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0
제프는 정밀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안타깝게도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는 골수에서 악성의 성숙하지 않은 백혈구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병이다.
즉시 항암 치료에 돌입했는데 약이 듣지 않았다.
게다가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면역력이 떨어지자 감염에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건강한 사람에겐 감기로 그칠 것이 치명적인 폐렴으로 진행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항암 치료로 인해 혈소판 수치가 감소되면서 출혈이 발생되었다. 이게 심해지면 과다 출혈로 인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국정 때문에 동반 출국을 할 수 없던 가에탄 카구지는 매일매일 아내와 통화하면서 상황을 체크했다.
그러는 한편 제프를 치료해 줄 방안을 모색했다.
내무부 직원들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미국 최고의 병원에서도 손을 놓았으니 콩고민주공화국 의사들의 능력으론 어쩔 수 없다.
하여 뛰어난 이적을 보인 주술사를 집중적으로 수배했다. 이곳은 병원보다 주술을 더 신뢰하는 아프리카이다.
하지만 주술사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에 관해 알게 되었다.
가에칸 카구지 역시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몹시 떠들썩하던 일이라 이곳까지 전해진 것이다. 듣기는 하였으되 관심을 가지지 않은 건 가족 중에 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처럼 상세한 내용이 보도된 것이 아니라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코리안 빌리지에 성자가 나타났다는 걸 과장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어쨌거나 에티오피아의 신문기사와 방송 내용을 확인해 보니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는 한국인이다. 그리고 뾰족한 침 몇 개로 못 고친 병이 없다.
우선 불치병으로 알려진 녹내장이 말끔해졌다.
난치병인 베세트병 역시 완치되었다.
이 밖에 희귀 질환인 고셔병과 파킨슨병 또한 치료되었다.
최종적으로 치료한 건 진폐증이다. 이것 역시 난치병이다.
현장에서 치료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을 확인한 카구지 장관은 황급히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를 찾았으나 이미 떠나고 없었다.
하여 안면이 있는 에티오피아 고위 관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로마우 바이할 의무장관이다.
가에탄 카구지는 사정을 설명하고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와 연결해 달라는 청을 넣었다. 그런데 의아하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다음은 통화 내용 중 일부이다.
“장관님,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와 연결을 해달라니요?”
“네! 정말 급해서 그럽니다. 연락처라도 주시면 우리가 알아서 그분께…….”
카구지 장관의 말은 중간에 끊겨야 했다. 바이할 장관이 치고 들어온 때문이다.
“미스터 킴은 장관님이 소개하셨잖습니까?”
“미스터 킴이요?”
“네, 천지약품 공동대표인 미스터 킴! 그 사람이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예요. 설마 모르셨어요?”
“……!”
이 통화는 어젯밤 늦은 시각에 이루어졌다. 로마우 바이할 의무장관이 공식 행사를 마치고 늦게 귀가한 때문이다.
어쨌거나 통화 후 가에탄 카구지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밤새 서성였다. 그러는 동안 미국에 있던 제프와 아내는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다.
어차피 고치지도 못한다니 주술사의 힘이라도 빌리려고 귀국하도록 한 때문이다.
카구지 장관은 날이 밝자마자 총알처럼 튀어왔다. 오늘 현수가 출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쳐주게. 못 고친 병이 없지 않은가! 응? 근데 백혈병도 가능한 건가?”
가에탄 카구지의 시선엔 간절함이 배어 있다.
“…제프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조, 조금 있으면 당도할 것이네. 헬기로 실어올 것이야. 근데 의, 의료도구는? 뾰족한 침 말이네.”
혹시라도 침이 없어 고쳐줄 수 없다는 말을 들을까 겁난다는 듯 두 손을 비빈다. 땀이 배어 있는 듯 보인다.
“준비할게요. 좀 진정하세요.”
말을 마친 현수는 곁에 있는 인터컴을 눌러 알리사로 하여금 쉐리엔 주스를 내오도록 했다.
