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83화 (982/1,307)

# 983

문 앞에서 스테파니가 한 말이다.

기장과 승무원인 윌리엄과 스테파니는 이 공항에 있는 호텔에 머물 예정이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목적지는 모스크바라는 거 알지?”

“그럼요. 준비해 놓을게요. 근데 다음번 기내식은 뭐로 준비할까요?”

“라클레테와 퐁뒤 어때?”

라클레테는 삶은 감자에 녹인 치즈로 맛을 낸 것이며, 퐁뒤는 긴 꼬챙이에 음식을 끼운 뒤 녹인 치즈나 소스에 찍어먹는 것이다. 둘 다 스위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네, 준비해 놓을게요.”

스테파니는 환한 웃음으로 현수를 배웅했다.

4장 높아진 위상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이든 호텔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든 호텔은 현수가 이곳 노보로시스크에 처음 왔을 때 머물던 곳이며, 이리냐가 되지도 않는 육탄공세를 펼치려다 슬립 마법 한 방에 곯아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샤실릭과 삘메니, 그리고 샤우르마와 블린, 보르쉬, 솔랸카, 흑빵 등을 먹어본 곳이기도 하다.

택시는 쉼 없이 달려 현수를 목적지에 내려놓고는 휑하고 가버렸다.

기사는 현수의 러시아어가 너무나 유창하여 외국인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한 듯 별다른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어떻게 오셨는지요?”

“숙박하려구요.”

“아, 그렇습니까? 저희 호텔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에 한번 오시지 않았습니까?”

“네, 왔었지요. 작년 7월에 왔는데 절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하지요. 이렇게 다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 머무셨던 룸이…….”

잠시 말을 끊고는 모니터를 바라본다. 손님들에 대한 무언가를 메모해 둔 듯싶다.

“아! 지르코프 사장님의 손님이셨군요. 전에 머무시던 방을 다시 쓰시겠습니까?”

“그러지요.”

현수가 건넨 여권을 받은 안내 직원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뭔가를 입력하곤 곧바로 카드키를 꺼내 든다.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네, 그래주십시오.”

현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안내 데스크에서 나와 앞장선다.

“그런데 짐이 없으십니다.”

“네, 하루만 머물고 모스크바로 가야 해서요.”

“아, 그러십니까? 이곳에 오실 땐 어느 항공을 이용하셨는지요?”

현수는 이 호텔의 VVIP로 등록되어 있다.

귀빈이 어떤 항공사를 이용하는지를 알면 조금 더 나은 서비스를 할 수 있기에 물은 말이다.

“자가용을 타고 왔지요.”

“…자가용이요?”

보아하니 기종이 뭔지 궁금해하는 것 같다. 이쯤 되면 몇 마디 더 한다 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에어리언 슈퍼소닉(Aerion SuperSonic)이라는 겁니다.”

“네? 그, 그게 손님의 자가용이란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호텔에서 근무하지만 이 직원의 꿈은 비행기 조종이다. 하여 놀랍다는 표정이다. 현수의 자가용 제트기가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860억 원짜리 자가용을 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네, 그래서 짐은 없어요. 거기에 다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잠시 후 현수를 스위트룸까지 안내한 안내 데스크 직원은 깍듯하게 예를 갖춘다.

“편히 쉬십시오, 손님! 저희가 지르코프 사장님께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그래줄래요?”

지르코프를 만나기 위해 왔으니 마다할 일이 아니다. 현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웃는다.

지르코프에게 귀빈이 왔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큰 점수를 따는 게 되기 때문이다.

“참, 이거…….”

현수는 지갑 속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넸다. 100달러짜리이다.

외국 화폐라곤 이것밖에 없어서 건넨 것이다.

“…감사합니다, 손님!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통 큰 손님이라 생각한 안내 데스크 직원은 얼른 받아 챙기며 고개를 조아린다.

안내 데스크 직원의 급여는 월 18,000루블이다. 한화로 약 70만 원이다. 그런데 100달러를 팁으로 받았다.

