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4
그때 지르코프는 자신이 오늘날과 같은 위치에 있도록 후원해 준 이바노비치에 대한 충성심을 이야기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아르센 대륙의 군주를 보필하는 기사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지르코프는 이바노비치의 권력을 넘볼 생각이 조금도 없다.
따라서 지르코프가 당당하게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으면서 이바노비치를 향한 충성심을 보여주면 피의 투쟁은 벌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장차 이바노비치에 버금갈 막강한 부와 조직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항온의류 유럽 판매권을 주려는 또 다른 이유는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르코프는 명문 중의 명문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출신이고, 이 학교 동문회에 빠짐 없이 참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상당히 넓고 깊은 인맥을 가지고 있다.
현수는 보르자와 네르친스크 지역의 실카 강과 아르곤 강 사이 지역을 러시아 정부로부터 합법적으로 조차 받았다.
지난 3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현수는 이바노비치의 사위인 현직 판사와 검사를 만났다.
둘 다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에도 둘 다 현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수는 조차지 개발 방향을 이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었고, 지금쯤 열심히 사람을 모으면서 개발사업에 대한 청사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개발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페이퍼 작업만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을 모으고 개발에 필요한 장비 등을 준비하는 일이 그것이다.
하지만 딱 하나, 현지 측량작업만은 쾌속으로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이게 우선 되어야 나머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들 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할 경우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 다 개발해 놓고 쿠데타 비슷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둘 다 이바노비치의 사위들이니 조직원을 동원할 수도 있고, 판사와 검사였으니 공권력을 이용할 수도 있다.
물론 푸틴과 메드베데프라는 절대 권력자가 있으니 공권력을 동원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랬다간 먼저 제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피아 조직원들이다.
이들은 현수에 대하여 잘 모른다. 현수 덕에 조직이 원활하게 운영되고 점차 음지에서 양지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아는 건 상위에 있는 극소수뿐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제어하는 데 필요한 인원이 지르코프 쪽 사람이라면 사전에 잡음을 제거할 수 있다. 같은 마피아 단원이지만 직접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지르코프는 곧 이바노비치에 버금갈 자금과 조직력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항온의류 덕분이다.
현수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므로 지르코프와 손을 잡는 건 안전핀을 두어 개쯤 더 준비하는 것과 같다.
현수가 노보로시스크를 방문한 또 다른 이유는 장모인 안나 여사가 이곳에 머무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금쯤 300만 달러로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신세를 갚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콩고민주공화국에 조성되는 이실리프 자치령으로 가자고 권유할 것이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나 친지가 이주할 경우 안나 여사의 외로움은 훨씬 덜해질 것이다.
현수의 모친, 그리고 연희의 모친은 한국인이다.
안나 여사와는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에 친하게 지내지만 외로움이 풀리지는 않는다. 공통된 화제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사위 된 도리이다.
그렇기에 시간을 내어 이곳에 기착한 것이다.
잠시 창밖 풍경에 시선을 주던 현수는 노트북을 꺼내 자치령 개발에 필요한 것들을 점검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동력이다.
따라서 이실리프 솔라파워의 주윤우 사장이 와야 한다. 그전에 도로가 건설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각종 중장비와 연료, 그리고 인력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을 올가와 나타샤의 남편들이 준비해 두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밖에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 및 조치들을 메모해 두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띵똥∼!
“…누구지?”
노트북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가 문을 열자 잘생긴 40대 백인사내가 환한 웃음을 짓고 서 있다.
“아! 미스터 지르코프! 어서 오십시오.”
“핫핫! 오래간만입니다, 김 회장님!”
둘은 껴안으며 서로의 등을 두드린다.
“이곳에 올 거면 미리 연락을 하지 왜 그냥 왔습니까?”
“요즘 많이 바쁘시잖아요.”
“핫핫! 그건 그렇습니다. 항온의류 덕분에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핫핫핫!”
항온의류를 파는 건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은 일이다. 항구에 화물이 도착하면 그 즉시 선금 낸 도매업자들이 기다렸다가 가져가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지르코프는 이 사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 시절의 친구들과 그들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돈을 끌어모았다.
이실리프 어패럴에 선수금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보낸 8,000억 원이 있었기에 이실리프 그룹은 전국 각지에 소형 빌딩들을 살 수 있었다.
지르코프가 이실리프 어패럴로 보낸 돈의 대부분은 의과대학 동기들로부터 왔다. 지르코프가 좋은 사업이 있으니 투자하라는 말에 즉각 응답한 결과이다.
지르코프는 동기들로 하여금 각 지역에 의류 판매장을 만들도록 했다. 이에 의과대학 동기들은 그깟 옷을 팔아 얼마나 벌까 싶었다.
하지만 지르코프의 뜻대로 의류 매장을 준비했다.
러시아에선 의사라 할지라도 한국처럼 많은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 근무하는 병원에 따라 다르지만 평범한 러시아 의사들은 월수입이 300달러 정도 된다.
한국 돈으로 치면 36만 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의사이지만 생활이 어려워 운전기사를 겸업하거나 약사나 화장품 관련 업무를 같이하기도 한다.
더 많은 돈을 받는 의사들까지 포함한 평균치가 월 28,000루블(약 107만 원)이다.
대체적으로 성적이 좋은 의사는 많은 보수를 받는 모스크바 외국인 병원 등에 남지만 나머지는 동구권 국가로 이민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르코프의 친구들은 대부분 성적이 좋았다.
