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4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갓 구워낸 것은 아니지만 곰팡이 핀 딱딱한 것도 아니다.
빵의 공급은 케이상단이 맡았다. 현수와 인연이 있는 알론이 책임자이다.
원래는 케이상단 제7지부 서기였으나 지금은 지부장이다.
어쨌든 알론이 공급하는 빵은 상당히 품질이 좋다.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공사현장에선 식사시간마다 빵과 함께 걸쭉한 스튜가 배급된다. 멀건 국물이 아니라 건더기가 제법 많아 씹는 맛까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일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곳의 안전성 때문이다.
대륙의 어떤 나라도 감히 이실리프 자치령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사로 징집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엔 몬스터도 없기 때문이다.
숲을 정찰하고 온 병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뱀조차 사라졌으므로 울창한 숲이라 할지라도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45만 명에 달하는 일꾼들을 부리는 존재는 당연히 빌모아 일족이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 놓고 진척도에 따라 일사불란한 작업지시를 내린다.
당연히 할당량도 정해준다. 그것만 마치면 나머지는 휴식을 하든 뭘 하든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것은 허용되지만 주사를 부리면 열흘간 작업에서 제외된다. 그 기간 동안은 본인이 알아서 음식을 먹어야 하고, 품삯도 지불되지 않는다.
술 마시고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주폭은 보름간 작업금지이며, 1년간 술집 출입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둘 다 금전적으로 엄청난 손해이기에 술은 마시지만 주사부리거나 말썽 피우는 자는 없다.
스타이발 마탑주나 전장의 학살자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으니 까불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파빌리온을 시작으로 타지마할과 바실리, 그리고 한옥단지까지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다 완공될 때까지 완벽하게 자리를 비워도 될 듯하다.
“그런데 빌모아 일족은 손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손이 부족해? 아! 일꾼이 더 필요하냐는 말이군.”
“맞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요. 안 그래요?”
“안 그래! 우리 일족을 뭘로 보고……. 하루에 반나절도 일 안 하는 녀석들도 널렸구만.”
작업자들에게 할당량을 부여한 후 일찍 마치면 쉬어도 된다고 하자 드워프들도 그렇게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나이즐 빌모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일찍 마치는 자에겐 맥주를 주겠다고 한 것이다.
동기부여가 목적이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가 드워프들이 광분하게 만드는 말이 되어버렸다.
드워프들은 미친 듯이 일을 하고는 맥주를 요구했다.
그 결과 모스크바에서 구입한 발찌까 맥주 20만 캔이 거의 소진되었다. 참으로 먹성 좋은 드워프들이다.
“여기 말고 다른 작업장이 또 있는데 거기서 작품 활동을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여기 말고……? 뭐, 맥주만 충분하다면…….”
“전에 드린 만큼 가져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정말? 근데 그거 말고 막걸리라는 것하고 바삭바삭한 그것도 어떻게 안 되나?”
“바삭바삭한 거라면……. 아! 그거요? 당연히 되죠.”
“그럼 거래되었네. 어딘가 현장이……?”
“여기서 좀 멉니다. 그리고 거긴 더운 지방이구요.”
나이즐 빌모아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평생을 사계절이 두렷한 곳에서 살아왔다. 이곳은 현재 아침과 저녁엔 몹시 쌀쌀하다. 깊은 산중이라 더하다. 따라서 대륙 전체가 이곳처럼 서늘할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런데 덥다니 이해가 안 된 것이다.
“대륙 남쪽 바다엔 파이렛 군도라는 해적들의 근거지가 있었습니다. 그곳을…….”
잠시 현수의 설명을 듣고 있던 나이즐이 눈을 크게 뜬다. 못 본 사이에 왕국을 만들었다는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래서 거기에도 바실리랑 타지마할, 그리고 파빌리온과 루드비히, 마지막으로 한옥단지 등을 지어줬으면 합니다.”
나이즐은 눈빛을 반짝이며 반문한다.
“어떤 걸 왕궁으로 쓸 것인가?”
방금 언급한 다섯 가지는 제각기 건축양식이 다른 것이다.
현수가 보여준 것은 사진과 간단한 평면도뿐이다. 하여 나머지는 상상하여 지었다.
거의 다 지어놓고 보니 흡족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그렇다 하여 허물고 다시 지을 수는 없다.
하여 한 번 더 기회가 있으면 훨씬 잘 지을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왔다.
나이즐 빌모아는 장인이다.
그것도 웬만한 장인이 아니라 장인들이 인정할 만큼 예술적 감각 넘치고, 자부심 또한 넘치는 명장 중의 명장이다.
예를 들자면 조선 500년 역사에 많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를 감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이즐 빌모아는 장인 종족 드워프 중에서도 탁월한 감각을 가진 존재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예술품을 탄생시켰다.
반지나 팔찌, 목걸이, 티아라 같은 장신구도 있었고, 바스타드 소드, 아머, 방패 같은 무구도 많았다.
그런데 후손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 명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보석을 다듬어 작품을 만들어 놨는데 드래곤들이 심심치 않게 들이닥쳐 모조리 앗아갔다.
드래곤 역시 진품을 보는 눈이 있기에 많은 공예품 중 나이즐 빌모아가 만든 걸 용케도 골라간 것이다.
일부는 인간 세상으로 흘러들어 어느 왕가 혹은 황가의 보물창고 속에 처박혀 있다.
극소수의 권력자들만이 감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게 내 작품이야’라고 말하며 꺼내놓을 게 없다.
