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1
잠시 저택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규모, 장식, 가구, 가전제품, 식재료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치 딴 세상 이야기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재벌보다 더 부자인 현수의 일상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안나, 자네 말이 사실인지 사위에게 물어봐도 돼?”
60살쯤 된 할머니의 말이다.
“그럼요. 조금 있다 오면 물어보세요.”
대화가 이쯤에 이르렀을 때 주방의 현수는 약 50명분의 불고기를 만들어냈다. 조리에 마법이 사용되었기에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부엌의 접시며 그릇을 보니 이빨이 나가 있지만 어쩌겠는가! 아공간의 것을 꺼낼 수는 없다.
하여 워싱 마법으로 세척시킨 후 수북하게 담아서 내갔다.
주방 문이 열리면서 냄새가 번지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자아, 불고기 나갑니다!”
잠시 후, 모두들 접시에 코를 박고 폭풍 흡입을 시작한다. 러시아 사람들의 입맛에도 불고기는 일품이기 때문이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 현수는 200인분의 불고기를 만들어냈다. 이걸 내어주니 금방 빈 그릇이 쌓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달려들어 먹어댄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고기는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일부는 지르코프와 운전자에게도 전해졌다.
둘 다 불고기 맛에 반해 더 달라고 왔다가 눌러앉아 배를 채웠다. 빈대떡과 해물파전을 만들어주면서 막걸리와 소주를 내주었다. 어디에서 난 건지 묻지도 않고 잘도 먹는다.
본격적인 잔치가 벌어지자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들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기 어려워진 현수는 준비된 재료를 주고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익히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잠시 후, 현수 역시 잔치에 끼어들었다. 어색할 것 같아 지르코프의 옆자리에 앉았다.
먹고 마시는 동안 많은 질문이 오갔다. 안나 여사의 말이 사실인지를 묻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다들 자신들은 이미 늙은 데다 아무런 쓸모도 없다면서 자조 섞인 어투였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 이주하겠다고 하면 골라내리라 생각한 듯싶다.
“다들 텃밭에서 농사지으시죠?”
“텃밭 없는 집이 어디 있어? 그리고 그게 농사야?”
“네, 농사 맞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오시면 농사짓는 걸 도와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당근을 재배하려 하거든요.”
“당근을 심는다고?”
“네, 당근 재배하실 줄은 아시죠?”
“그럼. 근데 당근만 심나?”
“네! 도와주실 수 있죠?”
“그럼, 그럼. 근데 킨샤사라는 곳, 더운 데 아닌가? 당근은 28℃가 넘는 곳에서는 재배가 어려운데.”
노인의 말은 사실이다.
당근은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씨가 더워지면 줄기가 상하기도 한다.
킨샤사는 기온이 높고, 습한 열대기후이며, 우기와 건기가 있다. 연 평균 기온이 25.2℃ 정도 된다.
따라서 너무 더울 때를 빼면 당근 재배가 가능하다. 그런데 현수가 심으려는 건 당근이 아니라 바이롯이다.
당근과 비슷하게 생겼을 뿐 품종은 완전히 다르다. 다시 말해 열대기후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재배 가능하다.
그렇기에 노인의 말에 웃는 낯으로 킨샤사의 기온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월평균 기온이 23℃일 때도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아! 그럼 아주 더울 때는 일을 안 하겠구만.”
“당근이 안 자라면 그렇죠. 아무튼 가셔서 농사짓는 걸 도와주시면 주거를 제공해드릴 것이고 급료도 드립니다.”
“정말? 나 같은 늙은이도 괜찮은가?”
칠십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표정이 편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디 아프세요?”
“배가… 가끔 아픈데 오늘은… 으윽!”
말을 하다 말고 배를 움켜쥔다. 복통을 느끼는 모양이다.
“할아버지, 병원은 가보셨어요?”
“으윽! 병원? 아니! 으으윽!”
보아하니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볼 생각조차 못한 듯싶다.
“어디가 아프세요?”
“으으! 여기, 그리고 여기가… 으윽!”
통증을 억지로 참아내며 할아버지가 손으로 짚은 곳은 명치와 배의 오른쪽 위쪽이다.
“거기가 어떻게 아프신데요? 자주 아팠어요?”
“으윽! 여, 여기가… 으윽! 한 두어 시간쯤 이렇게 아프다가 괜찮아졌는데, 으으윽!”
심한 통증을 느끼는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다. 그러다 구역질을 하기 시작한다.
“우우욱! 우우우욱―!”
“아이고, 여보! 할아범! 여보!”
곁에 있던 할머니가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보아하니 배우자인 듯싶다.
“할머니, 할아버지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지난겨울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아프다고 한다우. 심하면 토하기도 하고 몸에서 열도 많이 난다우.”
“으음!”
현수는 뇌리 속에 담겨진 기억 가운데 이러한 증상을 보이는 질병을 찾아보았다. 러시아 사람이 가장 많이 걸리는 병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담석증이 이러하다.
“잠시만요. 제가 할아버지를 살펴볼게요.”
말을 마친 현수는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손목을 잡았다. 어찌 보면 진맥하는 모습처럼 보일 것이다.
“마나 디텍션!”
샤르르르릉―!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가 맥문을 통해 할아버지의 체내로 스며든다. 잠시 후부터 체내 상황을 속속들이 보고하기 시작한다. 나이가 많아 장기 대부분이 노화되어 기능이 떨어진 상태라고 한다.
그러던 중 담낭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었음을 보고한다.
담석이 담낭경부에 감입되면서 담낭에서 담관으로의 담즙 배출에 문제가 발생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담낭 내의 압력이 증가하였고, 담낭이 늘어나 통증이 발생된 것이다. 발열까지 있었다고 하니 담석증의 합병증인 담낭염, 또는 담관염이 심각하게 의심된다.
