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85화 (984/1,307)

# 985

“네에? 하, 항온의류 유, 유럽 총판권이요? 저, 정말입니까? 정말 제게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총판권을 줄 겁니까?”

지르코프의 얼굴이 급속도로 상기된다.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라 여긴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때문이다.

지르코프의 모친은 만성신부전증 환자였다. 증세가 심해 정기적인 혈액투석이 필요했다.

이 병은 신장의 기능이 정상으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저하되어 노폐물이 배설되지 않음으로써 거의 모든 장기에 이상이 생기게 만드는 난치병이다.

지르코프는 병마에 시달리는 모친을 보고 의대를 진학했다. 어떤 의사도 고쳐주지 못한다고 고개를 저은 모친을 완쾌시키는 것이 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과대학에 입학한 해에 요독증(Uremia)으로 모친을 잃은 때문이다.

편히 돌아가시지도 못했다.

소변으로 배출되어야 할 노폐물이 배출되지 못하면서 말초신경계에 문제가 생겼다. 그 결과 모친은 사망하기 직전까지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

하필이면 작열감(Burning sensation)을 느낀 때문이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타는 듯한 통증 내지는 화끈거림을 느끼는 것이다.

불행히도 모친은 진통제가 효과을 거두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하여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 숨을 거두었다.

눈물 속에서 모친의 임종을 지켜본 지르코프는 만성신부전증과 관련된 신장내과를 전공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부친은 늘 술로 소일하다 지르코프가 레지던트 과정을 마칠 때쯤 작고했다. 그때 유언을 남겼는데 마피아의 중간 보스를 맡으라는 것이 그것이다.

부친은 냉혹한 마피아 조직에 몸담고 있었지만 가정에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병마에 고통 받는 아내에겐 늘 자상하고 애정 깊은 남편이었고, 자식을 대할 땐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바른 길로 이끌려 애쓰는 속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비록 진창 속에 있지만 아들만은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그런 아버지였던 것이다.

지르코프는 의대를 선택할 때 부친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렇기에 부친은 아들이 왜 의대를 택하는지를 알았고, 장차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또한 알았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의사를 하여 그 뜻을 이루긴 어렵다 판단하였다.

하여 유언으로 조직을 넘겨준 것이다. 이 편이 훨씬 많은 돈을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죽으면서도 자식의 뜻을 어떻게 하면 이루어지게 할 수 있을지를 고심한 결과이다.

이번에 들여오게 된 항온의류 8,000만 벌 덕에 지르코프는 만성신부전증을 완치시켜 줄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려는 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건물과 연구시설 중 일부는 갖추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기자재 전부를 채우기엔 역부족이다.

게다가 실력 있는 의료진 및 연구원을 구하는 건 아직 요원하다. 벌어들이는 돈은 많지만 그걸 몽땅 투입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온의류 유럽 총판권을 획득하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훨씬 빨리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물론 지르코프 상사를 상장하면 당장에라도 필요한 자금 마련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르코프 상사의 주식은 조직원들에게 균등 배분하리라 마음먹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원들은 지르코프 상사의 직원이 되어 정당한 급료를 받는 한편, 매년 발생되는 엄청난 이익에 대한 배당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중간 보스처럼 부(富)를 독식해도 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조직원을 가족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기에 상장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것을 아예 처음부터 배제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지르코프는 마피아의 보스라고 하기엔 너무도 착한 심성의 소유자이다. 아마도 제대로 된 교육과 훈육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하여 현수에게서 돕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난 것일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죠.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벨기에, 폴란드, 루마니아도 꼽으셔야지요.”

“……!”

“참, 프랑스와 스위스, 그리고 핀란드와 터키, 헝가리는 제외입니다. 거긴 따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 이럴 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지르코프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다. 이에 현수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거들어줬다.

“그냥 쓰파시바(Спасибо)라고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아니면 블라가다류 바쓰(Благодарю вас)라 하셔도 되구요.”

둘 다 러시아어로 고맙다는 뜻이다.

현수는 농을 섞어 한 말이지만 지르코프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블라가다류 바쓰, 미스트르 킴!”

“에구! 그냥 앉으세요. 농담으로 한 말이에요.”

“아닙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가 염원하던 일이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염원하던 일이라니요?”

지르코프가 난치병인 만선신부전증 치료제를 만들어 인류에 공헌하고자 함을 현수는 아직 모르기에 한 반문이다.

“돈이 모이면 신약을 개발해 낼 연구소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지요. 모친…….”

잠시 지르코프의 개인사가 이야기되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르코프를 다시 보았다.

마피아 보스지만 병든 이들을 위해 애쓰는 마음이 너무도 고결해 보인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좋은 소식은 들으셨으니 이제 그저 그런 소식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아, 네. 경청하겠습니다.”

지르코프는 잠시 전 개인사를 이야기할 때의 표정보다 다소 굳은 얼굴로 변한다.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한 때문이다.

“킨샤사 외곽에 있는 제 저택 아시죠?”

“아름다운 부인들과 결혼식을 올렸던 곳이죠?”

지르코프는 지난해 연말에 있던 성대하면서도 화려한 결혼식을 떠올렸다.

일 년 내내 여름인 곳이라 초록이 무성한 가운데 여러 색깔의 꽃들이 잔치를 벌이던 때이다.