고작 방까지 안내해 주고 문을 열어준 게 전부이다. 그렇기에 즉각 감사 표시를 하는 것이다.

객실 안으로 들어선 현수는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리냐가 처음 미스트르 킴(Мистер Ким)이라 부르던 때가 생각난다.

다니던 학교의 등록금을 내기 위해 자신의 처녀성을 팔겠다고 나왔던 날이다. 그때 대학을 졸업하면 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이미 그 꿈을 이룬 것 같다.

쉐리엔이라는 전 세계적인 히트상품의 광고모델이 되었으며, 그에 못지않은 이실리프 어패럴의 항온의류 모델로도 활동 중이다.

현재는 기획단계에 있지만 조만간 지현과 더불어 슈피리어 듀 닥터의 메인모델로 활동하게 된다.

국내용 브로셔와 CF엔 지현이 등장하지만 해외용 브로셔엔 이리냐가 메인 모델이다. 그 결과 세계적인 탑 모델인 미란다 커나 지젤 번천보다도 훨씬 더 유명해진다.

당연히 섭외 문의가 끊이지 않게 되지만 대부분 거절한다. 그런 걸 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수의 곁에 머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리냐의 몸값은 점점 더 높아만 간다. CF 제의를 거절하는 걸 일종의 신비주의 전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리냐가 광고한 상품은 모두 공전절후한 대히트 상품이다. 그리고 모두가 세계 유일의 제품들이다.

항온의류와 쉐리엔, 그리고 슈피리어 듀 닥터와 똑같은 제품을 만들려는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만들어낼 수만 있으면 돈 방석에 앉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심한 곳이 지나이다.

짝퉁의 왕궁답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집요하게 세 상품과 똑같은 것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들 셋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 없는 물질이거나 마법진이 없으면 효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한국으로 수많은 산업 스파이가 들어온다.

그 결과 이실리프 어패럴과 이실리프 메디슨, 그리고 태을제약 연구실로 숨어들다 잡힌 산업 스파이의 수만 300여 명을 상회하게 된다.

이쯤 되면 이들 세 상품은 복제 불가능이라는 판정을 내리고 포기할 만도 한데 지나에선 그러지 않는다.

더 많은 산업 스파이를 파견하는 한편, 유사 상표까지 만들어 짝퉁을 판매한다.

항온의류의 경우 제조원 ‘이실리프 어패럴’이라는 태그가 붙어 있다. 이걸 ‘이실러프 어패럴’이라는 상표를 붙여 판다.

물론 거의 유사한 이실리프 그룹의 로고가 들어가 있다.

쉐리엔은 ‘숴리엔’이란 유사 상품이 만들어지고, 슈피리어 듀 닥터는 ‘슈피리어 듀 닥텨’라는 비슷한 이름의 화장품이 만들어진다.

셋 다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상품들인지라 사람들은 얼씨구나 하고 산다. 그런데 짝퉁이 괜히 짝퉁이겠는가!

모두들 형편없는 품질에 울화통을 터뜨리게 된다.

그 결과 ‘메이드 인 지나(Made in China)’의 악명은 또 한 번 전 세계로 번져간다.

어쨌거나 이리냐가 광고한 상품들은 모두 세계 1위 제품들이다. 그 결과 이리냐의 지명도는 세계 최고이다.

북한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알아볼 정도이다.

따라서 어떤 상품이든 이리냐가 나서기만 하면 엄청난 매출신장이 기대되기 때문에 섭외문의가 빗발치는 것이다.

“후후!”

이리냐가 누워 있던 침대를 본 현수는 실소를 머금는다. 아침에 깨어나 당황하던 그때의 표정이 너무도 귀엽다 느껴진 때문이다.

전날 밤 이리냐는 육탄돌격이라도 하여 현수와 썸씽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기로 하고 지르코프에게 거액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여 샤워 후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가운만 걸치고 나왔다. 그런데 현수의 슬립 마법 한 방에 잠만 잤다.

아침이 되자 사색이 된 이리냐는 이렇게 말했다.

