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0
“어, 그래, 수고했네.”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반스키와 그 일당은 꽁지가 빠져라 후다닥 달려간다.
분대장이 군단장과 함께하던 상황과 비슷한 때문이다.
모퉁이를 돌아간 이반스키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쓰다듬었다. 곧바로 당도한 막심 등은 헐떡이는 숨을 다스리다가 물러선다.
“보스, 냄새가 너무 심합니다.”
“맞습니다. 얼른 가서 씻으십시오. 냄새가 너무 고약합니다. 대체 뭘 먹었기에…….”
겁에 질려 똥오줌을 모두 지렸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인마, 지금 냄새가 문제야? 하마터면 조직에서 제명당할 뻔했는데…….”
“아, 맞아. 보스, 보스는 얼른 가서 씻으십시오, 우린 빗자루랑 쓰레받기 등을 챙길 테니.”
“맞습니다. 분명 오늘부터 일 년이라 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해 떨어지니 서둘러야 합니다.”
“보스, 우리 먼저 가겠습니다.”
막심 등은 서둘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청소용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홀로 남게 된 이반스키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심장 부위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허메! 오늘 돌아가실 뻔했구만.”
이들은 몰랐다. 검은 까마귀 마을이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배출되는지를.
하루 종일 빗질을 해야 간신히 청소할 만큼 넓었고, 매일매일 배출되는 쓰레기를 처리할 곳이 없어 인근 야산의 땅을 파고 그곳에 묻어야 했다.
하여 매일 아침 5시부터 시작된 청소는 오후 7시가 넘어야 끝나곤 했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깜박 잠들었다 깨면 다음 날 오전 4시 반인 나날이 이어진다.
일요일도 없고 공휴일도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만 조직에서 제명당하는 걸 피하려면 할 수 없다.
하여 매일매일 지친 몸으로 청소하는 삶을 살게 된다.
아무튼 이반스키가 중얼거릴 때 현수는 세르게이의 집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누구? 누구십니까?”
현수의 음성을 듣고 시선을 돌린 이는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이다. 그런데 현수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다 말끔한 양복 차림인지라 경계의 빛이 완연하다. 이 동네에선 양복을 입고 다닐 사람은 마피아 단원 이외엔 없기 때문이다.
“체홉 여사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체홉 여사? 아, 안나?”
“네, 안나 게라시모바 체홉 그분이요. 안에 계시죠?”
“그렇기는 하네만…….”
정확한 이름을 대자 경계의 빚이 약간 누그러들기는 했지만 완전히 긴장을 푼 건 아닌 듯 쏘아본다.
“아! 안에 계시다니 제대로 찾아온 거군요. 그럼 전갈을 부탁드립니다. 밖에 사위가 와 있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사위?”
“네, 이리냐가 제 아내입니다.”
“아, 그럼…….”
사내는 들어본 바 있다는 듯 표정을 바꾼다. 그리곤 이내 손을 잡아끈다.
“안나의 사위라면 안으로 들어가야지. 자, 가세. 내가 안나에게 데려다 줄 테니.”
“네, 감사합니다. 참, 미스터 지르코프,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지르코프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 발짝 물러선다. 마음 놓고 다녀오라는 표정이다.
“안나! 안나!”
사내가 소리치자 안에서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시선을 돌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잇는다.
“안나, 자네 사위 왔네! 사위 왔어!”
“……!”
모두의 시선이 현수에게 향한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냐는 눈빛과 안나의 사위가 어찌 생겼는지 궁금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표정이 섞여 있다.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장모를 찾았다. 이때 저쪽 문이 열리며 안나의 모습이 보인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는 듯하다.
“아, 사위! 사위가 어떻게……?”
“장모님, 여기 계셨군요. 하하하!”
“어, 어서 오시게.”
안나는 현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사위이기는 하지만 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난을 극복시켜 주었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마음 써준 사람들에게 신세를 갚으라고 엄청난 돈도 주었다.
그 덕에 이곳 검은 까마귀 마을에서 최고의 귀빈 대접을 받는 중이다. 다들 상전벽해가 된 안나의 처지를 부러워하면서도 고마워한다. 신기한 건 시기하거나 질투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기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돈이 부족하진 않으셨어요?”
“돈? 아, 아닐세. 안 부족했네.”
안나가 신세를 진 이웃은 이십여 가구였다.
그들 모두 빚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었다.
지긋지긋한 고질보다도 더 없애기 힘든 빚 제거되자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고마워했다. 이제 노력만 하면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의 딱한 사정에 안나 여사는 지갑을 열었다. 어차피 쓰라고 준 것이고, 사위가 얼마나 부자인지를 알기에 기꺼이 빚을 갚아준 것이다. 본인도 어려울 때가 있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빚 탕감이 끝났다. 300가구쯤 어려움이 해결되자 더 이상 읍소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검은 까마귀 마을엔 더 이상의 빚쟁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을의 모든 가구가 빚에 허덕이고 있다는 건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을 잔치를 벌일 예정이다. 이제 빚도 갚았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의 잔치이다.
안나는 이곳에 올 때 식재료를 다섯 트럭이나 가져왔다.
촌장이 나서서 검은 까마귀 마을 800여 가구 전부에게 골고루 분배하고도 많이 남아 그것으로 한바탕 큰 잔치를 벌이려 모인 것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넓은 집이 세르게이네 집이다.
마구간을 개조한 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모여 잔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하던 중이세요?”
“으응, 잔치. 마을 잔치를 준비하는 중이었네.”
“아! 그렇군요. 저도 끼워주실 거죠?”
“그럼, 그럼! 당연하지. 자자, 어서 이쪽으로 앉게나.”
“하하! 네. 근데 뭐 만드시던 중이세요? 저도 요리를 좀 하는데.”
