해 부림을 받는 여인들이 144명이나 있어 여자만 150명이다.
마탑주는 여섯 여인 이외에 나머지 여인들도 취할 수 있다. 현수는 궁녀가 150명인 궁궐에 사는 왕인 셈이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한 세대에 평균 600명의 궁녀가 존재했다. 영조 때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숫자는 왕이 있는 대전 외에도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와 공주궁, 그리고 후궁과 각 별궁에 소속된 여인을 망라한다.
또한, 왕의 사친의 사당을 지키는 여인도 포함이다.
헥사곤엔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없다. 아울러 공주궁도 없고, 왕자궁도 없으며, 사당도 없다. 따라서 현수는 조선시대 왕에 버금갈 꽃밭 속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 중 하나도 취할 수 없다. 이미 다섯이나 되는 여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인이 없을 때 헥사곤을 관장하는 여섯 여인은 너무 어리다.
그런데 방금 전 물러간 소피아는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곤 한다. 마치 아이돌의 사생팬 같은 눈빛이다.
‘흐음!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해둬야겠군. 그나저나 라세안 이 친구는 대체 어디에 있기에…….’
라세안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에 다프네의 행방을 인간보다는 더 예민한 감각으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행방이 묘연하다.
“설마 아직도 몬스터 몰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현수는 라세안에게 바세른 산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실리프 자치령을 위해 모든 몬스터를 몰아내달라고 했다.
하여 제니스케리안과 더불어 작업한 바 있다.
덕분에 흑마법사들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닐 브론테 왕국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영지민들은 몬스터들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고, 흑마법사들은 전력을 다해 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흐음! 그럼, 자치령엔 다녀올까?”
현수는 자치령 인근 좌표를 확인했다.
아드리안 왕국이 전력을 다해 다프네를 찾기야 하겠지만 라세안의 감각만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거기 있어야 하는데.”
나직이 중얼거리고 텔레포트를 하려는 순간이다.
지이잉-! 지이이잉-!
품속의 수정 통신구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난다.
현수는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이다. 그리고 마법 통신구는 마법사 이외엔 구동 불가능이다. 그렇기에 위엄 넘치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인가?”
“위대하신 로드! 소인 롤랑이옵니다.”
통신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럴 것이다. 하지만 알아들을 건 다 알아들었다.
“롤랑? 아……! 그래, 무슨 일인가?”
“로드! 공작님께서 로드와 말씀 나누고자 하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사위! 날세. 로니안.”
“네, 장인어른!”
로잘린과의 결혼이 확정되었으므로 헤어지기 직전에 이런 호칭을 쓰기로 약속했기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아무튼 미판테 왕국이 느닷없는 몬스터 러시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을 때 현수는 각 영지를 돌며 그들을 퇴치했다.
그러는 동안 로니안 공작 일가는 라수스 협곡 쪽으로 이동했다. 테세린으로 귀환할 때 협곡을 가로지르는 것이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 협곡 입구에 당도해 있다네. 언제쯤 와 줄 수 있으신가?”
“아! 그래요? 곧 가겠습니다. 롤랑을 불러주십시오.”
“그러시게. 고맙네.”
사위될 사람이지만 부려먹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치사를 빼놓지 않는다.
잠시 후 롤랑의 얼굴이 수정구에 나타난다.
“말씀하십시오, 로드!”
“그곳의 좌표를 확인해서 알려주게.”
“네! 잠시만요.”
현수는 좌표 확인에 불과 10초 정도 걸린다.
하지만 롤랑은 겨우 4서클 마법사이다. 그렇기에 거의 5분이 지나고 나서야 좌표를 불러준다. 어쨌거나 좌표를 확인한 현수는 잊은 물건이 없나 확인하곤 입술을 달싹였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사라진 직후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린다.
똑, 똑, 똑!
“주인님! 저 들어가요.”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소피아이다. 아까와 달리 과감한 차림이라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곳 여인들은 발육이 좋은 편이다.
그렇기에 이제 겨우 17살밖에 안 되었지만 몸매는 글래머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맥이 빠진 소피아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연신 ‘주인님 어디 계세요?’를 외친다. 그러면서 이 방문 저 방문을 다 열어본다. 혹시 어디 숨었단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사라진 사람을 어찌 찾겠는가!
“치이! 또 가셨나 봐.”
소피아는 입술을 삐죽인다.
뿌리기만 어떤 사내든 낚을 수 있다는 사랑의 묘약을 바르고 왔다. 특별히 거금을 들여 구매한 것이다. 씀씀이가 큰 공주의 한 달 치 용돈 전부를 지불했다. 그런데 유혹할 대상이 사라졌으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다.
“설마, 이번에도 몇 달 있다가 오시진 않겠지.”
내심 불만스러웠으니 소피아는 감히 투덜대진 못한다. 그러기엔 너무도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같은 순간 현수의 신형은 라수스 협곡 입구에 당도하고 있다.
“아! 오셨습니까?”
현수의 신형이 드러나자 롤랑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인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 이곳엔 언제 당도했나?”
“어제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럼, 일찍 연락을 하지.”
“그랬는데 통신구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롤랑에게 준 통신수정구는 상당히 고성능이다. 하지만 세상 전체를 커버할 수는 없다.
아르센 대륙이 있는 이 행성도 지구처럼 둥글다.
지구는 반지름이 약 6,371㎞이다.
지면을 평면이라 여기고 곡률을 계산해 보면 1㎞를 이동할 때마다 약 7.85㎝ 정도 낮아진다.
500㎞라면 39.25m 낮아지는 셈이다.
아르센 대륙 역시 둥글기에 곡률이 존재하고 통신수정구의 효력은 500㎞ 정도까지이다.
이곳 라수스 협곡의 입구로부터 멀린은 꽉 찬 500㎞이다. 그렇기에 간신히 통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현수가 헥사곤이 아닌 아드리안 왕궁에 있었다면 연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거의 경계선상에 있었던 때문이다.
현수는 회색빛 로브를 걸친 롤랑을 바라보았다.
테세린의 영지마법사임을 알리는 스태프와 번개 그림이 수놓아진 것이다.
“그래! 그랬군. 공작님은 어디 계신가?”
“저기 저 여관에 계십니다.”
롤랑이 가리킨 곳엔 허름한 여관이 있다. 사실은 여관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라수스 협곡이 폐쇄되자 여관들은 거의 모두 폐업했다.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전부가 문을 닫은 건 아니다. 몬스터 사냥꾼들과 심마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만 가지고 어찌 수지가 맞겠는가! 하여 여관은 여관이되 다 쓰러져 가는 여관만 남아 있다. 간신히 유지만 할 뿐 망가진 곳이 생겨도 보수할 돈이 안 벌리는 때문이다.
어쨌거나 인근엔 여관이라곤 하나뿐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하룻밤을 묵은 것이다.
“가지!”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롤랑의 안내를 받아 여관 마당에 들어가니 로니안 공작 부부와 로잘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행기사와 마법사들은 일제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추곤 물러선다. 공작의 안위를 위해 수신하고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때문이다.
“어서 오시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닐세! 오느라 애썼으니 들어가서 좀 쉬시게.”
“네에, 그러지요.”
공작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허름하지만 정갈한 탁자에 스튜와 스테이크 요리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