“사, 살려줘요. 그냥 나가면 난 죽을지도 몰라요. 흐흑! 미스트르 킴, 제발, 제발……! 흐흑, 흐흐흑!”

돈은 많이 받았는데 아무 일 없이 호텔을 나가면 그 즉시 머리에 바람구멍이 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로 인한 눈물이었다.

그때 현수는 이렇게 말하며 다독였다.

“이리냐, 지난밤에 아주 즐거웠어. 이리냐 덕분에 러시아에서의 밤이 아주 기분 좋았거든. 언제 이곳에 또 올지 모르지만 그때도 다시 봤으면 좋겠는데… 그때도 지르코프에게 연락하면 되지?”

그날의 일이 인연이 되어 현재는 사랑하는 아내가 되어 있다.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이리냐를 못 본 지 꽤 되었군.”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커튼을 젖히고 창밖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이곳은 흑해 북쪽 해안 캅카스반도의 체메스만(灣)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있는 항만도시이다.

밀의 수출항으로 유명하며, 해군기지와 조선소, 그리고 냉동 공장과 곡물 창고, 송유관 터미널 등이 있다.

최근 러시아의 경기가 살아나서 그러는지 활기차 보이는 도시이다. 도로 위를 분주히 오가는 트레일러들을 보던 현수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이실리프 그룹의 로고가 그려진 컨테이너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보나마나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수출한 항온의류가 실려 있을 것이다.

지르코프는 항온의류 샘플을 처음 보는 순간 히트 상품이 될 것임을 단숨에 확신했다.

그렇기에 1차로 주문한 물량만 8,000만 벌이다.

수출 단가가 8만 원이니 무려 6조 4천억 원어치를 한꺼번에 주문한 것이다.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이실리프 무역상사로 넘기는 가격은 벌당 74,000원이다. 한 벌에 6천 원이 이득이다.

따라서 이실리프 무역상사는 수출 업무를 대행하는 대가로 무려 4,800억 원이나 번다. 현수를 제외한 임직원이 불과 26명인 회사이니 일인당 수익이 어마어마하다.

현수의 친구이자 복합운송주선업체 신세계마리타임의 사장인 김상렬도 돈을 번다.

지앙뤼지 아폰세 사장의 컨테이너 선사인 MSC사와 세바스티앙이 경영하는 프랑스 CMA사의 화물선을 이용하여 수출하면서 수수료를 받기 때문이다.

생산업체인 이실리프 어패럴도 당연히 이득을 취한다.

제 비용을 제하고 나면 벌당 8,000원이 순이익이니 무려 6,400억 원이 남는 장사이다.

현재에도 이실리프 어패럴의 박근홍 사장은 지르코프 상사에서 주문한 물량을 맞춰주려고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조만간 2차 주문이 있을 것이며, 이번엔 2억 벌이 주문 물량이다. 무려 16조 원어치를 더 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항온의류의 주문은 늘어나게 될 것이다.

쉐리엔의 유럽 판매권을 드모비치 상사에게 주었듯이 항온의류의 유럽 총판이 지르코프 상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이다.

하나는 지르코프를 만나기 위함이다.

지르코프 상사에게 유럽 판매권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장본인은 지르코프이겠지만 실상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를 돕기 위함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을 지배하던 서열 2위가 스스로 굴복했으니 더 이상 이룰 게 없어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아니하다.

마피아는 늘 끊임없는 피의 투쟁 속에서 생존해 왔다.

지금은 모두가 이바노비치 앞에 납작 엎드려 있지만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도발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현수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지르코프는 야망이 크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본시 러시아의 명문대학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다.

한국식으로 따지면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전문의가 되려는 때 부친상을 당했다. 그 후 부친의 뒤를 이어 마피아 단원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원하던 의사 생활은 못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현재의 상황에 자족해한다. 지금도 상당히 고위에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더 흘러 자연스레 보스 중의 보스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늙어가도 불만이 없다고 했다.

이건 현수가 그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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