현수는 하얀 턱시도를 입었고, 세 신부는 각자의 마음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는 세 사람이 손수 만든 웨딩드레스를 걸쳤다. 드레스는 셋 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이지만, 머리에 쓴 베일의 머리 장식은 각기 다른 색깔이었다.

참고로 신부가 머리에 쓰는 베일은 자신이 신랑 이외에는 어떤 남자도 모르는 처녀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현의 것은 부드러운 파스텔 톤 파란색이었다.

파란색은 일반적으로 자제와 적응을 상징한다. 그래서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사려 깊고 정직하다.

이 색깔의 의미는 성실, 신앙, 희망, 믿음, 신성함, 그리고 책임이다.

연희의 것도 파스텔 톤 연한 초록색이다.

초록색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색이며, 신경 및 근육의 긴장을 완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 색깔을 선호하는 사람은 대체로 교양 있고 예의 바르다.

그리고 초록색의 의미는 영원한 젊음, 불멸, 희망, 성결, 생명, 신앙, 그리고 애정이다.

이리냐의 것도 파스텔 톤인데 노란색이다.

이 색깔은 상쾌하고 찬란하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항상 즐겁고 가슴 설레게 하는 색이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격은 대체로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다. 이 색깔의 의미는 영광, 힘, 그리고 부(富)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이 등장할 때 지르코프는 동양과 서양의 완벽한 미인들을 보았다.

하여 잠시 체면도 잊은 채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보스인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를 비롯하여 메드베데프와 푸틴, 죠제프 카빌라와 가에탄 카구지, 그리고 기르마 올데 기오르기스와 비아니 아지한 등 거의 전부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신부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르코프는 잠시 그때를 생각하곤 현수를 바라본다. 천하절색인 미녀를 셋이나 차지한 현수가 부러워서이다.

그중 이리냐는 본인이 연결시켜 준 여인이다.

처음 보았을 때 청순하고 예뻐 보여 뽑기는 했다.

이 정도면 현수의 하룻밤 상대로 보내도 욕먹을 정도는 아니다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본 이리냐는 세계 최고의 미인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우아하고 고결해 보였으며, 품격 높은 가문의 영애처럼 청순하고 이지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섹시하기까지 하다.

얼굴과 몸매 모두 만점이다. 그러고 보니 진흙 속에 묻혀 있던 진주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걸 알아보지 못했지만 현수는 그걸 구별해 냈다는 뜻이다. 현수의 안목이 자신보다 낫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감탄을 거듭했다.

신부로서도 아름다웠지만 항온의류 브로셔의 이리냐는 그야말로 여신과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지르코프가 잠시 예전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일 때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그 저택 인근에 대규모 의료원을 건립하려 합니다.”

“대규모 의료원이요?”

“네, 10,000병상짜리입니다. 부속 시설로 난치병 치료제 개발센터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리코프의 입이 열린다.

“마, 만성신부전증도 포함됩니까?”

“물론입니다. 만성신부전증뿐만 아니라 알츠하이머, 혈우병, 진폐증, 파킨슨병, 고셔병, 백혈병, 크론씨병, 재생 불량성 빈혈 등의 치료제를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포션의 특이한 성분과 리커버리 마법이 조합되면 거의 모두 다스려질 질병들이다. 실제로 크론씨병은 이미 다스렸다.

경기도 농업연구원에서 유용미생물을 이용한 인삼의 안전성 향상과 친환경 재배 기술을 개발하던 중 퇴직한 강동호의 아내가 그 사람이다.

태백조선소 강전호 부장의 사촌형이기도 한 강동호는 현재 이실리프 상사에 의해 채용된 상태이다.

지금은 반둔두 지역에 조성될 대규모 농업연구소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연구원들을 채용하는 일과 필요한 기자재를 구매하는 업무를 보는 한편, 본인이 하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현수 덕에 말끔히 나은 아내와 달콤한 밀월을 즐기고, 그동안 놀아주지 못한 아이들과 매주 주말마다 놀러 다니는 중이다. 어쨌거나 크론씨병은 이미 다스려졌다.

포션과 리커버리 마법이 사용되었지만 굳이 마법까지 쓰지 않아도 될 듯싶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포션의 힘만으로도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진폐증도 아디스아바바의 코리안 빌리지에서 완치시켰는데, 신약 개발은 어렵고 물의 정령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을 듯하다. 이 부분은 아리아니와 엘리디아를 불러 상의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나머지 질병도 포션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현수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정말입니까?”

지르코프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은 이어지고 있다.

“그 밖에 아프리카 지역에서 간헐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 등도 만들어낼 생각입니다.”

“아!”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걷잡을 수 없는 출혈과 함께 몸 내부의 장기까지 파괴되면서 처참하게 사망한다.

그런데 이를 다스릴 치료제나 백신은 아직 없는 상태이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제약회사들이 치료제를 팔아 얻을 기대 수익이 적었기에 소극적인 투자를 한 때문이다.

만일 에볼라 바이러스 창궐 지역이 미국이나 유럽이었다면 벌써 만들어졌겠지만 가난한 아프리카에서 주로 발병하기에 관심을 끊은 결과이다.

말라리아 백신이 최근에 만들어진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비교적 저개발 국가에서 주로 발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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