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5
“그, 그럼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인간 세상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있는 드워프들도 구해주셨으면 하는 게 작은 바람입니다.”
나이즐의 말처럼 상당히 많은 드워프가 인간에게 사냥당해 끌려갔다. 그리곤 노예가 되어 각종 장신구나 공예품, 무구 등을 만드는 생산 공장으로 전락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구하는 게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현수는 다르다.
영주 대부분은 마법을 익히거나 검을 쥔다. 영주 본인에게 무력이 없으면 암살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수는 위저드 로드이며,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다. 따라서 각각의 영지가 보유한 노예 드워프들을 보내달라는 뜻을 전하면 거역할 자가 드물다.
각자 자신이 추구하는 바의 하늘이기 때문이다.
빌모아는 이것까지 계산에 넣은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는 다른 이종족이지만 노예로 부리는 것은 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죠.”
“그나저나 이실리프 왕국은 얼마나 넓은 곳입니까?”
“이실리프 군도는 모두 5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 참, 이걸 보면…….”
현수는 플라이 마법으로 하늘에 올라 이실리프 군도를 사진 찍은 바 있다. 상당히 많다.
노트북을 꺼내 저장된 사진들을 보여주자 나이즐은 눈빛을 빛낸다. 남쪽으로 가면 바다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봤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에메랄드 빛 바다에 떠 있는 초록 섬은 황금빛 모래로 가득한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솟은 절벽도 있고, 섬 가운데를 구불구불 휘감고 도는 시퍼런 강물도 보인다.
잔뜩 우거진 정글을 자세히 살피니 이곳 바세른 산맥의 수종과는 달라 보인다. 잎사귀가 훨씬 더 넓고 크다.
59개의 섬을 찍은 사진의 숫자는 대략 6,000장 정도 된다. 섬 하나당 100장 정도를 찍은 것이다.
“이 섬이 가장 큰 섬입니다. 이쯤해서 바실리를 건립하고, 여기 이쪽에 한옥을 지었으면 합니다.”
“좋군요.”
“타지마할은 여기에, 파빌리온은 이곳에, 루드비히는 여기쯤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섬마다 똑같은 걸 다 지으라는 겁니까?”
“아닙니다. 제일 큰 이 섬에는 다섯 가지 건축물을 다 짓지만 나머지 섬에는 굳이 같은 규모가 아니어도 됩니다. 참! 이것도 보십시오.”
마우스로 화면을 바꾸자 나이즐은 몹시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모아놓은 사이트로 들어가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이즐은 눈빛을 빛내며 뚫어지게 바라본다. 장인의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계속해서 화면을 바꿔가며 이것저것을 보여주었다.
그중엔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마을 사진도 있고, 프랑스의 콜마르, 체코 공화국의 체르키크룸로프도 있다.
이 밖에 스위스의 웽겐, 네덜란드 히트호른, 영국의 바이브리,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등도 보인다.
설명을 하며 각각을 프린터로 인쇄하여 주었다.
나이즐은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레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말은 안 했지만 벌써 머릿속에 각종 청사진들이 그려지는 중인 것이다.
“필요한 건축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하거나 뭍으로부터 운송토록 하십시오. 비용은 얼마든지 들어도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요. 이곳에서 진행 중인 작업에 관한 지시가 필요하니 시간을 좀 더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이곳도 중요하니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케린도가 작업을 다 마쳤습니다.”
“아! 그래요?”
지난 12월에 현수는 포트녹스에서 가져온 금괴 8,350톤과 연방준비은행에서 꺼내 온 것 8,000톤, 그리고 지나 공상은행의 20개 지점 금괴보관소에 있던 2,300여 톤과 피터 로스차일드에게 팔려갔던 금괴 등을 꺼내놓은 바 있다.
약 20,000톤 정도 된다. 그때는 9,000억 달러 약 1,080조 원의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금값이 올라 지금은 1조 1,200억 달러나 된다. 한화로 환산하면 1,344조 원이나 된다.
몇 달 사이에 264조 원이나 번 셈이다.
2014년 대한민국의 예산은 약 355조 8,000억 원이다. 이것과 비교해 보면 74.2%나 된다.
앉아서 1년 예산의 4분의 3 정도를 벌어들인 것이다.
“그럼 한번 가볼까요?”
“네! 저를 따라오시죠.”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다.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20,000톤의 금 중 15,000톤은 10㎏짜리로, 나머지 5,000톤은 5㎏짜리로 제작하라고 했다.
10㎏짜리 금괴는 5만 6,000달러의 가치가 있다. 한화로 6,720만 원이다. 5㎏짜리는 이것의 절반이니 2만 8,000달러, 3,360만 원이나 한다.
그렇기에 아무 곳에나 보관할 수 없어 드워프들의 거처 가장 안쪽 창고에 넣어두었다. 그리곤 경비병까지 세웠다.
혹시 있을지 모를 도난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나이즐 빌모아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동안 여러 드워프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작업이 끝난 드워프들은 통로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누워 빈둥거리던 중이다.
그런데 장난스레 맥주를 달라고 했던 장로는 나이즐이 엉덩이를 걷어차며 주의를 주었다.
“이게 어디서 감히 지엄하신 분께……! 앞으론 농담 금지다. 알았어? 얼른 사죄드려!”
나이즐의 말이 떨어지자 농담했던 장로는 얼른 무릎을 꿇는다. 자존심 강한 것으로 유명한 드워프 일족이지만 족장의 명은 하늘같기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다.
“제가 감히 지엄하신 분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네! 용서합니다. 그러니 그만 일어나세요.”
말을 마친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맥주 한 파레트를 꺼내놓았다.
“이건 같이 나눠드십시오. 아이스!”
