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8
전에는 퇴근 후 집에 가보면 똑같은 낡아빠진 원피스만 입고 있었는데 요즘은 네글리제 차림일 때가 많다.
게다가 안쪽엔 야시시한 란제리를 걸치고 있다.
하여 말로 형용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느낄 때가 많다. 가가바의 눈엔 엘린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밤이 두렵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밤이 무서운 남자가 되어버린 때문이다.
열심히 체력 단련을 하고 영양가 많은 음식을 먹으려 애쓰지만 상관관계가 별로인지 효과가 미미한 듯싶다.
그런데 생사탕이 정력에 좋다니 입맛을 다시며 스크롤바를 내린다. 혹시 제조법이 있나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여 한국의 웹사이트를 읽어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한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내용이 뒤죽박죽된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나직이 투덜거린 가가바는 뱀을 이용한 요리를 검색했다. 지나와 베트남에서도 뱀을 요리하는데 거의 모두 튀기는 것이다. 필리핀에서는 뱀으로 국을 끓여먹는데 정력에 좋다는 글귀가 보인다.
얼른 펜을 꺼내서 메모하던 가가바는 쓰던 것을 멈췄다. 만들 수는 있어도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피터스 가가바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난 아프리카인이다. 하지만 정글 속의 미개인은 아니다.
대학까지 교육을 받았으니 나름 엘리트 그룹에 속한다. 그렇기에 필리핀의 뱀국 이미지를 보곤 더 이상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생사탕이 이러하다면 한국 또한 필리핀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에이! 설마 이렇지는 않겠지’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택에 들어와 있는 각종 한국산 제품들을 보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쨌거나 가가바가 뜬금없이 뱀에 관해 검색하고 있을 때 현수는 후원의 호숫가에 당도해 있었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근처에 뱀 있어?”
“잠깐만요!”
앙증맞은 날갯짓으로 허공을 훨훨 날던 아리아니가 되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5분 정도 된다.
현수는 호수 가운데 조성되어 있는 자그마한 섬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와 정원사들의 노고가 느껴져서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섬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끊긴 때문이다.
다음번에 왔을 땐 일부분만 깨끗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모두 손질이 된 듯하다.
그런데 누군가 움직이고 있다.
“어라?”
안력을 높인 현수는 정원용 장갑을 낀 사람이 연희의 모친인 강진숙 여사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장모님이 왜……?”
지금은 오전 6시 경이다. 그런데 훨씬 일찍부터 나와서 일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강 여사 근처에도 사람들이 있다. 저택의 정원사들이다.
“이런 새벽에……. 고생하시는구나.”
강진숙 여사는 연희의 바통을 이어받아 저택 관리에 힘쓰는 중이다. 이 저택의 관리책임자가 연희이기 때문이다.
딸이 없는 사이에 섬 내부를 깨끗이 청소함과 동시에 그럴듯한 휴식처로 꾸미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전원주택 같은 모던 하우스가 건립되어 있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 시원한 실내에서도 바깥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모던 하우스의 현관 위에는 ‘HAYRA’라고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현판 비슷한 것이 걸려 있다.
“응? HAYRA? 저건 무슨 뜻이지?”
문득 현수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다.
태국의 신화를 다룬 고문헌에는 Hayra를 악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악어가 아니라 용과 비슷한 모양이다.
연희는 명문대 출신이다. 하지만 태국의 전설까지 섭렵할 정도는 아니다.
하여 대체 무슨 뜻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건 Hyun soo And Yeon hui’s Rest Area’의 줄임말이다. ‘현수와 연희의 휴식처’라는 뜻인데 이니셜만 써놓았으니 머리 좋은 현수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다.
“호수에 악어가 있는 건가? 그럼 안 되는데.”
현수 본인이야 악어가 수십만 마리가 있어도 상관없다. 드래곤 피어를 구현시키면 알아서 도망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악한 본성을 버리지 못해 위협을 가하면 모조리 죽여서 악어가죽 핸드백의 원료로 팔아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희와 장모, 그리고 저택의 정원사 등은 한 마리만 쫓아와도 혼비백산할 것이다.
