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9
부친으로부터 조직을 물려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어린 보스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중간 보스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르코프는 보스가 된 후 면밀히 조직을 파악했다. 어디서, 누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그러다 마약 거래와 인신매매로 쏠쏠한 수입을 올리는 조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본시 의사였기에 마약이 어떤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마약은 사람을 극도의 타락으로 몰아넣다.
그리고 인신매매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리는 일이다.
지르코프가 이런 행위를 금지시키자 이것으로 수입을 올리던 중간 보스들이 불만을 갖게 된 것이다.
이들이 행해온 악행을 알게 된 지르코프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친위대를 동원하여 직접 응징에 나섰다.
그때 200여 명의 마약 제조 및 밀매조직과 인신매매 조직이 소탕되었다. 신문에는 스페츠나츠가 나서서 정리한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실제는 지르코프와 친위대가 벌인 일이다.
당시 지르코프는 선두에 서서 반역자들을 처단했다.
당시 이들을 상대하기에 앞서 그간 벌어진 일들을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너무도 많은 악행이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여 살려둘 가치조차 없는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라는 판단을 내렸기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그때 이후 지르코프는 노보로시스크 최고의 냉혈한으로 소문이 났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심장을 쏘고, 두개골에 구멍을 뚫었다. 도끼로 이마를 찍기도 했다.
응징이 끝났을 때 지르코프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핏물로 범벅이었다. 그 상태로 친위대와 함께 보드카를 마셨다.
가히 지옥에서 생환한 악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조직원이 진심 어린 경배를 보낸다.
예전엔 무자비하면서도 냉혹했지만 지금은 조직원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보듬어 안아주는 인자한 보스가 된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반스키는 지르코프와 시선이 마주치자 맹수를 만난 초식동물처럼 겁에 질린 표정이 된다.
자신이 이름을 함부로 팔아먹었으니 어쩌면 오늘로서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음을 직감한 때문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자율은 누가 올린 건가?”
“…제, 제가…….”
“왜지?”
음성에 고저가 없으니 더욱 무섭게 느껴진 듯 이반스키의 하의가 젖기 시작한다. 소변을 지린 것이다.
“안나라는 년이 나, 나타나서 원금을 모두 갚아버렸기에 다음 달부터는 수입이 크, 크게 줄어들 게 우려되어서… 그래서 그랬습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이반스키는 제 이마로 땅을 들이박는다.
쿵―!
“크윽!”
말을 하다 그래서 그런지 혀라도 깨문 듯 한줄기 선혈이 입가로 흘러내린다. 하지만 지르코프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모스크바의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라는 분을 아나?”
“…그, 그럼요! 하, 하늘같이 높으신 분이시지요. 우리 레드마피아 전체를 휘하에 두신 분이십니다요.”
차마 이름까지 언급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다.
“최근 그분의 후계자가 결정되었다는 건 아나?”
“후, 후계자요? 누, 누구십니까?”
이반스키는 거의 말단에 가까운 졸개이기에 아직 중앙의 소식을 모르는 모양이다.
“김현수라는 한국인이지. 후계자일 뿐만 아니라 보스의 사위이기도 해.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서 계시지.”
지르코프가 자연스레 현수에게 시선을 돌리자 이반스키 역시 현수를 바라본다.
“허억! 네에?”
이반스키의 눈은 금방 화등잔만 해진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하늘같이 높디높은 보스가 한국인을 사위로 맞이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한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조직인지라 나이에 관계없이 50만 명에 달하는 레드마피아 중 서열 10위 안에 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바노비치에게 유고가 발생되면 즉각 서열 1위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저, 정말이십니까?”
이반스키는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기에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은 모양이다.
“그리고 네가 방금 욕설을 섞어 지칭한 안나 여사는 후계자의 장모님이시다.”
“네에? 뭐, 뭐라고요?”
이반스키는 감히 보스인 지르코프에게 얼른 대답해 달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현수는 이바노비치의 사위이다.
그런데 이곳 검은 까마귀 마을에 와서 빈민들의 빚을 갚아준 안나가 장모라면 이바노비치의 아내라는 뜻이다.
조금 전 자신은 ‘안나라는 년’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는 즉각 사망에 이르게 할 상관 모독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이반스키는 겁에 질려 똥까지 싼다.
뿌지직, 뿌지지직―!
거의 매일 마시는 술 때문에 과민성대장증세가 있어서 설사가 뿜어진 것이다.
“크으! 냄새!”
지르코프는 지독한 냄새에 코를 잡으며 물러선다.
제아무리 카리스마 넘치는 냉혈한이라 할지라도 이런 냄새 앞에선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이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매직 캔슬! 에어 퓨리파잉!”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실리와 막심, 그리고 이고르와 일리냐의 무릎이 꺾인다. 아울러 이반스키의 몸에서 뿜어지던 구린내가 사라진다.
쿵, 쿵, 쿵, 쿵―!
“보, 보스를 뵙습니다!”
몸만 움직일 수 없었을 뿐 모두 보고 들었기에 이들 역시 겁에 질린 표정이다. 이반스키의 명에 따라 과도한 이자를 내라고 강요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지르코프는 싸늘한 시선으로 이들 넷을 둘러보았다.
“너희는 이반스키가 내 이름을 파는데도 말리지 않았다. 얼마나 큰 무례를 범한 건지 아나?”
“주, 죽여주십시오. 보스! 정말 잘못했습니다.”
“크흐!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쿵, 쿵, 쿵, 쿵―!
조금 전의 ‘쿵’은 무릎이 땅에 닿는 소리였고, 이번의 것은 이마가 닿는 소리이다. 그런데 거의 음량이 같다.
