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1
이렇기에 귀족이지만 누가 보기에도 반듯한 의복을 걸칠 수 없다. 어쩌다 풍년이 들어 소출이 늘어나면 그때만 아주 반짝하는 궁핍한 귀족이라 할 수 있다.
[정령들 불러서 여기 손 좀 봐주라 할까요?]
[그래! 기왕에 온 거니 낫게 하주는 게 좋겠지?]
[호호! 알았어요.]
아리아니는 모처럼 할 일이 생겨 기쁘다는 듯 앙증맞은 날갯짓을 하며 훨훨 날아오른다.
[이그드리아, 노에디아, 엘리디아, 실라디아! 다 모여.]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초음파가 아리아니로부터 뿜어지고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바람과 물, 그리고 땅과 불의 최상급 정령들이 나타난다.
[찾으셨어요? 아리아니님! 실라디아예요.]
[엘리디아도 대령했어요.]
[이그드리아도 도착했습니다.]
[시킬 일이 있으신 거죠? 노에디아입니다.]
[주인님께서 이 근처 농토를 비옥하게 하라셔. 노에디아는 저기 저 숲 속의 부엽토들을 끌어다 농토의 흙과 섞어.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 알지? 엘리디아는 축축하도록 물 좀 뿌리고. 이그드리아는 불결한 것들은 태우고. 실라디아는 노에디아를…….]
[네! 알았사옵니다. 네! 네!]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상급 정령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는 듯 흩어진다.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최상급 정령들이 온힘을 다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다소 먼 곳으로부터 일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네 정령은 서로 협력하여 척박한 농지를 기름진 옥토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는 지하수맥을 건드려 모든 농토에 적당량의 물이 공급되도록 했다.
하여 없었던 개울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쓸데없이 널찍하기만 하던 하천은 폭은 줄어드는 대신 깊어졌다.
덕분에 농지가 늘어났다.
이그드리아는 모든 불결한 것을 태워 열심히 재를 만들었다. 노에디아는 숲에서 가져온 부엽토와 재를 섞어 기존의 흙과 잘 버무렸다.
이 일은 마르헨 영지와 후마엔의 영지, 그리고 롤리아 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수는 켈레모라니의 비늘로부터 상당량의 마나가 빠져나감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마나가 사용된다 함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수는 세 영주의 병사들이 원터치 텐트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건드리면 휘청거리는데 그게 망가지는 것일까 봐 겁을 잔뜩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접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밤새 사람이 들어가 잤던 텐트는 접어놓으니 자그마한 가방 속에 들어가 버린다.
모두 놀랍다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아침식사를 재촉하였다. 얼른 떠나고 싶은 때문이다.
로니안 공작부부와 로잘린, 그리고 세 영주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취사용 컨테이너에서 식사를 했다.
오늘의 메뉴는 흰쌀밥에 갈비찜과 오이소박이, 그리고 오리엔탈 소스와 마요네즈로 버무린 샐러드이다.
오이소박이는 마트에서 팔던 게 있어서 꺼내기만 하면 되었지만 갈비찜은 직접 요리를 해야 했다. 갈비에 양념 배어드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타임 패스트 마법이 구현되었다.
음식을 다 차려놓고 부르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모여든다. 그리곤 모두들 체면 따위는 내던지고 사흘쯤 굶은 거지처럼 그야말로 허겁지겁 폭풍흡입을 한다.
갈비찜에서 느껴지는 짭짤, 달콤하면서도 느끼한 맛은 오이소박이가 아주 깔끔하게 제거했고, 곁들인 샐러드는 입안에 상큼함을 제공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여기에 기름기 잘잘 흐르는 흰쌀밥이 오이소박이의 양념인 고춧가루의 매운맛을 잡아주었다.
준비하는 데 걸린 시간에 비하면 먹는 시간은 정말 짧았다. 식탁 위에 올려놓기 무섭게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그렇게 먹어치웠던 것이다.
식사 후 설거지는 세 영주에게 시켰다.
퐁퐁과 수세미를 주고 어떻게 닦는지를 알려주었더니 열심히 닦는다.
귀족 사내 셋이 설거지하는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웠으나 어쩌겠는가! 로니안 공작 부부에게 시킬 수도 없고, 로잘린에게도 시킬 수 없다.
세 영주의 손톱 밑에는 시커먼 때가 끼어 있다. 어젯밤의 샤워로는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면 손톱 밑에 낀 때가 빠기기도 한다. 하여 일부러 시킨 것이다.
사실 로니안 공작의 손톱 밑에도 때는 있다. 음식을 맨 손으로 집어먹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거지를 시킬 수는 없다. 하여 군번에서 밀린 자작과 남작이 당번이 된 것이다.
물기 빠지라고 접시들을 세워놓던 셋은 그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수가 꺼내놓은 것은 행남자기에서 제조한 오케스트라 홈세트 중 일부이다.
26pcs에 47만 2,000원이니 중품쯤 된다.
이걸 보고 놀라서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 본다. 그러다 크기와 문양이 완벽하게 일치함에 또 한 번 놀란다.
설거지를 마친 후엔 상으로 인스턴트 커피를 주었다. 달달하면서도 그윽한 향이 너무도 좋은지 눈까지 감고 음미한다.
식사를 모두 마친 시각은 대략 오전 6시 반쯤 된다.
오전 7시, 드디어 마르헨 영지를 떠나 돌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수스 협곡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들 잔뜩 위축된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혹시라도 몬스터가 달려들까 싶어서이고, 라이세뮤리안의 분노가 뿜어질까 싶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빚어지지 못한다. 현수가 드래곤 피어 마법을 구현시키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주 평안한 전진이 계속되었다.
세 영주는 현수의 조언대로 곳곳에 이정표를 설치했다.