마나가 스며들자 미지근했던 맥주가 이내 시원해진다. 엉덩이를 걷어차인 장로는 나이즐에게 시선을 준다.
이건 전부 자신의 것이니 넘볼 생각 말라는 표정이다. 엄청 익살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족장께는 따로 드릴 테니 어서 가시죠.”
“네……? 아! 네에. 그, 그럼요. 근데 저 녀석에게 준 것보다는 많이 줘야 제 체면이…….”
“그럼요! 당연하죠. 세 배를 드릴게요.”
“세, 세 배요?”
한 파레트에 얼마나 많은 맥주가 올라가 있겠는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나이즐 빌모아의 입꼬리는 금방 위쪽으로 휘어져 올라간다.
“핫핫! 가시지요.”
나이즐과 현수가 코너를 돌자 뒤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그리곤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린다.
딱, 딱, 따딱! 따따따따딱!
뚜껑 따는 소리가 요란하다.
꿀꺽, 꿀꺽, 꿀꺽!
“캬아아! 크흐흐!”
“캬아! 그래, 이 맛이야!”
“우와아! 시원하다. 하나 더!”
‘잠자다 날벼락 맞는다’는 말이 있다. 근데 이건 ‘자다가 횡재’에 해당된다.
여기저기 누워 있던 드워프들이 벌 떼처럼 몰려든다.
파레트 위에 가득하던 캔맥주가 모두 비워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분일 듯싶다.
밖에서 한바탕 맥주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 현수는 창고에 쌓아놓은 금괴를 바라보고 있다.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금괴 겉면에 순도표시와 더불어 이실리프 그룹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로고 아래쪽엔 10자리 식별번호가 있다.
10㎏짜리 금괴는 0000000001부터 0001500000까지이고, 5㎏짜리는 0001500001부터 0002500000까지이다.
각각 150만 개와 100만 개다.
“우와!”
현수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엄청난 양에 압도된 때문이다.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있으면 더 꺼내십시오.”
“네……?”
현수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나이즐 빌모아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대꾸한다.
“요즘 케린도 그놈 노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배알이 뒤틀려서요. 기왕에 꺼내실 거면 아주 왕창 꺼내십시오.”
“아! 네에.”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말 나온 김에 어서 꺼내라는 몸짓을 한다.
“아공간 오픈!”
시커먼 구멍이 열리자 어깨 위의 아리아니가 묻는다.
[주인님! 저거 다 집어넣으실 거예요?]
[그래! 안에 공간 넉넉하지?]
[그럼요! 얼마든지 넣을 수 있어요.]
“입고!”
현수의 입술이 달싹이자 엄청나게 많은 금괴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넣는 건 다 넣었습니다. 꺼내놓는 건 어디에……?”
“아! 저를 따라오시죠.”
나이즐은 케린도 빌모아의 작업장 근처까지 안내한 후 텅빈 공간을 손짓으로 가리킨다.
“여기 꺼내놓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아공간 오픈! 출고!”
말 떨어지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양의 금덩이가 쏟아져 나온다. 히데요시가 남긴 순도 낮은 금화와 금덩이들이다.
눈짐작으로 무게를 헤아려 보니 10,000톤쯤 되는 듯하다.
“이것 중 절반은 5㎏짜리로, 나머지는 1㎏짜리로 제작하라고 하세요.”
5㎏짜리 100만 개와 1㎏짜리 500만 개를 만들라는 뜻이다. 이 정도면 한동안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금을 제련하여 순도를 높이는 것보다 정확한 무게를 갖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케린도 빌모아는 당분간 탱자탱자 하면서 놀지 못할 것이다.
“크흐흐! 케린도 그 녀석이 아주 좋아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도 금괴를 만들어준 공이 있으니 케린도 빌모아에게도 맥주를 주겠습니다. 아공간 오픈! 출고!”
이번에도 캔 맥주 한 파레트가 꺼내졌다.
아이스 마법으로 차갑게 냉각시킬 때 문이 열리고 케린도 빌모아가 들어선다.
시원한 맥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던 케린도 빌모아는 또 금괴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한숨을 쉰다.
양이 많아도 너무 많은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족장 전용 창고로 직행하여 맥주 세 파레트를 꺼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안주가 될 만한 과자도 잔뜩 꺼내주었다.
나이즐은 산더미처럼 쌓인 과자박스를 보며 너무 좋아서 어쩌지 못한다.
일전에 현수가 주었던 ‘대단한 나초, 도도한 나초, 눈을감자, 포카칩, 스윙칩, 오! 감자, 스윙칩 양파’ 등을 너무 맛있게 먹은 때문이다.
기왕에 주는 것이고, 자치령 건설에 애를 썼으며, 앞으로도 애를 쓸 존재이다. 하여 육포와 쥐포, 대구포, 오징어채 등도 꺼내주었다.
상할 수 있기에 나이즐 빌모아의 창고는 냉장 공간과 냉동 공간이 신설되었다. 냉장실은 2℃가 유지되도록 했고, 냉동실은 -20℃짜리 항온마법진이 설치되었다.
곁에서 현수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족장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너무도 간단히 모든 것을 처리해 낸 때문이다.
물론 마법의 힘이다.
밖으로 나온 현수는 밤늦도록 나이즐 빌모아와 이실리프 왕국 건설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곳을 만들어보자는데 의견이 일치되었기에 흔쾌한 기분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현수가 바실리로 돌아간 것은 아주 깊은 밤이다.
하지만 스타이발 후작을 비롯한 아카데미 교수진은 자지 않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오래간만에 보는 위저드 로드로부터 깨달음의 벽을 깨는 힌트를 얻고자 함이다.
전장의 학살자처럼 검을 다루는 이들은 그랜드 마스터로부터 한 수 배우길 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