두개골이 빠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용서받아야 한다는 마음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조직에서 제명하려 한다.”
“네, 네에? 그, 그건 아, 안 됩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제발 제명만은… 보스! 제명만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넷은 더없이 당황한 표정이다. 레드마피아에서 제명당하는 것은 단순히 체면만 깎이는 불명예가 아니다.
조직에서 제명당하게 되면 그간 지은 죄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된 고발장이 경찰서에 접수된다.
당연히 체포당하게 되는데 정작 심각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진다. 교도소 내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다.
물론 가해자는 레드마피아 조직원이다. 그래서 감히 반항할 마음조차 품을 수 없다.
그랬다가는 거의 매일 죽을 정도까지 맞는다. 한 주먹은 결코 열 주먹을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게 되면 조직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이러는 동안 은닉해 둔 모든 재산을 조직에서 가져간다. 남은 가족 전부 한순간에 거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제명만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미스터 지르코프!”
“네!”
“이자들에 대한 처분을 제게 일임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미스터 킴은 서열상 나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러니 사소한 건 묻지 않아도 됩니다.”
“고맙군요.”
현수는 지르코프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의 말대로 현수의 서열이 더 높다. 하지만 직계가 아닌 조직원들까지 마음대로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렇기에 물은 것이다.
몸을 돌린 현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반스키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애원한다.
“제발 제명만은 말아주십시오, 보스!”
지르코프보다도 서열이 높다니 저절로 나오는 말이다.
“제명만 아니면 무엇이든 하겠느냐?”
“그, 그럼요! 뭐,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좋아, 너희 다섯은 이 시간부로 이곳 검은 까마귀 마을의 청소부이다. 매일 온 동네의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해라.”
“……?”
“청소를 시원치 않게 하여 이 마을 사람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면 그때는 조직에서 제명이다. 하겠느냐?”
“하, 합니다. 암요! 하구말구요. 매일 마을 전체를 깨끗이 쓸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아무리 달동네처럼 촘촘히 모여 사는 마을이라 하지만 명색이 800가구가 사는 곳이다.
빗자루를 들고 최소 서너 시간은 쓸어야 끝날 일이다.
“처벌 기간은 오늘부터 1년! 1년간 이 마을의 청소부가 되어 쓰레기를 치우고 마을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한다.”
“…알겠습니다, 보스! 저희의 무례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스!”
다섯은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 싶은지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이때 지르코프가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이자율이 얼마였지?”
“…경우마다 달랐지만 대략 72% 정도 되었습니다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론 144%를 넘게 받기도 했다.
아무튼 연 72%면 월 6%의 이자율이니 빚이 2,000달러이면 매달 120달러를 이자로 챙겼다는 뜻이다.
대략 14만 원쯤 된다.
의사 평균 수입이 107만 원인 곳이니 14만 원이면 엄청 큰돈이다. 이러니 원금을 갚을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지르코프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시선을 주고 있는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뭔가 애원하는 표정, 신기해하는 표정이다.
“이 시간부로 이자율을 낮춘다. 연 12%만 받도록.”
2014년 현재 러시아 은행들의 대출 금리는 11.1%이다.
담보 제공 대출이 이러하다. 신용대출의 경우는 30%를 넘기기도 한다. 따라서 지르코프가 받으라고 한 연 12% 이자율은 결코 높은 게 아니다.
지금까지 월 120달러를 이자로 내던 사람은 20달러만 준비하면 된다. 부담이 확 줄어든 것이다.
이반스키는 방금 한 말이 진심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보스, 월 1%의 이자율이면 상납하는 금액이 대폭 줄어듭니다. 조직 운영에도 차질이 생기구요.”
“그래도 상관없다. 그리고 앞으로 고리대금업은 하지 않는다. 원금이 모두 회수되면 사업을 접도록.”
“네? 그럼 저흰 무얼……?”
무슨 돈으로 조직을 유지할 것이냐는 뜻이다.
“이제 너희에게 주어지는 일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전에 미스터 킴의 말씀대로 이곳에서 1년간 청소를 해라. 그 일이 끝나면 내게 연락하도록.”
지르코프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자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든다.
“1년 후 그걸 가지고 날 찾아와라.”
“네, 보스.”
이반스키를 비롯한 다섯 모두 고개를 조아린다. 이때 현수가 입을 연다.
“안나 여사는 어디에 계시는가?”
“네? 아, 네. 그, 그분께서는 저기 저 안쪽의 세르게이네 집에 계십니다.”
“그래? 안내하라.”
“네? 아, 알겠습니다요. 저, 저를 따라오시지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선 이반스키가 손짓하며 앞장선다.
맞은 데가 아픈지 절뚝거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평상시 같았으면 킬킬대며 웃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보스로서의 체면을 차려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잠시 걸으니 통나무로 지은 목조주택이 보인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몹시 낡은데다 곳곳이 썩어 있다. 추운 겨울을 어찌 보냈을지 심히 걱정되는 모습이다.
세르게이의 오두막은 문이 열려 있고, 안에선 밝은 불빛이 흘러나온다. 뿐만 아니라 구수한 냄새와 떠들썩한 웃음소리까지 들린다.
몹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듯싶다.
“여, 여깁니다요. 보스! 아, 안나 사모님께서는 아, 안에 계십니다요.”
이반스키는 안나가 이바노비치의 부인인 것으로 오인하고 있기에 몹시 절절맨다. 안나를 지칭하며 욕을 한 것이 마음에 걸린 때문일 것이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