그런데 건축물은 다르다.
들고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며, 한 번 지어놓으면 그 자리에 수백, 수천 년간 존재한다.
나이즐은 현수의 요청을 받고 바실리, 루드비히, 한옥, 타지마할, 파빌리온을 건축했다.
전부가 처음 접하는 건축양식이었지만 나이즐은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 그리고 재차 기회가 왔다.
이런 건 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나이즐은 몹시 흥미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떤 걸 왕궁으로 쓰실 건가? 말만 하시게.”
어느새 말도 반쯤 올려준다. 인간 세계의 왕이라는데 마냥 반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처럼 공무는 바실리에서 보고, 사적인 공간은 한옥단지였으면 합니다.”
“거기 경치 좋은 곳 많으신가?”
“그럼요! 가보시면 깜짝 놀랄 만큼 장관인 곳도 많이 있습니다.”
지나에는 구채구(九寨溝)라는 곳이 있다.
사천성에 있는 곳으로 아홉 개의 장족 마음이 있었다 하여 구채구라 부른다. 이곳은 계곡을 따라 형성된 108개의 호수와 13개의 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지나 정부는 이곳을 관광특구로 지정했다. 그리곤 1인당 6만 원이나 되는 비싼 입장료를 받아 챙긴다.
하여 들어갈 땐 강도당한 기분이 들지만 오채지 등을 구경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스르르 사라질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이실리프 군도에도 이런 곳이 여럿 있다.
그렇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겠네! 여기 일은 이제 마무리만 남은 셈이니 일족 중 일부만 남아 있으면 되네.”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감사해야죠. 일족을 대표하여 이런 기회를 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나이즐의 말은 완전한 존대로 돌아섰다.
“에구……! 전처럼 편히 대하십시오. 제가 불편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국왕이 되셨다는데 어찌……. 전하의 부하들이 제명에 못 죽게 할 겁니다.”
그렇기는 하다!
자신들이 극존칭을 쓰고 충성을 맹세하는 인물에게 반말 툭툭 내뱉는 존재가 있다면 몹시 거스를 것이다.
좋을 땐 좋지만 조금만 틀어지면 중상모략을 해서라도 내치려 할 것이 뻔하다.
현수 역시 이런 걸 느끼기에 뭐라 만류할 수가 없어 잠시 말을 끊었다. 이때 나이즐이 스르르 무릎을 꿇는다.
“나이즐 빌모아와 빌모아 일족 전체는 이실리프 왕국의 신민이 되고 싶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이곳에 와서 작업을 하는 동안 느낀 점이 많았다.
첫째는 하인스 마탑주의 그늘 아래에 있으면 아주 안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접 국가인 테리안 왕국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국가도 이실리프 자치령을 상대로 도발하지 못한다.
모든 마법사와 모든 기사가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래곤조차 건드릴 수 없다.
이곳은 본시 드래곤 로드인 옥시온케리안의 영토인데 버젓이 공사를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멀쩡하다.
따라서 드래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나이즐 빌모아는 일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족장으로서 많은 고심을 했다.
정중히 대해주는 현수를 믿고 일족 전체를 의탁했는데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가 되었을 때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스타이발 후작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로드께선 최소 두 번의 바디 체인지를 겪으셨을 것이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고.”
“바디 체인지를 겪으면 무엇이 달라지는 겁니까?”
“수명이 늘어나지. 웬만한 잡병 따위는 걸리지도 않고.”
“수명이 늘어요? 얼마나요?”
“고문헌에는 첫 번째에는 300년으로 늘어난다고 하네.”
“그럼 두 번을 하면 어떤가요?”
“지금까지 두 번 이상 바디 체인지를 했다는 기록은 없네. 다만 추정하길 수명이 700살로 늘어날 것이라 하네.”
“그럼 로드께서도 700살까지 사시는 건가요?”
“아니네, 로드께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오르지 못한 10서클에 이르신 분이네, 모르긴 몰라도 최소 1,000년 이상 더 사실 것으로 추측하네.”
“네에? 앞으로 천 년이요?”
“그래! 내 생각은 그러하네.”
“혹시 로드의 연세를 알고 계십니까?”
“아니! 모르네. 다만 10서클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이니 한 300살쯤 되셨을 것으로 추측하지.”
“후와아~!”
스타이발 후작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일제히 감탄사를 터뜨린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100년이다.
사내들 평균 수명은 45년 정도 된다. 질병과 전쟁, 굶주림 등으로 일찍 죽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걸 겪지 않아도 대부분 70살을 넘기지 못한다.
고서클 마법사들 중에는 마법적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리치로 만들기도 한다.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함이다.
말을 하기도 하고, 움직임도 있지만 솔직히 살아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기에 리치들을 경원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이즐은 스타이발 후작의 이야기를 듣고 내심을 정했다. 적어도 1,000년은 보장되었으니 모험을 걸어볼 만하다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신민이 되기를 청했다.
“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기에 현수가 깜짝 놀랄 때 나이즐 빌모아의 말이 이어진다.
“대신 저희에게 끊임없는 일거리와 맥주를 줘야 합니다. 아! 편안한 잠자리는 저희가 직접 만들겠습니다.”
“에구……!”
“그간 무례히 군 점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그럼 우리 빌모아 일족이 이실리프 왕국의 신민이 된 걸로 알겠습니다.”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나이즐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씨익 웃어 보인다.
12장 서울이 궁금해!
“일족의 안전 또한 책임져 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