“고, 고맙네. 정말 고맙네.”
카구지 장관은 고개까지 숙여 보인다. 제프를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이 된다.
“장관님! 진정하시고 마음을 차분히 가지세요. 저는 준비를 하겠습니다.”
“고, 고맙네.”
카구지는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인다. 얼마나 절실한지 짐작되는 모습이다.
접견실 밖으로 나온 현수는 그럴듯한 진료실을 꾸며야 했다. 먼저 아공간에 있는 마사지용 테이블을 꺼냈다. 소독용 알코올과 탈지면, 그리고 침도 꺼내서 정렬시켰다.
창고로 쓰일 예정이던 작은 방이 졸지에 진료실로 바뀌었다.
똑, 똑, 똑―!
“네에!”
“주인님, 내무장관님의 영식 제프가 도착했습니다.”
“환자용 침대예요, 휠체어예요?”
“휠체어입니다.”
“그럼 이쪽으로…….”
“네, 알겠습니다.”
이내 문이 닫히고 피터스 가가바가 뛰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긴 복도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안면 있는 내무장관 경호팀 요원으로부터 상황을 전달 받은 때문이다.
본인을 이곳에 배속시킨 장본인이 가에탄 카구지 장관이다. 처음엔 대통령궁을 떠나 한직으로 밀려나는 느낌이라 속으론 투덜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곳으로 보내준 것이 너무도 고맙다. 그렇기에 은혜를 갚는 기분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
파루루룩―! 촤르르르륵―!
휠체어를 밀고 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문을 열어두었다.
“여, 여기 왔습니다.”
휠체어엔 맥이 빠진 소년 하나가 앉아 있다. 아무런 작용도 못한 항암 치료와 오랜 비행에 몹시 피곤한 듯하다.
“제프라고 했지?”
“……!”
대답할 기력조차 없는지 대꾸 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제프야, 혼자서 일어설 수는 있어?”
“네, 일어설 수 있어요.”
“그럼 여기 와서 누워볼래?”
제프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기력이 쇠한 듯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이때 제프의 모친, 다시 말해 가에탄 카구지 장관의 아내가 들이닥쳤다. 가가바가 휠체어를 빼앗듯 낚아채 황급히 뛰어가자 뒤따라온 것이다.
곧이어 경호원들 또한 달려온다. 이때 장관의 부인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연다. 이곳에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가 있으며 동양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 성자님! 우, 우리 제프를…….”
“네, 장관님께 들어서 압니다. 지금부터 치료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밖에 계셔주시겠습니까?”
“우, 우리 제프가 나, 나을 수 있는 거죠?”
“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현수는 말을 잇지 않고 장관의 아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눈빛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물러난다.
“미스터 가가바, 이곳에서 중요한 일을 할 겁니다.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니 방해받지 않도록 문 앞에 있어주세요. 지금부터 어느 누구의 출입도 금합니다.”
“네, 주인님!”
“장관님이라 할지라도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됩니다. 아차 실수하면 천추의 한이 될 수도 있음을 말씀드리십시오.”
“네, 주인님. 그럼…….”
피터스 가가바는 밖으로 나간 후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다가오는 가에탄 카구지 장관의 모습이 보였으나 무시하고 시선을 돌렸다.
예를 갖추는 것보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제프야, 비행기 타고 오느라 많이 힘들었어?”
“…네에, 조금요. 그래서 피곤해요.”
“그래? 그럼 조금만 잘래?”
“…저 아프게 안 하실 거죠?”
테이블 곁에 준비해 놓은 여러 종류의 침에 시선을 둔 채 한 말이다. 장침은 너무 길어 보이고 피침과 참침은 보는 순간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에서 이미 고통을 당할 만큼 당하고 왔다. 처음엔 각종 검사를 하며 온갖 고통을 주었다. 그때 찔린 주사바늘 수가 이십이 넘는다. 찔릴 때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정맥주사를 놓겠다며 잘 잡히지도 않는 혈관을 이렇게도 찔러보고 저렇게도 찔렀다.