일에 열중하고 있다가 자칫 화를 당할 수도 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즉시 마법을 구현시켰다.
“와이드 센스!”
샤르르르르릉―!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가 엷은 안개처럼 사방으로 뻗어간다. 그와 거의 동시에 주변의 모든 생물체에 대한 정보가 입력된다.
호수 내에 생명체가 있기는 하다. 집중하여 살펴보니 2m 정도 되는 놈이 넷이나 있다.
“흐음, 악어인가?”
아직 어린 악어라 할지라도 자라면 위협이 된다.
“아이스 애로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굵은 창 이십여 개가 생성된다.
“발사!”
슈아아악! 쌔에엑!
풍덩! 퐁! 출렁!
이십여 개의 얼음창이 호수 가장자리의 무성한 풀 속으로 파고든다. 뭔가 이상한 것이 다가옴을 느낀 생명체들은 일제히 풀숲으로 파고든다.
“체인 라이트닝!”
번쩍, 번쩍, 번쩍, 번쩍―!
파직, 파지직, 파지지직―!
번개가 쏘아져 가자 맹렬한 속도로 풀숲을 파고들던 생명체 넷의 움직임이 멈춘다. 강력한 번개를 맞고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뱀이었군. 다시! 와이드 센스!”
또 한 번 수면 아래를 살폈다. 그런데 고인 물이라 그런지 혼탁해서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럴 때 써먹을 존재가 있다. 물의 최상급 정령이다.
“엘리디아! 근처에 있어?”
마나에 의지를 실어 보내자 잠시 후 응답이 왔다.
“…부르셨사옵니까, 마스터?”
아리아니와 함께 있다 왔을 것이다.
“그래. 여기 이 호수 속에 악어가 있는지 확인해 줄래?”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잠시만…….”
엘리디아는 수면 아래로 스며든다. 잠시 수면 전체가 찰랑였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오대양 육대주의 모든 물을 모두 관장하는 존재가 엘리디아이다. 이 밖에 구름이 머금고 있는 수분까지 컨트롤한다.
지난 3월 18일에 엘리디아는 엔다이론인 상태였다. 최상급으로 진화하기 전이다.
그때 북경에 엄청난 양의 비를 뿌리게 했다. 지독하던 대기오염을 씻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사흘 동안 쏟아진 비의 총량은 약 3,000㎜였다. 북경 전체를 3m 높이로 뒤덮을 어마어마한 양이다.
북경의 연간 강수량은 600㎜ 정도이다.
게다가 한국처럼 집중호우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비가 좀 오더라도 여름철에 조금씩 내리다가 마는 정도이다.
내륙인데다 강수량이 적어 딱히 배수 시설이라는 것이 필요하지도 않은 곳이다.
이처럼 강수량은 적지만 인구와 공장이 많기에 북경을 비롯한 중북부 지역 대부분은 공업용수는 물론이고 식수조차 부족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하수를 끌어올리지만 수량이 풍부하지 못한데다 환경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하여 지나 정부는 ‘남수북조(南水北調)’ 사업이란 걸 계획했다. 1950년대부터 추진해 온 수자원 확보정책의 일환이다.
이 중 내륙에 물길을 내어 수량이 풍부한 양자강의 물을 북쪽에 위치한 황하강으로 보내는 작업이 있다.
남수북조 동부선 1기 사업이며, 최근에 완공되었다.
총 길이 1,467㎞짜리 수로를 통과한 물은 강소성과 안휘성, 그리고 산동성에 위치한 71개 시까지 공급된다.
이 수로를 통해 연간 87억 7,000만㎥의 물이 공급되므로 약 1억 명이 혜택을 입게 될 예정이다.
그런데 북경의 전체 면적은 약 1,040㎢이다.
이 넓은 면적 전체를 3m 높이로 뒤덮으려면 약 31억 2,000만㎥의 물이 필요하다.
애써 만든 수로를 통해 1년간 공급할 총량의 약 35%가 단 사흘 만에 쏟아진 것이다.