방향만 알려주는 화살표만 있으면 되는데 그 아래에 마르헨 영지의 돌다리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도록 하라는 말에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여 이정표의 개념을 설명해 주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을 왔는데 남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으면 그보다 힘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행은 이정표 설치 이외에 도로도 닦았다.
앞으로 짐을 실은 마차가 오갈 통로이다. 따라서 두 대가 오고 갈 정도의 폭으로 길을 만들었다.
세 영지에서 온 인원이 상당히 많았기에 구간을 나눠 일을 시키면서도 교대작업이 가능했다.
하여 상당히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폭우가 쏟아져도 도로가 유실되지 않도록 경사를 주었으며, 도로의 양쪽 끝엔 굵은 돌들을 박아 넣었다.
도로의 흙이 빗물 때문에 유실되는 걸 막기 위함이다.
몬스터의 공격이 없을 것임을 알게 되자 영지민들뿐만 아니라 병사와 기사들까지 삽과 곡괭이를 잡았다.
파낸 흙과 돌덩이들은 리어카 또는 일륜차로 옮겨졌다.
물론, 이것들 모두 현수의 아공간에서 나왔다.
쇠로 만든 삽과 묵직한 곡괭이를 본 영주들은 눈빛을 반짝였다. 귀하디귀한 철로 만들어진 때문이다.
이것들을 가져다 녹이면 질 좋은 검 또는 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하늘같은 마탑주가 빌려준 것이다. 하여 작업이 끝나면 깨끗이 닦아 보관토록 했다.
영지 마법사들도 도왔다. 디그(Dig)와 베리(Bury) 마법으로 땅 파는 것과 파묻는 것을 도왔다.
롤랑은 무거운 바위덩이를 쉽게 옮기도록 경량화 마법을 걸거나 작업 중 다친 이들에게 힐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들보다 앞선 현수는 롤랑 같은 4서클 마법사의 능력으로도 처리하기 힘든 곳들을 미리 해결해 주었다.
집채만 한 바위는 뿌리째 뽑아 길가로 옮겼다. 이것들은 이정표가 없어졌을 때 그것 대신 역할을 하게 된다.
앞을 가로막는 굵은 나무는 윈드 커터로 베어낸 뒤 토막 쳐 길가에 두었다. 다 마르면 오가는 사람들의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로니안 공작 부부와 로잘린은 그럴 때마다 감탄사를 터뜨리곤 했다.
어른 둘이 팔을 벌려 안아야 할 정도로 굵은 나무도 윈드 커터가 스치고 지나면 몸체를 누이곤 했던 때문이다.
처음 이틀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리아니는 100여 그루 이상이 베어져 있자 화를 냈다.
숲의 요정이니 나무가 베어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현수는 디오나니아의 잎사귀를 베어낼 때 통증을 느낀다고 말한 것을 상기했다. 하여 더 이상 윈드 커터를 사용치 않았다. 대신 아리아니로 하여금 앞장서게 했다.
먼저 가면서 베어질 운명에 처한 나무들이 자리를 옮기도록 한 것이다. 이 작업엔 최상급 정령들의 공이 컸다.
아리아니의 명에 따라 상급 및 중급과 하급 정령들까지 동원하여 작업을 이행했던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최소 수천 그루의 나무가 더 베어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길을 내며 전진하는 것은 순조로웠다. 가는 동안 로니안 공작 부부와 로잘린의 식사는 현수가 전담했다.
냉면, 돈까스, 라면, 닭갈비, 대구탕, 샌드위치, 햄버거, 피자, 후라이드 치킨 등이 메뉴였다.
물론 매번 감탄사 연발이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후식으로 브라보콘을 내놓았던 날이 있다. 그 달콤함과 시원함에 모두들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도 홀딱 반한 맛이다.
그렇다 하여 작업과 요리만 한 것은 아니다. 현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롤랑을 불러 마법을 가르쳤다.
공작을 주군으로 모신 영지마법사이니 최소 5서클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나포션 두 병과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 결과 롤랑은 서클 업 하는 행운을 누린다.
7서클 유저가 대부분의 마탑주이고, 어떤 마탑은 6서클 마법사가 마탑주인 세상이다.
5서클이면 상당히 높은 서열이 된다.
그렇기에 롤랑은 다섯 번째 서클이 형성되던 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현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래도 마법 학습은 끝난 게 아니다.
간신히 5서클에 이른 것이지 아직 5서클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 롤랑도 현수의 식탁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왕궁으로 가면 자작위를 받을 수준이 된 때문이다.
참고로, 미판테 왕국의 재상 에드가 폴랑 폰 갈리아 공작은 6서클 마법사이다.
어쨌거나 롤랑이 5서클에 이른 다음 날부터 일과가 끝나면 모든 마법사가 현수 주위를 얼쩡거렸다,
혹시라도 한 마디라도 얻어들으면 본인도 서클 업 하는 행운을 누릴까 싶었던 모양이다.
어찌 현수가 마법사들의 이런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마법을 가르칠 시간은 없다.
하여 미판테의 현자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후작에게 해주었던 말을 되풀이해 줬다.
“잘 들어라! 이 세상은 마나로 가득 차 있으니 마나로 이루어진 물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널리고 널려 있으니 마나를 굳이 몸에 담으려 할 필요가 없다.”
현수의 말 한마디에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은 마법사들이 셋이나 있었다. 이들은 다시는 현수 근처에 오지 않았다.
일과가 끝날 때마나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명상하기에도 바빴던 때문이다.
현수는 수시로 시간을 내어 로잘린과 다정한 한때를 보냈다. 곧 결혼할 사이인데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로잘린은 존경과 사랑, 그리고 흠모의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보며 재잘거렸다.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어느 것 하나에도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10서클 마스터이며,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