그때마다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제프는 병원을 믿지 않는다. 아니, 병원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한다.
매번 하나도 안 아프게 해준다고 했지만 아프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제프는 현수가 긍정적인 답변을 해도 또 아플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런 속내를 모르기에 현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하나도 안 아플 거야.”
“……!”
제프의 눈에서 불신의 빛을 느낀 현수는 눈빛을 반짝였다.
“만일 제프가 아프면 내가 아주 맛있는 거 사줄게.”
“맛있는 거요?”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정말 맛대가리 없는 음식만 먹었다.
사탕도, 아이스크림도, 과자도, 초콜릿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맛있는 걸 사준다니 관심이 가는 듯하다.
“그래, 조금이라도 아프면 맛있는 거 많이 줄 테니까 조금만 자. 알았지?”
제프와 눈높이를 맞춰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약속하자는 것이다.
제프 입장에선 밑져야 본전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웃는 낯으로 새끼손가락을 걸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슬립!”
샤르릉―!
말 떨어지기 무섭게 제프가 고개를 떨군다. 조심스레 눕혀놓고 신발을 벗겼다. 작은 발이 드러난다.
“마나 디텍션!”
샤르르르릉―!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가 제프의 체내로 스며든다. 그리곤 현재의 몸 상태에 대한 보고를 시작한다.
우선 정상인에 비해 마나 농도가 형편없이 낮다.
정상인이라 하더라도 아르센 대륙인과 지구인을 비교해 보면 거의 20 : 1 정도로 희박하다.
이를 면역력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면 아르센 대륙 사람들이 지구인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프는 그렇게 거의 없는 지구인의 20분의 1 정도밖에 마나가 없다. 아르센 쪽과 비교해 보면 400분의 1이다.
이쯤 되면 아주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몇몇 곳에 집중적인 문제점이 있는 게 아니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이다. 이 상태라면 오래지 않아 목숨을 잃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흐음! 상당히 진행된 모양이군. 일단 마나포션이 필요해. 아공간 오픈!”
삼각플라스크에 든 마나포션 반병을 조심스레 먹였다. 아직 아이인지라 한 병을 다 먹이는 건 과하기 때문이다.
잠시 마나포션이 체내로 스며들도록 기다려 주었다.
“마나여, 모든 걸 원상으로……!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눈에 보이지 않는 서늘한 마나가 제프의 체내로 스며든다. 그러자 마나포션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저하된 신체 기능을 하나하나 되살리기 시작한다.
제프가 걸린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Acute lymphoblastic, ALL)은 림프모구가 과다해지는 암이다.
이로 인해 골수 안에서 정상적인 세포가 손상을 입어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나포션은 먼저 체내의 기력을 획기적으로 상승시켰다.
리커버리 마법은 손상된 세포 및 장기들의 망가진 회로를 수리하여 정상 작동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약 20여 분이 흘렀다.
“마나 디텍션!”
다시 한 번 제프의 체내로 마나가 스며든다. 아까완 달리 막힘없이 쑥쑥 지난다.
“흐음! 다행이군.”
현수가 최종적으로 중얼거린 말이다.
“바디 리프레쉬! 어웨이크!”
샤르르릉―!
두 줄기 마나가 제프의 체내로 스며든다.
바디 리프레쉬 마법은 체내에 축적된 피로 물질을 순식간에 분해해 버렸다.
“하으음!”
하품과 동시에 눈을 뜬 제프는 잠시 눈을 깜박인다. 무엇을 하는 중이었는지를 떠올리려는 것이다.
“제프, 잘 잤어?”
“…아, 성자님.”
제프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누구에게 치료를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히 신성한 사람을 만나게 됨을 알려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제프는 현수가 코리안 빌리지의 성자라고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