현수의 너스레를 들은 할아버지 하나가 듣던 중 반갑다는 듯 얼른 끼어든다. 여든은 족히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다.
“그려? 잘되었네. 그렇지 않아도 메뉴가 시원치 않아 걱정했는데 안나네 사위가 요리를 잘한다니 참 다행이구려. 안 그려, 할망구?”
“아이고, 그러게 말이에요. 한국 사람이라고 했지? 거기 불고기가 아주 맛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그거 할 줄 아는가?”
“불고기요? 그럼요. 시켜만 주십시오. 한국의 불고기 맛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불고기의 주요 재료인 참기름, 간장, 물엿, 그리고 청주가 없다고 난색을 표했겠지만 현수는 아니다.
이런 건 아공간에 충분히 담겨 있다. 800가구가 아니라 8,000가구를 위한 불고기 요리도 가능하다.
“그랴? 그거 잘되었구만. 그렇지 않아도 그 맛을 못 본 게 아쉬웠는데. 자자, 주방은 저쪽이네.”
이 할아버지는 작년 가을에 노보로시스크 시내에 갔었다.
그때 어떤 기업이 노보로시스크 진출을 위한 한국의 밤 행사를 열었다. 회사를 알리는 동영상을 보여준 후엔 한국 음식을 대접했다. 그때 불고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음 날 신문과 방송으로 보도될 정도였다.
그날 할아버지는 인근에 있었지만 행사가 있다는 것을 몰라 불고기 맛을 못 본 게 아쉬웠던 것이다.
“아! 그래요? 그럼 솜씨 한번 보여드리죠.”
현수는 양복 상의를 벗고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안나 여사는 현수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만류하려는데 현수가 선수를 친다.
“장모님, 장모님도 제 솜씨 아직 못 보셨죠? 오늘은 장모님을 위해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렇게 말하곤 주방으로 들어간다. 전기요금을 아끼려 와트 수가 낮은 전구를 써서 그런지 어두컴컴하다.
사람들은 불고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들이밀고 보고 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이래 가지곤 불고기 못 만들지. 자아, 매스 패시네이션(Mass fascination)!”
나직이 중얼거린 이 한마디에 모두의 눈빛이 달라진다. 매혹 마법에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젊은 여자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이 마법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의 효력이 다하는 순간까지 오로지 현수만 생각하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10서클 마스터인지라 저서클 마법의 효력은 상당히 길다. 젊은 여인이 있었다면 최소 일 년 동안은 상사병을 앓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모두의 눈빛이 변하자 부러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모두 안으로 들어가세요. 안에 계시면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알겠네. 자네 말대로 하지.”
노인들부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금방 주방이 빈다.
“아공간 오픈!”
얼른 아공간을 열곤 필요한 재료들을 꺼냈다. 매혹 마법에 현혹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
전구가 있는 부위에 광구가 생기도록 하니 한결 밝아진다. 현수는 서둘러 재료를 섞었다. 양념이 잘 배어들려면 시간이 필요하기에 타임 패스트 마법까지 걸었다.
다음은 속 깊은 프라이팬을 꺼내 양념된 불고기를 조리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이므로 먼저 만든 것은 보온 마법까지 걸어두었다. 그래야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일련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안나 여사는 검은 까마귀 마을 사람들에게 킨샤사 이주를 권했다.
8장 성자 강림 사건
킨샤사에는 추운 겨울이 없다는 말에 모두들 솔깃해한다. 러시아의 겨울은 몸서리쳐지도록 춥기 때문이다.
공기가 차가운 겨울에는 근육이 수축되고 관절이 경직돼 관절염이 발생하기 쉽다. 이는 관절 부위가 붓거나 열감이 동반되며 통증이 느껴지는 병이다.
한국에서도 겨울이 되면 퇴행성관절염 증상은 더 심해진다. 하물며 러시아는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게다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국으로 간다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뿐만이 아니라 언어도 다르다.
하여 사람들이 망설이는 표정을 지을 때 안나 여사가 말을 잇는다.
“거기 가면 우리 사위가 집도 하나씩 줄 거예요. 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 직업도 줄 거구요. 그러니 가요.”
누군가 눈이 번쩍 뜨인다는 듯 재빨리 반문한다.
“안나, 거기 가면 진짜 집을 줘?”
안나 여사의 반응 또한 빠르다.
“네, 그럼요! 우리 사위가 마음이 좋아서 집에서 일하는 하녀들까지 다 집을 지어줬어요. 침대 같은 가재도구도 주고 TV, 세탁기,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도 다 줬어요.”
“정말? 아무 조건도 없이?”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늙고 배운 바 없어 쓸모가 없는 인생이다. 목숨이 붙어 있어서 하루하루 사는 거지 무슨 희망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기만 하면 집도 주고 직장까지 준다니 당최 믿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에 안나 여사는 준비한 비장의 무기들을 푼다.
“할머니, 우리 사위가 만들어서 파는 게 있는데, 혹시 쉐리엔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쉐리엔? 살 빼는 거?”
들어본 적 있다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기에 안나는 힘을 얻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 쉐리엔 맞아요. 우리 딸 이리냐가 그거 모델 했잖아요. 그거 우리 사위 회사에서 만들어 파는 거예요.”
“정말? 쉐리엔은 없어서 못 산다는 거잖아.”
또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한다. 사실 쉐리엔이 좋다는 것만 알지 검은 까마귀 마을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먹어본 적이 없다. 이자를 못내 이반스키 일당에게 늘 당하고 사는데 그거 살 여유가 있겠는가!
“맞아요. 그 쉐리엔. 그거 팔아서 엄청나게 큰 부자가 되었어요. 킨샤사에 가면 저택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