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70화 (969/1,307)

# 970

현수는 아공간에 있던 취침용 컨테이너 하나를 더 꺼냈다.

이것 역시 항온마법진과 공간확장마법, 그리고 청결마법과 라이트 마법이 적용된 것이다.

퀸사이즈 침대는 두 개가 있지만, 화장대와 냉장고는 하나뿐이다. 바닥의 양탄자까지 비슷하다.

다른 것은 침구의 색깔이다.

현수 쪽은 단색인데 파스텔톤 자주색과 주황색이다.

로니안 공작부부를 위해 꺼내놓은 건 연한 밤색에 흰색 동그란 점이 그려진 것이다. 베개까지 세트로 되어 있어 상당히 고급스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실리아 부인은 말하지 않았음에도 신발을 벗고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선다. 구두를 신고 들어가는 곳이 아님을 느낀 듯하다.

“테세린에 도착할 때까지 사용하십시오.”

“고, 고맙네! 세상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로니안 공작은 말도 끝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린다. 물론 신발은 벗었다.

이곳으로부터 테세린까지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두 달 이상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쓰라고 했으니 적어도 그 기간 동안은 본인이 주인인 셈이다.

그런데 왕궁에서도 보지 못했던 정갈함과 깨끗함, 그리고 화려함과 고아함에 뭐라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어머! 여보……! 여기 앉아 봐요.”

침대에 앉아본 세실리아 공작부인이 그 푹신함에 놀란 듯 저도 모르게 소리치자 로니안 공작은 체면도 잊은 듯 얼른 그 곁에 털썩 주저앉아 본다.

“으잉……?”

푹신하면서도 견고하게 받쳐주는 느낌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느껴본 촉감이다. 하여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때 세실리아 공작부인이 또 한 번 소리친다.

“어머! 여보……!”

이번에는 또 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로니안 공작이다. 전혀 품위 없는 모습이다.

이쯤이면 일국의 공작이 아니라 촐삭대는 방자이다.

“뭔데 그래?”

“이거, 이거 한번 봐요.”

공작부인은 밤색 바탕에 흰 동그라미가 그려진 이불을 들추고 있다.

“이거……? 으잉! 가볍네. 뭔데 이렇게 가볍지?”

공작은 부피에 비해 너무도 가벼운 이불이 놀랍다는 듯 이렇게 저렇게 들어본다.

이때 공작부인은 이불의 겉을 보여준다.

“아뇨! 여기 이 동그라미를 보라구요. 보세요. 전부 똑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죠? 수를 놓아도 이렇게는 못해요. 어머, 어머! 어머머머! 정말 똑같아요.”

공작부인은 이불 겉면의 동그라미들이 정말 다 똑같은지 확인하려는 듯 이 잡듯 뒤져본다.

“……! 그렇군.”

부인의 말에 시선을 돌렸던 공작 역시 수없이 많은 완벽한 원을 보고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때 현수가 나섰다.

“주무시기 전에 샤워부터 하시길 권합니다.”

“샤워……? 그건 뭔가?”

“씻는 겁니다. 설명해 드릴 테니 따라오십시오.”

“…그러지.”

공작이 일어서자 세실리아 부인 또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따라나선다. 입구에서 내부를 구경하고 있던 세 영주 또한 기대된다는 표정이다.

현수는 위생용 컨테이너로 가서 샤워기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꾹꾹 누를 때마다 조금씩 나오는 바디샴푸와 헤어샴푸 사용법을 알려주자 몹시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잠시 후, 공작부부는 따뜻한 물로 샤워했다. 그러는 사이에 둘이 벗어놓은 의복을 세탁하도록 했다.

속옷도 있기에 본인이 직접 나선 건 아니고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와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라디아가 합작으로 세탁하고 말렸다.

그런데 외출복을 입고 잘 수는 없다. 하여 잠옷을 꺼내놓아야 했다. 공작의 것은 순면 100%짜리이지만 공작부인의 것은 하늘하늘하며 망사가 채용된 실크 잠옷이다.