현수는 할아버지의 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노란 색깔이 엿보인다. 혈중 빌리루빈 수치가 상승되어 황달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이 상태로 놔두면 패혈증으로 악화되어 끝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이 모든 증상은 담석으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배를 가르거나 복강경을 이용한 담낭절제술 같은 근본적인 처치가 좋다.
수술하지 않는 방법으로는 초음파를 이용한 쇄석술이 있다. 다시 말해 초음파를 쏘아 돌을 잘게 부수는 것이다.
담석증의 경우 80%는 평생 아무런 증상도 보이지 않는다. 나머지 20%만이 복통을 느끼고, 그중 2%에서 담낭염 같은 합병증이 발생된다고 보고되어 있다.
“흐으음!”
진폐증의 경우는 미세먼지가 폐 속에 박혀 호흡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컴플리트 힐이나 리커버리, 회복 포션 같은 것으로도 효과를 볼 수 없다.
상처가 생겼거나 세포 조직이 변하여 발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석증 또한 비슷하다. 박혀 있는 돌이 문제이다.
마법으론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현수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뇌리를 뒤졌다.
한방 치료법으로 인진호탕과 대시호탕을 처방할 수 있다.
인진호탕은 인진호 40g, 대황과 치자 각 14g으로 만든다. 황달에 효험이 있다. 대시호탕은 시호 16g, 황금(黃芩)과 백작약 각 10g, 대황 8g, 지실 6g, 반하 4g으로 만든다.
담즙 배설을 촉진하고 담낭의 염증성 부종을 제거하며 근육의 긴장 완화 효과가 있어 담석증과 담낭염으로 인한 통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좋은 것이다.
이 밖에 뇌출혈, 고혈압, 위염, 복통, 신장 결석, 장염, 유행성 감기 등에도 처방될 수 있다.
“흐음! 생약이라 좋기는 한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단점이군. 한약을 먹어보지 않았으니 드시게 하는 것도 문제고.”
잠시 현수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기자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본다.
자네 사위이니 어서 설명해 보라는 표정이다. 안나는 현수가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말해줄 수는 없다.
극비 중의 극비이기 때문이다.
안나가 머뭇거리는 순간 현수는 정령들을 떠올렸다.
진폐증 치료엔 엘리디아가 아주 유용했다. 바람과 불의 정령을 사람의 몸속에 넣어 좋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혹시 노에디아의 능력으로 가능할까?”
담석도 돌이므로 흙과 암석을 관장하는 정령의 능력이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아리아니, 노에디아 불러줄래?]
[네, 주인님!]
이 마을에 당도하자마자 현수의 어깨 위에서 노래를 부름 즐거워하던 아리아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돈이 없어 석탄 같은 땔감을 살 수 없던 마을 사람들이 인근 숲의 나무를 마구 베어낸 것을 알고는 화를 냈다.
어찌 된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되었지만 현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말만 길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마나에 의지를 실어 보냈을 때 인근 숲을 둘러보며 귀여운 성질을 내던 아리아니는 쏜살처럼 복귀했다.
그리곤 명이 떨어지자마자 노에디아를 호출하기 위해 다시금 떠났다.
‘마스터,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노에디아는 사람들 많은 이곳에 왜 자신을 불렀느냐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이 사람 몸속 여기쯤에 작은 돌이 박혀 있을 거야. 그거 어떻게 안 돼?’
현수가 담낭 부위를 손으로 짚자 노에디아가 시선을 모은다. 사람의 몸을 투시하여 들여다보는 모양이다.
‘말씀하신 대로 돌이 있습니다. 큰 것과 중간 치, 그리고 작은 것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것들 모두 가루로 만들 수 있겠어?’
‘뭐, 별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 해드릴까요?’
너무도 흔쾌한 답변인지라 약간은 맥이 빠진다.
안 된다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던 때문이다.
‘정말? 그래주면 좋지. 부탁할게.’
현수의 뜻을 전해 들은 노에디아는 눈을 크게 뜬다.
‘부탁이라니요. 마스터의 명이시니 당연히 따라야 할 일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가루로 내드리지요.’
“……!”
‘다 되었습니다, 마스터!’
현수가 노에디아에게 담석을 가루로 내달라 한 지 불과 수초 만의 일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1.3초쯤 될 것이다.
‘벌써?’
현수는 정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는 땅의 최상급 정령인 노에디아의 진실한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원도 설악산에 가면 울산바위가 있다.
설악산 신흥사의 연혁을 기록한 신흥사지라는 책에는 이 산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고 한다.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칠 때 산 전체가 뇌성처럼 울리어 마치 산이 울고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아 일명 ‘천후산(天吼山)’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는 산’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하여 울산이 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울산바위는 설악산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암봉이다.
둘레가 4㎞가 넘으며, 30여 개의 거대한 화강암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 높이만 200여 m에 달한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이렇게 큰 울산바위라 할지라도 노에디아의 의지가 실리면 손가락보다도 작은 자갈로 쪼개진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니 담석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닌 셈이다.
‘네, 아주 작은 가루가 되게 했습니다. 그것들은 지금 담낭에서 나온 담즙에 섞여 십이지장으로 흘러들고 있습니다.’
‘아, 고마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마스터를 위해 봉사할 수 있어 기쁠 뿐입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는 노에디아의 진심이다. 현수가 아르센 대륙으로 데려가지 않았다면 상급 정령인 상태로 얼마나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을지 모른다.
최상급으로 진화한 뒤 아리아니는 4대 속성 정령들에게 현수 덕에 3억 년의 세월을 벌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지구에만 머물렀다면 노에스에서 노에디아로 진화하는 데 그 정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담석을 가루로 내주는 일 따위는 수억 번 시켜도 된다. 진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