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86화 (985/1,307)

# 986

“그저 그런 소식이란 건 미스터 지르코프의 인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의대 출신뿐만 아니라 다른 의대 출신 의사들도 소개해 주십시오.”

“……!”

지르코프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의 몇 배를 진행시키는 현수가 갑자기 거인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지르코프는 현수와 시선을 맞춘다.

“얼마든지요!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돈을 꿔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데 조건을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무슨 의미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의료원 부설 연구소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투자요? 연구소에서 난치병 치료제나 백신 개발을 연구하겠지만 원칙적으로 그곳은 영리가 목적인 곳이 아닙니다.”

“그래도 투자하게 해주십시오.”

말을 마친 지르코프는 입술을 굳게 다문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의지가 느껴지는 표정이다.

“투자에 대한 이익 배당에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대신 만성신부전증 치료제나 백신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모친을 잃었으니 충분히 이해된다. 현수 입장에선 손해 볼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이득이 없을 일에 스스로 많은 돈을 투자하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허락하였으니 최대한 많은 인원을 소개해 드리지요.”

“부탁드립니다. 이제 남은 건 나쁜 소식이군요.”

“나쁜 소식이라……. 말씀하십시오.”

지르코프는 대체 얼마나 안 좋기에 나쁘다는 표현까지 쓰나 싶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노보로시스크에 이리냐의 모친께서 와 계십니다.”

“…이리냐 양의 모친이라면…….”

이리냐는 현수의 아내이다. 그렇다면 방금 장모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지르코프는 확인해 달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네, 안나 게라시모바 체홉 여사이십니다.”

“아! 그래요?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우선은 어디에 계신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금방 찾아낼 겁니다.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지르코프는 곧장 심복에게 전화를 걸어 안나 여사의 행방을 수소문하도록 한다.

“감사합니다. 몹시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는데…….”

“무슨 말씀을……. 이리냐 양의 모친이시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 하지요. 걱정 마십시오. 금방 찾을 겁니다.”

“참, 장모께서 돈을 좀 풀었을 겁니다. 300만 달러를 드렸는데 얼마나 쓰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조금 더 쉽겠군요.”

지르코프는 정말 쉬운 일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안나 여사가 노보로시스크에 있다면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300만 달러를 쓰고 있다면 소문이 크게 번졌을 것이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엔 조직원만 동원 가능했지만 지금은 공권력의 도움까지 얻을 수 있다. 시장과의 친분이 깊어진 이후의 일이다.

“그나저나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우정을 보다 돈독하게 해줄 보드카 한잔 어떻습니까?”

“하하, 좋죠!”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르코프가 룸서비스를 청한다.

주문한 것은 보드카와 러시아 햄인 살라미, 그리고 빵, 버터, 절인 오이이다.

살라미는 빵에 버터를 듬뿍 바르고 치즈나 절인 오이와 함께 먹는다. 살라미 대신 연어 알을 얹기도 하는데 정력에 좋다고 소문나서 보드카 안주로 많이 먹는다.

잠시 후, 룸서비스가 당도했다. 그런데 주문한 것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음식을 가져왔다. 연어알도 있고, 오랜만에 보는 샤실릭과 보르쉬 등도 보인다.

쌀로(Salo)라 불리는 것도 있는데 아무리 봐도 생삼겹살에 후춧가루를 뿌린 것같이 보인다.

주문한 것이 아니라 하자 지배인의 특별 서비스라며 마음껏 드시라고 한다. 노보로시스크의 밤을 지배하는 지르코프 때문이기도 하지만 축구의 신인 현수가 더 큰 이유이다. 이 호텔의 지배인이 소문난 축구광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인을 부탁한다. 흔쾌히 이십여 장에 쓱쓱 이름과 날짜를 쓰고 사인을 해줬다.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과 몇 분이면 될 일이니 흔쾌히 해준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탁자 위에 놓인 안주를 슬쩍 살펴본 지르코프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팁을 준다.