그렇기에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보로시스크. 니주니노브고로트, 예카테린부르크,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등에 소재한 외국인 병원에 근무한다.
이 중 노보로시스크에서 근무하는 동기는 지르코프의 현 위치를 잘 알고 있다.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했기 때문이다.
이 동기는 나머지 동기들에게 연락하여 의류 판매장을 준비하라는 말에 따르도록 했다. 지르코프가 동기들에게 손해를 끼칠 인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 결과 러시아 주요 도시마다 항온의류 판매장이 개설되었다. 그렇게 인테리어가 끝날 무렵 기다리던 물건이 왔다.
말로만 듣던 항온의류이다. 입기만 하면 바깥이 아무리 추워도 체온이 유지된다는데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이 이과를 전공한 의사들이라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랄지 ‘엔트로피의 법칙’ 같은 것들을 훤히 꿰고 있다.
따라서 아무런 장치나 에너지 공급장치 없이 항상 일정 체온을 유지시켜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말로만 항온의류이지 실상은 보온력을 극대화한 신상품 정도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마법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항온의류를 입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항온의류가 당도한 것은 3월 말이다.
이때의 모스크바 아침 기온은 영하 16∼13℃였다. 여전히 오리털 파카 같은 방한 의류를 입어야 하는 계절이다.
가지고 있는 방한 의류는 두껍고 무겁다. 그런데 항온의류를 보니 마치 등산용 바람막이같이 가볍고, 얇다.
보나마나 봄, 가을용일 것이라 생각하고 태그를 확인해 보니 ‘For Winter’라 쓰여 있다.
이렇게 얇은데 겨울용이라니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어보았다. 깜짝 놀라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수분이다.
옷이 얇으니 추위가 느껴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험 삼아 찬바람이 쌩쌩 부는 곳으로 가보았는데 하나도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곳의 온도계를 확인해 보니 영하 16℃였다.
얼른 안으로 들어와 옷을 벗고는 항온의류를 뒤집어 샅샅이 뒤져보았다.
하지만 특이한 장치 같은 건 없었다. 이들이 찾은 건 배터리 같은 소형 에너지 공급 장치였다.
지르코프의 동기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자신과 가족들에게 맞는 사이즈를 찾았다. 항온의류를 입으면 활동성이 월등하게 좋아지기 때문이다.
얼마 후, 초도물량 전부가 팔려 매대가 텅 비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소문을 듣고 온 것이다. 모처럼 발길을 한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품절이라고 했다가 슬그머니 더 비싼 값에 팔려고 물건을 빼돌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물건은 진짜 동이 났다.
이때부터 지르코프의 전화기는 쉴 시간이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걸려오는 추가 주문 때문이다.
이에 지르코프는 조직원들의 자녀들을 비서로 채용했다.
이렇게 전화 받는 직원만 열 명이나 되는데도 여전히 쉴 틈이 없다. 다음에 도착할 물량을 적절히 배분해 주는 작업은 비서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지르코프는 게오르기 호보토프 노보로시스크 시장과 집무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최근 레드마피아가 항온의류를 취급하면서부터 폭행, 인신매매, 마약밀매 같은 강력 사건이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덕분에 밤이 조금은 안전해졌다.
반면 세금 징수액은 왕창 늘었다. 갑작스레 엄청난 물량이 항구를 통해 들어오면서 관세 납부액이 막대해진 것이다.
게다가 활발해진 유통으로 인한 소비가 늘어 경제가 나아지는 중이다. 시장으로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렇기에 지르코프가 레드마피아의 보스라는 걸 알면서도 예방한 것이다.
어쨌든 이들 둘이 환담을 나누고 있을 때 이든 호텔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르코프는 현수가 도착했다는 전언을 듣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향했다. 시장과 함께 노닥거리는 것보다 현수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긴 어쩐 일로 온 겁니까?”
“미스터 지르코프를 만나러 왔지요. 자, 앉으세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나갑시다. 좋은 데로 가죠.”
“아뇨. 사업 이야긴 여기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조용하잖아요.”
“사업 이야기요? 알겠습니다.”
지르코프는 뭔 얘기가 나올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앉는다. 그사이에 현수는 냉장고에 있던 음료수를 내왔다.
딱!
“드세요!”
지르코프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 몰라 불안한 표정이다. 하여 현수는 부러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스터 지르코프, 좋은 소식과 그저 그런 소식,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무엇부터 듣고 싶습니까?”
“…좋은 소식부터 듣죠.”
“역시 긍정적인 분이십니다. 좋습니다.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다 하셨으니 항온의류에 대한 이야기를 하죠.”
“근데 설마 나쁜 소식이란 게 항온의류 납기일을 맞출 수 없다거나 물량이 줄어든다는 건 아니겠지요?”
지르코프의 모든 신경이 항온의류 수급에 맞춰져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말이다.
“미스터 지르코프, 이실리프 어패럴은 신용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납기일과 물량엔 별문제 없을 테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렇습니까? 휴우∼!”
혹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까 싶어 조바심이 났는데 아니라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현수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근데 좋은 소식이라는 거 안 궁금해요?”
“궁금합니다. 궁금해요. 뭡니까, 좋은 소식이라는 게?”
5장 저도 투자하겠습니다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미스터 지르코프에게 항온의류 유럽 총판권을 주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좋은 소식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