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7
지르코프는 계속해서 그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간신히 연명만 하는 곳이다.
차는 쉼 없이 달려 검은 까마귀 마을에 당도하였다. 한바탕 잔치 분위기여야 하는데 행인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러죠? 마치 사람들이 다 떠난 마을 같습니다.”
“글쎄요?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지르코프는 보고하던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 대기해. 아니, 그냥 있어. 전화 바꿔줄 테니까 거기 위치를 말해.”
지르코프가 운전자에게 전화기를 준다. 운전자는 어깨와 귀 사이에 전화기를 낀 채 운전하며 이리저리 방향을 튼다.
좁고 지저분한 골목을 돌고 돌아가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그마한 광장에 이르렀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부당하다! 부당하다!”
“맞아! 말도 안 돼! 지난달까지 내 빚은 1,800달러라고 했어! 그런데 왜 갑자기 3,600달러로 늘어나?”
“저놈들이 미쳤나? 왜 갑자기 지랄들이야.”
“와와와와! 와글와글!”
사람들의 손에는 굵은 몽둥이나 쇠스랑 같은 것들이 들려 있고, 몹시 흥분한 듯 성난 표정을 짓고 있다.
사람들이 있어 앞으로 갈 수 없는 차는 슬그머니 후진하여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보아하니 성난 군중들이다.
현재 군중들의 눈에는 위아래가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동차가 괜한 몽둥이찜질을 당할 수 있다.
너무나 가난하기에 지르코프 전용 벤츠에 흠집을 내더라도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기껏해야 두들겨 패서 혼쭐이나 내주는 게 전부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왜 하겠는가!
하여 슬금슬금 물러난 것이다.
딸깍―!
지르코프가 문을 열고 나가자 운전자가 잽싸게 우산을 펼쳐 든다. 이 마을에 접어들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 우산 이리 주게.”
“네? 아, 네.”
운전자로부터 우산을 건네받은 지르코프는 현수가 있는 문으로 다가간다.
“내리시지요.”
“네, 고맙습니다.”
폭우가 쏟아져도 실드 마법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고,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마나를 운용하면 호신 강막이 형성된다.
둘 다 제아무리 강한 폭풍우가 분다 해도 한 방울도 맞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몸을 감싸준다.
이도저도 귀찮으면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를 불러 비를 멈추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현수는 우산이 필요 없다. 그럼에도 지르코프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밖으로 나갔다.
이 순간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온다.
“야! 이 나쁜 놈들아! 왜 갑자기 원금이 두 배로 뛰어?”
“뭐? 이자율이 높아졌다고? 아무런 통보도 없이 니들 마음대로 올려?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없어!”
“맞아!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처사야!”
“이자율을 왜 니들 마음대로 올려? 엉?”
“와와와와! 죽여라, 죽여! 죽여!”
“와와와와와! 와와와와와!”
목청 큰 누군가의 음성에 군중들이 호응하며 소리친다. 금방이라도 군중들에 의한 집단 소요 사태가 벌어질 듯싶다.
이때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온다.
타앙―!
갑작스런 총성에 성난 군중들이 움찔하며 입을 닫자 안쪽의 누군가가 소리친다.
“이 빌어먹을 종자들이! 지금 우릴 협박하는 거야? 엉? 우리가 누군지 몰라? 모두들 뒈지고 싶어?”
“……!”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물론 총이 무서워서이다.
“잘 들어! 중앙의 높으신 분께서 너희에게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율을 올리라는 지시가 있으셨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대출해 준 돈에 대한 이자율을 높였다! 알았어?”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런 통보도 없이 이자율을 올리는 건 아닙니다!”
“맞습니다! 이전의 이자율도 너무 높아 힘들었는데 이렇게 올려 버리면 우린 어떻게 합니까? 빵 사 먹을 돈도 없어 굶는다는 거 모르십니까?”
누군가의 항변에 고리대금업자로 짐작되는 또 다른 누군가가 호통을 친다.
“그걸 왜 내가 알아줘야 하는데? 나는 중앙의 높은 분의 지시를 따를 뿐이야! 그리고 이자율이 높으면 원금을 상환하면 되잖아! 안나라는 년이 와서 니들 빚 갚아주잖아! 듣자 하니 그년 수중에 돈이 꽤 많다고 들었어! 다들 가서 빚 갚게 돈 달라고 그래!”
“벼룩도 낯짝이 있습니다. 어떻게…….”
“아아! 시끄럽고, 난 오늘 너희에게 통보하러 왔다! 이자율이 높아졌으니 후딱 원금을 상환하든지 아니면 종전의 두 배인 이자를 매달 납부하도록!”
잠시 말을 끊은 고리대금업자는 군중들을 둘러보곤 다시 말을 잇는다.
“이자 내는 날짜를 하루라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고르비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야. 안 그래? 고르비 같은 꼴 안 당하려면 알아서 하도록!”
고르비라는 이름이 나오자 사람들 모두 움찔거리며 물러선다. 그러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서민은행(Банковские услуги бедным населением) ’이라 쓰인 간판이 보인다.
간판 아래엔 다섯 명의 사내가 서 있다. 선두에 있는 자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털외투를 걸치고 있다. 나머지 넷은 이자의 수하인 듯 서 있다.
어쨌거나 고르비는 이 마을 청년이다.
부친이 사망하면서 빚을 물려받았는데 약 3,000달러이다.
고르비는 지난 몇 달간 마치 소아마비를 앓은 것처럼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기에 막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정해진 날짜에 이자를 내지 못해 지난 수개월 간 고리대금업자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한 결과이다.
이종격투기 용어로 표현하자면 강력한 로우킥에 의한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었는데 제때 치료하지 못해 절룩인다.
며칠 전 고르비가 이자를 내야 하는 날이 돌아왔다.