음식의 질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잘 먹겠습니다.”

지르코프의 영향력 때문으로 오인한 현수의 말에 환히 웃으며 잔에 보드카를 따른다.

“하하! 얼마든지요. 그나저나 보드카 맛있게 마시는 법 알려드릴까요?”

“네, 알려주십시오.”

보드카의 본고장이 이곳 러시아이니 그에 알맞은 주법이 따로 있는 듯 하여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드카는 말입니다…….”

잠시 지르코프의 설명이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보드카를 냉동실에 넣어 살짝 얼린 다음 마시는 것을 즐긴다.

살얼음이 둥둥 뜬 보드카를 원샷으로 마신 후엔 술기운이 퍼지기 전에 호밀빵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다.

다음엔 빵에 얹은 살라미를 먹기도 하지만, 먼저 절인 오이를 한 조각 먹은 후 쌀로라 불리는 염장한 돼지비계를 안주 삼아 먹는다.

참고로, 쌀로는 익히지 않은 생고기라 생각하면 된다.

“아, 그렇습니까?”

설명을 모두 들은 현수는 쌀로에서 시선을 떼었다.

생삼겹살을 날로 먹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은 때문이다. 그리고 기름기를 너무 많이 섭취할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리 많은 지방을 섭취한다 해도 현수의 신체는 그 모든 것을 깔끔하게 연소시킨다.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과도하게 기름기를 먹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 어떻게 먹는 건지 알았으니 한잔하지요.”

“좋습니다.”

챙―!

잔을 내밀어 부딪치곤 단숨에 비웠다. 시원한 것이 목구멍을 넘어가는데 잠시 후면 화끈할 것이다.

“흐으음!”

먼저 호밀빵의 구수한 냄새를 맡았다. 다음은 살라미를 얹은 버터 바른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소시지가 짭짤하다.

“어떻습니까?”

“좋군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다시 잔에 술을 채운다. 현수 역시 지르코프의 잔을 채워주었다.

“이번엔 김 회장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건배하죠.”

“좋습니다.”

챙―!

“크흐으!”

또 한 잔의 보드카가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현수는 살라미를 집어 들었지만 지르코프는 쌀로를 선택한다.

“이번엔 지르코프 상사의 무한한 발전을 위해 건배하죠.”

“좋습니다.”

또 한 잔이 비워졌다. 둘은 잔을 비울 때마다 건배를 하며 서로를 축복해 주었다. 그렇게 한 병을 거의 다 비웠을 때 지르코프의 전화에서 노랫소리가 난다.

♩♪∼ ♬ ♪♩♬∼ ♩♬∼ ♪♬♩∼

“……!”

뜻밖에도 마피아 보스의 전화벨 소리는 ‘지현에게’였다. 걸그룹 다이안이 발표한 원곡이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리는 들은 바 있기에 알기는 하지만 노보로시스크까지 번져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여 신선하다는 느낌이다.

“어, 그래? 그래, 그래서? 그래? 알았다. 수고했어.”

통화는 길지 않았다. 역시 남자들 간의 통화이다.

여자들이야 전화통을 붙잡으면 두세 시간 내내 수다를 떨기도 하지만 남자들의 평균 통화 시간은 길어야 3분이다.

“장모님을 찾았다고 합니까?”

“네! 근데 노보로시스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체홉 여사께서는 현재…….”

지르코프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리냐의 모친은 노보로시스크에서 남쪽 직선거리로 약 6㎞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무스크하코(Myskhako)라는 곳의 빈민촌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빈민촌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 듣고 나니 영등포 쪽방촌 비슷한 곳이다.

예전으로 치면 아현동 산 8번지 같은 달동네이다.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삶을 사는 곳이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많으며, 먹을 게 없어 쥐도 잡아서 먹는 곳이다.