어떤 일이 빚어졌겠는가!
느닷없는 홍수로 북경은 비롯한 여러 도시가 그야말로 처참하다 해도 좋을 피해를 입었다.
인간에겐 재앙이었지만 이 일을 야기한 엘리디아에겐 별로 큰일이 아니다. 본인이 관장하는 물 중 극히 일부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면 아래로 스며든 엘리디아가 다시 나온 것은 불과 1분 후였다. 10초도 안 걸릴 일이지만 현수의 명인지라 샅샅이 뒤지느라 잠시 지체된 결과이다.
어쨌든 수면 위로 나온 엘리디아는 공손히 고개 숙이며 보고한다.
“마스터, 물속엔 물고기와 같은 수중 생물만 있을 뿐 악어나 아나콘다처럼 사람에게 해를 끼칠 존재는 없사옵니다.”
“…그래?”
엘리디아의 보고는 100% 사실일 것이다. 정령은 거짓말을 못하며, 현수에 대한 충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수면 가장가리 수풀 속에 죽어 있는 뱀이 네 마리 있사옵니다. 마스터께서 그러신 거죠?”
“그래, 없다니 다행이야. 참, 호수 물이 조금 혼탁한데 맑게 할 수 있지?”
“물론 가능하옵니다. 그리해 드릴까요?”
엘리디아는 다른 정령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완연히 사극 투이던 말이 조금 달라지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도 들을 때마다 오글거리기는 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용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이 너무 맑아도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들었어.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물속이 환히 보이는 정도면 괜찮으니 손 좀 봐줄래?”
현수는 1급수와 2급수의 중간쯤을 기대했다.
1급수는 여과 등에 의한 간이 정수 처리만으로도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아주 맑은 물이다.
2급수는 비교적 맑은 물로서 침전·여과 등의 일반적 정수 처리를 해야 식수로 사용 가능하다.
수영이나 목욕이 괜찮은 건 2급수까지이다.
현수가 1.5급수를 생각한 이유는 물속에서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걸 보고 싶기 때문이다.
“명에 따르옵니다, 마스터. 지금 당장 그리할까요?”
엘리디아는 현수의 명만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입수하여 작업을 개시할 태세이다.
“아니. 일단 이 근방에 악어나 아나콘다, 혹은 인간에게 해를 끼칠 짐승이 있는지부터 먼저 확인해 줘.”
“그런데 너무 막연하옵니다, 마스터.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해주시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그럼 이 호수를 중심으로 해서 반경 3㎞를 훑어줘.”
“그럼 약 28㎢군요.”
원래부터 지구에 있었고 오랫동안 존재한 정령이라 그런지 인간의 도량형도 제법 아는 모양이다.
“그래. 시간이 오래 걸릴까?”
“아뇨. 수색만 하는 것이면 금방 끝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있으면 어찌하옵니까?”
“…죽이진 말고 그냥 멀리 쫓아줘. 참, 이 근처에 얼씬하지 않도록 주의도 주고. 알아들으려나 모르겠지만.”
엘리디아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존재감으로 멀리 쫓아낸다 하더라도 이곳에 먹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본능적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악어와 아나콘다는 아마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럴까? 그럼 놈들을 한곳으로 몰아줘.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건 가능하지?”
“그럼요! 싹 다 모아놓겠사옵니다.”
말을 마친 엘리디아는 한시라도 빨리 마스터의 명을 이행해야 한다는 듯 서둘러 사라진다.
잠시 엘리디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현수는 플라이 마법을 써서 하늘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2장 이실리프 가든
“저기부터 저기까지는 의료원, 저기는 테마파크, 그리고 이쪽을 바이롯 농장으로 쓰면 되겠군.”
현수가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 매입 의사를 밝힌 토지는 20㎢이다. 한국식으로 환산하면 약 600만 평이다.
마포구보다 조금 작은 이곳은 분할되어 여러 용도로 사용될 예정이다.
이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건 바이롯 농장이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여느 정원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인간이 만든 세계 최고의 정원은 싱가포르 남단 ‘마리나 베이’ 간척지에 조성된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