돈을 지불하지 못하자 심한 매질을 가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전봇대에 묶어놓고 무차별적인 구타를 한 것이다.
그 결과 갈비뼈가 부러지고 안와골절까지 당했다.
이빨도 세 개나 부러진 상태이다. 그렇지 않아도 성치 않던 몸인데 기절할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한 것이다.
현재 고르리는 냄새나는 침대에 누워 오늘내일하고 있다. 경각지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르비가 맞는 걸 지켜보았다. 이자를 제 날짜에 못 내면 자신도 같은 꼴을 당할 수 있기에 그날 이후 모두들 우울해했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소리 소문 없이 마을을 떠났던 안나 게라시모바 체홉이 나타나 이웃들이 진 빚을 대신 갚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밀린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까지 몽땅 갚으니 앞으로 고리대금업자에게 시달릴 일은 없다.
매달 지불해야 하던 이자만으로도 굶주림은 면할 수 있게 되어 모처럼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안나 여사의 도움을 받아 빚을 갚게 된 사람들은 그녀가 어려울 때 조금이라도 음식을 나눠 주거나 위로해 주는 말이라도 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하여 800가구 중 300가구가 안나 여사의 도움을 받아 빚으로부터 해방되자 나머지 사람들은 눈치를 살폈다.
말만 잘하면 자신들도 지긋지긋한 빚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알게 된 때문이다.
듣자 하니 안나의 딸 이리냐가 아주 돈 많은 사람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 사위가 신세진 사람들을 찾아가 은혜를 갚으라며 돈을 주었는데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안나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안나 여사는 갚아야 빚이 얼마인지를 물었다.
가난이 어떤지 너무도 처절하게 경험했는지라 일면식도 없지만 불쌍히 여겨 빚을 갚아주려는 것이다.
곧 킨샤사로 돌아갈 텐데 거긴 돈이 없어도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현수가 준 돈을 다 쓰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아무튼 갚아줄 액수를 알아야 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즉시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자신들의 빚이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두 배로 늘어난 이자를 이상한 방법으로 합산한 결과이다.
항의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소문이 번지고 번져 다들 그렇다는 걸 알고는 이렇게 모여든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푸훗! 신고? 맘대로 해! 안 말리니까!”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오랜만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받아넘긴다. 경찰과 이미 결탁되어 있으니 아무 소용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잊은 게 있다는 듯 다시 입을 연다.
“참, 신고하는 건 좋은데 나중에 내가 알면 그놈은 그날부로 이자가 또다시 두 배 뛴다. 알았나?”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대꾸하지 않는다. 그러다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중앙의 누가 시켰다는 겁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시선을 돌린 고리대금업자는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다.
“그럼 내 마음대로 했을까 봐?”
“근데 누굽니까, 중앙의 그 높으신 분이?”
“지르코프 야진스키 이바노바라는 분이시지. 노보로시스크의 밤을 장악하신 분이시다.”
“……!”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르코프의 이름이 나오자 대꾸할 말을 잃은 듯 멈칫거릴 때 고리대금업자의 말이 이어진다.
“너희 중 누구라도 허튼 생각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크흐흐흐!”
고리대금업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곁에 있던 두 녀석이 양복을 제쳐 그 안의 우지(Uzi) 기관총을 보여준다.
분당 1,7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놈이다. 이거 두 정만 있으면 항의하러 온 사람들 전부를 죽일 수 있다.
군중들은 흠칫거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다. 놈들의 무자비한 매질도 무섭지만 총은 더 무섭기 때문이다.
“잘 들어라! 누구든 이자를 내야 하는 날을 하루라도 어기면……!”
잠시 말을 끊고는 눈알을 부라리며 말을 잇는다.
“고르비가 당한 그대로를 당하게 될 것이다! 크흐흐!”
사내가 군중들을 노려보자 모두들 비칠거리며 물러선다. 힘으로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정말 그렇게 지시한 겁니까?”
현수의 시선을 받은 지르코프는 얼른 손을 흔든다.
“아닙니다. 세포 조직에서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기 저 친구들이 정말 레드마피아인 게 맞습니까?”
현수의 물음에 지르코프는 운전자에게 말한다.
“얼른 알아봐!”
운전자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더니 30대 후반인 사내의 사진을 찍어 어디론가 전송한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가 진동하자 자그마한 음성으로 통화한다.
하지만 현수의 귀에는 다 들린다.
“뭐라고? 말코이 사샤 이반스키? 그래, 그래! 그래, 알지. 그래. 응, 응! 그래, 알았어. 일단 끊어봐.”
말코이 사샤 이반스키는 최근까지 이 지역을 관할하는 레드마피아의 부두목이었다.
그의 직속상관이자 두목은 고리대금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상납하지 않고 착복하다 걸려 숙청당했다.
두목 자리가 비자 상부에서 이반스키를 승진시킨 것이다. 고리대금업에 대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운전자가 통화를 마치고 다가서자 지르코프가 묻는다.
“뭐라고 해?”
“조직원 맞답니다. 무토르스키 직속입니다.”
“무토르스키? 양조장 찌끄러기?”
지르코프가 또 이맛살을 찌푸린다. 부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녀석의 이름이 나온 탓이다.
“네, 그 무토르스키의 세포 조직입니다.”
“가만, 무토르스키라면 골칫덩이인 네오나치 스킨헤드 애들 뒤를 봐주는 그놈인가?”
러시아의 스킨헤드족은 인종차별주의자들로 소련이 와해되자 기존 질서에 반하는 범죄단체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질시하여 주로 동양인들을 테러한다.
러시아 내무성 자료에 의하면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살인 234건, 방화 421건, 납치 유괴 92건, 강간 821건, 폭행 19,328건이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