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7
1장 뱀을 먹어?
“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
2층에서 아래층으로 계단을 딛고 내려서는 현수를 본 엘린 가가바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이 가난하고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의범절 따위는 밥 말아 먹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짐승에 가까울 정도로 무지한 사람도 있다.
학교가 없는 곳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그런 이도 상당히 많다.
한때 아프리카 대륙은 두 나라에 의해 거의 모두 점령당했다. 대부분이 영국령 아니면 프랑스령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령이었다.
이 밖에 영국령이던 나라는 가나, 시에라리온,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짐바브웨, 잠비아, 이집트, 수단, 남수단, 나이지리아, 보츠와나, 말라위, 모리셔스, 세이셸, 스와질란드, 레소토, 카메룬, 감비아, 소말리아, 리비아가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나라는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말리, 모리타니, 니제르, 차드, 지부티, 코트디부아르, 베냉, 세네갈, 토고, 카메룬, 가봉, 부르키나파소, 기니, 마다가스카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코모로이다.
이들 두 나라의 식민지 운영엔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영국은 식민지를 철저히 착취만 하고 발전시키지 않는 대신 완전한 독립이 가능하게 해줬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발전은 시켜주되 독립한 후에도 착취를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영국령도 프랑스령도 아니었다.
1880년대 초반부터 벨기에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나라의 식민지 운영 방법은 영국과 프랑스를 반반씩 섞은 것이다.
좋은 것만 섞여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은 나쁜 것만 섞여 있었다. 식민지인 동안엔 발전이 더뎠고, 독립한 후에도 착취가 이루어졌다.
어쨌거나 벨기에의 귀족들은 콩고민주공화국에 와서 하인이 갖춰야 할 예절만큼은 확실히 가르쳤다. 자신들이 대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엘린은 얼마 전부터 식민지 시절 귀족가의 시녀이던 사람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다. 주인님이 된 현수와 그의 아내, 그리고 부모님들을 최선을 다해 모시기 위함이다.
이는 남편인 피터스 가가바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엘린이 지금 보여주는 예절은 오래전 귀족 계급이 있었을 때의 시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르센 대륙에 있던 현수에겐 더더욱 친근하게 보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기에 헷갈려 하지는 않는다.
“아, 그래요. 아주 편했네요. 시원한 주스 한 잔 부탁해도 되죠?”
“어머! 그럼요. 물론이에요. 그런데 잠시 기다려 주셔야 해요. 그거 만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거든요.”
엘린은 현수 부부가 즐겨 마시는 쉐리엔 열매 주스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냉장고에 음식물은 넣어두면 아주 오랫동안 넣어두어도 안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일반 가정의 경우 보통 냉장실은 +5℃ 이하, 냉동실은 -18℃ 이하로 유지된다.
이때 쇠고기를 썬 것은 냉장 3∼4일, 냉동 6개월이 적정 보관 기간이다. 양념한 고기의 경우는 이보다 짧다.
닭고기는 냉장 2일, 냉동 2개월이다.
생선은 냉장 1∼2일, 냉동 3개월이며, 껍데기를 까지 않은 조개는 냉장 2일, 냉동 1개월이다.
국, 찌개, 반찬의 경우는 냉장 2∼3일, 냉동 1개월이 안전 기간이다. 이 밖에 채소와 과일도 유효 기간이 있다.
음식물의 종류에 따라, 조리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른 이 기간을 넘기게 되면 냉장고 속에서도 부패가 진행된다.
다시 말해 냉장고에 보관한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저택의 냉장고는 다른 것들과 달랐다.
항온마법진과 보존마법진이 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여 보통의 냉장고에 비하면 확연히 보존 기간이 길다.
예를 들어, 쇠고기 썬 것은 냉장 30∼40년, 냉동 600년이다. 닭고기는 냉장 20년, 냉동 200년이다.