현수의 눈에 약간 야하다는 느낌이니 공작의 눈에는 몹시 야한 잠옷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로잘린은 졸졸 따라다니면서 어떤 용도도 어떻게 쓰이는 건지 캐물었다.

그런데 몸에서 냄새가 난다. 그간 목욕과 세탁이 여의치 않았던 때문에 향수를 너무 많이 써서 그러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오니 세 영주가 가지 않고 있다.

“왜 가지 않고 있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야 하니까요.”

“그럼 여관에서 묵나?”

“아닙니다. 이 근처엔 머물 여관이 없습니다.”

“여관이 왜……? 아……!”

하나밖에 없는 낡은 여관은 공작을 수행하고 온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중 귀족은 없는지라 모두 내쫓고 들어가도 되겠지만 어디 그럴 수 있는가!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이 들끓어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이 없다’는 옛말이 있다.

개가 높아서가 아니라 정승 때문이다.

공작 일행을 내보내면 불만의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이고, 그건 공작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한동안 사용하던 군막을 치도록 했다. 철수하면서 모두 걷었는데 다시 설치하려니 문제가 있다.

정비가 되지 않아 엉망인 것이다. 하여 세 영주는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면서 화톳불 가로 모였다. 한잔 후에 오크 가죽으로 만든 냄새나는 이불을 덮고 자려는 것이다.

“마탑주님! 저희끼리 한잔하려고 합니다.”

안주도 변변치 않은데 독한 술을 마시려는 모양이다.

귀족이지만 소탈한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렴주구를 일삼는 여타 귀족들과는 다르다.

하긴 가렴주구를 하려 해도 영지가 너무 가난하여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되겠는가? 따라오게.”

“…네! 알겠습니다.”

하늘같은 마탑주가 오라고 한다. 어찌 머뭇거리겠는가!

세 영주는 찍소리 않고 현수의 뒤를 따라 주방용 컨테이너로 갔다. 현수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따라서 벗는다.

그런데 고약한 발 냄새가 풍긴다.

“잠깐! 워싱! 클린! 에어 퓨리파잉! 워싱! 클린! 에어…….”

세 영주 모두 얼굴을 붉힌다.

아무튼 실내로 들어온 셋은 연신 두리번거린다.

처음 보는 물건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그러는 사이에 현수는 소주 몇 병과 삼겹살을 넉넉히 꺼냈다.

이곳 사람들은 지구인보다 대식가들이다. 하루에 두 끼만 먹으니 그럴 것이다. 아무튼 능숙하고, 재빠른 솜씨로 삼겹살 파티 준비를 마쳤다.

“자아! 한 잔씩 하지.”

현수가 셋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자 영주들은 눈을 크게 뜬다. 이곳의 술에선 시큼한 냄새가 많이 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고, 맑은데다 시원하니 뭔가 싶은 것이다.

“자, 이건 이렇게 먹는 것이네.”

현수는 상추 위에 깻잎을 얹고는 잘 익은 삼겹살을 기름장에 찍은 뒤 올려놓았다. 다음은 구운 마늘이다. 쌈장에 찍어 이것을 고기 위에 올려놓은 뒤 파무침도 약간 올렸다.

잔을 들어 소주를 비운 뒤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아까 먹었던 스테이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맛이다.

현수가 만족스러워하자 영주들 역시 그대로 따라서 쌈을 먹었다. 몇 번을 씹더니 눈을 크게 뜬다.

분명 고기를 구워서 넣었는데 누린내가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달착지근하면서도 고소하고, 상큼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든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자동이다. 영주들은 저녁을 굶기라도 한 듯 허겁지겁 먹는다. 현수의 곁에 조신하게 앉아 있던 로잘린이라 하여 다를 바 없다. 그녀 또한 먹으면서 쌈을 싼다.

잠시 밖으로 나온 현수는 돔형 텐트를 쳐두었다. 원터치라 던지면 저절로 모양을 갖추는 것이다.

이걸 적당한 곳에 놓고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차단하도록 두툼한 매트를 깔고, 베개와 담요도 꺼냈다.

그런데 조금 싸늘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여 항온마법진을 꺼내 적당한 곳에 부착시켰다.