지난 1999년 9월, 체첸반군과 러시아군은 다게스탄 국경에서 충돌한 바 있다. 체첸의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위한 무장투쟁이었다. 이때 이리냐의 부친과 오빠가 체첸 반군에 속해 있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사망했다.

체첸 사람이긴 해도 둘 다 이슬람 신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반군에 속해 총을 잡은 이유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이웃과 친구들 때문이다.

의리로 참전했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남편과 아들을 잃은 체홉 여사는 장례식을 치르곤 곧바로 체첸을 떠났다. 어찌 보면 이웃들의 말없는 강요에 의해 참전한 사람들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은 죽었고, 하나뿐인 어린 딸과 남게 된 체홉 여사는 어찌어찌 흘러 무스크하코까지 왔다.

이곳에선 가난하지만 정(情)을 나누는 이웃이 많았다.

모두가 빈민이지만 십시일반의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리냐와 체홉 여사는 일찌감치 아사(餓死)했을 것이다. 지금은 신세진 이웃들에게 잔치를 벌여주고 빚은 갚아주는 중이라고 한다.

“뭐하고 계신다고 합니까?”

“빚을 갚아주는 중이라 하더군요.”

“빚을 갚아요?”

“그곳은 빈민촌입니다. 빚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죠.”

지르코프의 설명을 들은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도 절도 없는 빈민들에게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준단 말인가?

보나마나 담보도 없을 것이다.

“거긴 액수는 크지 않지만 거의 모두 빚을 지고 삽니다.”

지르코프의 세포 조직 중 하나가 그곳에서 고리대금업을 하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거길 가봤으면 하는데 가능하죠?”

“물론입니다. 차 준비시키겠습니다.”

둘이 마신 보드카는 각각 한 병 정도 된다. 지르코프는 불곰국 국민답게 말짱하고 현수 역시 거뜬하다.

상태로만 따지면 현수가 훨씬 좋다. 장모를 만나러 가는데 술 냄새를 풍길 수 없어 안티 포이즌 마법으로 술기운을 말끔하게 날려 버린 때문이다.

호텔을 떠난 차가 무스크하코로 가는 동안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간간이 부하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기에 여러 가지를 물을 수 있었다.

6장 검은 까마귀

무스크하코 빈민촌의 이름은 ‘검은 까마귀(черный ворон)’이다. 동일 제목의 러시아 전통음악이 있는데, 전장에서 심하게 다친 병사가 하늘의 검은 까마귀를 올려다보며 ‘아직은 네 것이 아니야. 내가 죽어야 네 것이 되지’라는 처연한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동네 이름이 이러한 이유는 모두들 굶어 죽을 사람들만 남아 있다는 자존감 때문이다. 매일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곳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쥐를 잡아먹는다는 말에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먹을 게 없으면 그럴까 싶은 것이다.

어쨌거나 검은 까마귀 마을은 약 800가구가 거주하며 인구는 4,000명 정도 된다.

보고에 의하면 안나 여사는 상당히 많은 이의 빚을 갚아주었다고 한다.

300가구가 지고 있던 빚이 60만 달러이니 가구당 약 2,000달러였다. 워낙 수입이 적은 곳이기에 원금은 줄어들지 않고 평생 이자만 낸다고 한다.

빚은 자식에게 대물림되기에 고리대금업자들 입장에선 매달 일정한 수입이 고정적으로 발생되는 곳이다.

안나는 자신이 가진 돈으로 상당히 많은 식료품을 사가지고 갔다고 한다.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닭고기뿐만 아니라 감자, 양파, 양배추, 당근, 식초, 마늘, 소금, 후추, 월계수 잎, 식용유 등이다.

2.5톤 트럭으로 다섯 대 분량이니 마을 전체를 위한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도 남을 양이다.

“아, 그래요?”

“안나 여사가 검은 까마귀 마을의 모든 빚을 갚아준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리는 중이라 합니다.”

“그렇군요.”

나머지 500가구의 빚 또한 평균 2,000달러라면 충분히 갚고도 남을 것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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