식품 저장실이 있는 반지하 1층엔 대형 냉장고가 설치되어 있다. 여기엔 상당히 많은 양의 쉐리엔 열매가 있다.
누구든 먹어도 된다고 해서 사용인들도 가끔은 맛을 보지만 엘린은 주인인 현수 부부와 부모님들에게만 제공되도록 관리하고 있다.
이 밖에 현수 부부를 찾아온 손님에게도 준다. 하여 게리 론슨도 쉐리엔 주스를 맛본 바 있다.
게리 론슨은 본디 NSA 소속이었으나 CIA가 통제하는 인공위성을 사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파견 근무 중이다.
이 밖에 CIA의 국외 조직을 이용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어쨌든 론슨의 방문 이후에 찾아온 지나 통상부 국장보 왕리한도 달콤한 맛을 봤다. 다만 그를 수행한 비서진에겐 제공되지 않았다.
일본대사관 소속 참사관이라고 신분을 속인 일본중앙은행 외환담당팀장 가와시마 야메히토 역시 쉐리엔 주스의 기막힌 맛을 보았다. 하지만 비서진에겐 제공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쉐리엔 주스는 주인 부부를 찾은 주빈(主賓)에게만 특별히 제공되었다.
이것의 유일한 단점은 미리 만들어놓으면 맛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산화반응이 일어나면 떫은맛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하여 쉐리엔 주스는 마시고 싶을 때 바로 착즙하여 마셔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만드는 데 시간 걸리니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이다.
현수는 엘린을 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아요. 나는 집 바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올 테니까 천천히 해도 돼요.”
“네, 그럼 다녀오세요.”
엘린이 물러간 뒤 현관으로 다가가니 피터스 가가바가 환히 웃으며 맞이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미스터 가가바도 편히 쉬었습니까?”
“그럼요. 한국에서 가져온 침대가 너무나 편하더군요. 주인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결혼 후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는 저택의 가구와 가전제품 등을 교체했다. 기존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낡았거나 효율이 떨어져서이다.
가전제품은 당연히 한국산이고, 침대와 가구 역시 한국산이 제법 많다. 특히 ‘침대는 과학’이라고 광고하여 많은 초등생으로 하여금 헷갈리게 한 침대가 주종이다. 참고로 이 침대는 국산 브랜드이다.
부모님들에겐 매트리스가 있는 침대 이외에도 찜질 가능한 돌침대가 제공되었다.
저택의 것을 교체하면서 새로 건축한 피터스 가가바를 비롯한 사용인들의 집에도 들여놔 주었다.
모두들 기쁨에 겨운 환성을 질렀다.
한국의 가전제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구 역시 탄성을 지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밖에 식기와 침구도 마음에 쏙 들어 모두가 흐뭇해했다.
피터스 가가바는 이 중에서 침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대통령 경호실 요원으로 근무할 때 간혹 호텔에서 묵었다. 최고급 스위트룸은 아니지만 최고급 호텔의 룸이다.
물론 다른 나라 호텔이다. 그런데 그때 사용하던 그 어떤 침대보다 훨씬 더 안락했다.
매트리스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매일 오전 5시에 구현되는 바디 리프레쉬 마법진의 효능 때문이다.
덕분에 아무리 피곤했더라도, 아무리 많이 취한 채 잠들어도 오전 5시가 되면 말끔해진다.
이는 몸이 리셋(Reset)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숙면을 취하면 피로가 회복되고 면역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 또한 성장호르몬 분비량이 늘어 피부가 좋아진다.
뿐만 아니라 기억과 학습 능력이 20% 정도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쨌거나 피터스 가가바는 이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베풀어준 존재가 현수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앱솔루트 피델러티 마법의 효능이 극대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 지극한 충성심을 갖게 되었다.
“편히 쉬었다니 다행입니다.”