모든 일을 마치고 컨테이너로 들어가 보니 아홉 병의 소주가 말끔하게 비워져 있다. 그런데 모두 말짱해 보인다.

체력이 강해서 술도 센 모양이다.

하지만 딱 하나, 로잘린만은 다르다. 세 영주가 따라준 소주 석 잔에 두 볼이 붉게 달아 있다.

“밖에 잠자리를 준비해 두었네. 당분간 여관이 없을 것이니 가는 동안 쓰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마탑주님의 배려,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 영주 모두 정중히 예를 올리곤 현수가 손짓한 곳을 바라본다. 생전 처음 보는 텐트에 이건 또 뭔가 싶은 표정이다.

할 수 없이 나가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곤 로잘린 먼저 샤워하도록 했다.

다음은 세 영주이다. 셋 다 오랫동안 씻지 못하여 짐승 냄새가 났다. 하여 위생용 컨테이너 사용을 허락해 주었다.

사용법을 알려주는 게 번거로웠으나 한 번만 알려주면 알아서 할 것이기에 이모저모를 소상히 알려주었다.

목욕하는 동안 로잘린과 영주들의 의복 또한 말끔하게 세탁되었고, 건조되었다. 그래도 약간의 냄새가 남아 페브리즈를 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로니안 공작 부부는 물론이고 로잘린과 세 영주는 따뜻한 물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샤워기에 감탄했고, 샴푸의 부드러운 거품과 향긋한 냄새에 취했다.

다 씻은 후엔 잘 건조된 수건에 또 한 번 놀랐다. 물기 흡수도 빠르고, 너무도 깨끗했던 때문이다.

화룡점정은 샤워하기 전에 벗어놓았던 옷들이 모두 세탁되었으며 향긋한 냄새까지 풍긴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리아니는 연옥도에 잡아다놓은 삼합회 놈들과 비교했다. 체취가 지독했던 때문이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가 제 잠자리를 찾아갔다. 로잘린은 부모가 머무는 컨테이너로 가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귀 밝은 현수가 말린 때문이다. 눈치 빠른 로잘린은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리곤 순순히 현수의 컨테이너로 갔다.

‘오늘이 첫날밤인가? 아프면 어떻게 하지? 아! 어떻게 해?’

저녁은 잘 먹었고, 목욕까지 했다.

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따라들어 갔지만 로잘린의 이런 생각은 모두 기우로 끝났다.

각자 침대를 따로 쓴다고 하고는 할 일이 있다면서 현수가 책상 앞으로 가버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있던 로잘린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남자와 단둘이 있지만 전혀 긴장되지 않은 때문이다.

로잘린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자 현수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다.

타임딜레이 마법까지 구현시키고는 들어앉아 밀린 숙제를 했다. 각종 마법진을 미리 제작하고, 출입증을 만든 것이다.

10장 혼돈의 숲으로

짹, 짹, 짹-!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때쯤 현수는 결계를 풀고 밖으로 나와 있었다.

산책 삼아 인근을 둘러보았는데 농토로 조성된 곳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토질이 척박하여 씨앗을 뿌려도 소출이 적을 듯하다.

[아리아니! 여기 땅이 왜 이리 척박해?]

[한 해도 쉬지 않고 계속 농사를 져서 그렇죠.]

[그래……! 그렇겠지.]

이곳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는 있지만 윤작이나 휴경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러니 같은 작물을 매년 심었을 것이다.

그 결과 지력이 다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곳 마르헨 영지의 영주 히킨스 자작과 후마엔의 영주 에드윈 자작, 그리고 롤리아의 영주 지린 남작 모두 귀족이라 하기엔 의복이 꾀죄죄했다.

돈이 될 만한 특산물은 없고, 땅은 척박하여 농사를 지어도 소출은 적다. 게다가 영지 한쪽은 들어가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라수스 협곡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매년 세금은 바쳐야 한다.

미판테 왕국법은 영지의 넓이에 비례해서 세금이 산정된다. 하여 늘 돈이 부족하다. 소출에 비해 면적이 넓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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