“모두 주인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가가바는 현수의 캐주얼한 차림을 위아래로 훑는다. 복장을 보면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충분히 짐작되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차를 타고 외부로 나갈 것은 아닌 듯싶다. 신고 있는 신발이 트래킹화이기 때문이다. 이건 등산보다는 쉽고 산책이라 하기엔 좀 힘든 경우에 신는 것이다.
“아! 후원을 좀 둘러보려고요.”
“후원이요? 그럼 호숫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거기보다 조금 더 나갈 겁니다.”
“어! 거긴 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뱀이요? 하하! 괜찮습니다.”
“괜찮기는요, 독사입니다. 여긴 병원이 멀어서 그놈에게 한번 물리면……. 그러지 마시고 우리 경호팀과 같이 나가시죠. 금방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미스터 가가바는 혹시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뱀은 한국인을 무서워합니다.”
“…뱀이 사람을 무서워해요?”
가가바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람이 뱀을 무서워하는 건 봤어도 뱀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해가 가게 설명해 줘야 한다.
“한국에 가면 생사탕이라는 게 있습니다.”
“생사탕이요? 그게 뭐죠?”
“살아 있는 뱀을 그대로 고아서 만든 탕입니다. 한국에선 건강에 좋다고 많이들 먹었죠.”
“네? 한국 사람들도 뱀을 먹어요?”
콩고민주공화국의 정글에선 먹을 게 없을 때 뱀을 잡아 구워 먹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렇습니다. 근데 너무 많이 먹어서 거의 멸종당할 지경까지 갔었지요. 그러니 우리 한국인을 보면 뱀이 무서워하지 않겠습니까?”
“……!”
조금 전 현수는 살아 있는 뱀이라고 했다. 고아서 탕을 만든다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걸 먹는다는 뜻 같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걸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 삼키는 장면을 상상한 가가바는 인상을 찌푸린다.
채 입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꼬리가 씹을 때마다 흔들리는 장면을 생각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현수는 자신의 농담에 가가바가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떤 상상을 하는지 짐작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경호원은 없어도 됩니다. 그럼 가요!”
현수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가가바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황급히 돌아선다.
그리곤 곧장 컴퓨터 앞으로 다가간다. 황급히 키보드를 잡아당긴 가가바는 한국의 생사탕을 검색해 본다.
모든 뱀이 생사탕의 원료로 쓰일 수 있는데 그중 셋에 관한 자료가 있다.
청사와 백사, 그리고 칠점사에 대한 것이다.
칠점사의 학명은 까치살모사이다. 맹독을 지녔으며, 물리면 일곱 걸음 만에 사망한다 하여 칠보사라도도 불린다.
백사는 백화현상을 겪은 능사(능구렁이)로 한국에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백발이 흑발로 변하며, 무병장수한다는 신비의 뱀이라 한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산삼 등을 먹고 몸에 열이 많아서 백사로 백화되었다고 하며, 몸의 열로 인하여 가끔 눈밭에서도 발견되며, 세포 노화 방지와 장수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청사는 푸른 빛깔을 띤 뱀으로 지난 2,000년에 충북 괴산에서 잡힌 게 유일하다. 백사보다 훨씬 귀한 것으로 이것 이외엔 잡힌 기록이 없다.
가격 순으로 따지면 청사〉백사〉칠점사로 되어 있다.
“뱀이 정력에 좋아?”
생사탕에 관한 내용 중 정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피터스 가가바의 눈이 번쩍 뜨인다. 나이가 들어가는 사내이기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엘린 가가바를 비롯한 저택의 시녀들은 한국산 헤어샴푸와 바디샴푸, 그리고 미용 비누를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듀 닥터와 각종 미용 용품을 제공 받는다.
저택 창고에 이런 것이 상당히 많이 쌓여 있다.
예전에 현수가 꺼내놓을 것으로 백두마트 서초점 등에서 털어온 것이다. 수천 명이 사용해도 될 정도로 많으니 아낌없이 제공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요즘의 엘린은 청결하며 향기롭다. 게다가 섹시하기까지 하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의 영향을 받아 패션도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