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95화 (994/1,307)

# 995

현수는 10만㎢짜리 자치령의 주인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세 개나 된다. 에티오피아에서 조차 받은 건 아직 외신을 타고 이곳까지 전해지지 않아서 모른다.

얼마 전 푸틴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앞으로 김현수 회장을 대할 때 타국 국가원수에 준하는 예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조차해 준 면적보다도 적은 국가가 수두룩하니 말입니다.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대한민국조차 조차지보다 규모가 작습니다.”

사업가일 때 이랬는데 이젠 성자라 한다.

당연히 대우가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현수의 사의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 한 발짝 물러선 것이다.

“무슨 말씀을. 당연한 일이지요. 그나저나 대통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현수는 찍소리 않고 벤츠에 올라탔다.

러시아 영토 내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푸틴이 보자고 했으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쿵, 쿵―!

문 닫히는 소리를 들어보니 방탄차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아, 그럼요. 잘 지냈습니다. 앞으론 좀 자주 만나 뵙게 되길 바랍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의 말엔 진심이 담겨 있다.

현수와의 인연이 시작된 이후 러시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다. 든든한 자금줄이니 잘 잡고 있으면 여러모로 좋기에 마음을 담아 한 말이다.

“네, 그래야지요. 러시아에서 할 일이 많으니 앞으론 자주 만나게 될 겁니다.”

“하하! 네. 자, 그럼 가시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벤츠가 부드럽게 움직인다.

현수 본인은 모르지만 현재 이 공항엔 상당히 많은 요원이 배치되어 있다. 공보실장인 페스코프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검은 벤츠가 멀어지자 윌리엄 스테판 기장이 스튜어디스인 스테파니 베나글리오에게 시선을 준다.

“크렘린궁 공보실장이 직접 영접을 나왔네.”

“그러게요. 저 정도면 거의 국빈급이잖아요.”

스테파니는 넋이라도 빠진 표정이다. 현수의 위상이 점점 높아져만 가는데 그걸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근데 우리 회장님이 정말 성자님이실까?”

“그러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번 비행엔 지르코프와 그의 심복 셋이 동행했다. 지르코프는 당연히 현수의 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심복 셋은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렇다 하여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건 아니다.

스테파니는 이들에게 음료를 제공하던 중 현수가 성자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진짜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듯한 이야기에 흥미가 돋아 왜 그런지를 물었다.

다행히 일행 중에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자가 있어서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검은 까마귀 마을에서 사람들을 바라만 보았는데도 병이 나았다는 말이다. 이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하여 말도 안 된다고 했더니 곁에 있던 사내가 입에 거품을 물며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그는 지르코프의 차를 몰았던 운전사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았는데 못 믿는다 하자 열변을 토한 것이다.

스테파니로부터 현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테판 기장 역시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여 AP(Autopilot Master Swich)로 설정한 뒤 기장석을 나섰다. 자동 비행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곤 지르코프의 운전사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없던 일을 지어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하는 중간중간 현수에 대해 지극한 경외감을 가졌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둘 다 현수가 성자가 된 스토리를 알고 있는 것이다.

“나야 모르지. 아무튼 회장님이 성자라면 우린 영광인 거야. 성자님을 직접 모시는 기장과 승무원이니.”

“어머! 정말 그러네요. 그나저나 저 외출 좀 해도 돼요? 모스크바에 친한 친구가 있어서요.”

“그래, 편한 대로 해. 휴대폰만 안 꺼놓으면 되니까. 회장님 움직이시게 되면 연락할 테니.”

“고마워요, 기장님!”

스테파니는 윙크를 날리며 배시시 미소 짓는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 * *

“하하! 어서 오시게.”

“네, 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현수가 러시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자 블라디미르 푸틴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도 있는데…….”

뒤늦게 일어난 메드베데프 역시 웃는 낯이다.

“네, 총리님도 안녕하셨지요?”

“덕분에. 앞으론 좀 자주 봅시다.”

“하하! 네, 그래야지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여 자주 오지 못했음에 대한 사과를 하자 푸틴이 거든다.

“어이구, 이 친구야! 우리 김 회장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이렇게 가끔이라도 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세. 그러니 타박하지 말게.”

“아, 네. 그렇지요. 제가 깜박했습니다. 김 회장님, 앞으론 자주가 아닌 종종 봅시다.”

“하하! 네, 그러겠습니다.”

자주나 종종이나 빈도를 나타내는 부사이다. 그리고 같은 어감의 어휘이기도 하다. 짐짓 너스레를 떠는 메드베데프를 보고 환히 웃어주었다.

셋이 자리에 앉자 푸틴이 먼저 입을 연다.

“검은 까마귀 마을에서 보여준 기적은 뭔가?”

“…벌써 보고가 올라온 겁니까?”

“자넨 우리 러시아의 귀빈이네. 그러니 잘 보호해야지.”

푸틴은 현수가 올 때마다 경호를 하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뭔가를 알아내기 위한 경호가 아니라 순수한 의미였기에 감추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엔 침술이라는 것이 전래됩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좋은 스승님을 만나 그걸 익혔지요.”

현수에 대한 행적을 조사해 보면 덕항산에 머물던 기간이 드러나게 된다. 그때 산속의 기인으로부터 배웠다고 둘러대려 말한 것이다.

“한국의 침술을 익혔다고?”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어찌 침술에 대해 모르겠는가!

현수에 관한 보고가 올라오자 즉각적으로 동양 의술에 관한 조사를 지시했고, 오늘 아침 잘 정리된 보고서를 받았다.

약을 쓰지 않아도 대단한 효과를 보인다고는 하지만 전 세계 어떤 병원에서도 손 놓은 난치병와 불치병을 몇 분 만에 치료해 낸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수가 당도하기 직전 푸틴은 가에탄 카구지의 막내아들이 어떤 병에 걸려 어떤 치료를 받았으며 어떻게 하여 완치되었는지에 대한 보고서도 받았다.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에서 포기한 환자였는데 현수를 만나 단 한 번의 시료를 받고 완치되었다.

이걸 어찌 평범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하여 진짜냐는 의미로 반문한 것이다.

“네, 제가 남들보다 머리가 좋아 인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일반적인 범주를 넘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범주?”

평범함을 넘어 비범함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자인이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바라만 봤는데 심각하게 곪아 있던 환부에서 새살이 돋았다고 하는데 어찌 의술의 힘이라 하겠는가!

“검은 까마귀 마을 사람들이 저에게 성자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많이 과장된 겁니다. 그분들은 침이라는 걸 경험한 적이 없어 신기해 보였기에 그런 듯하네요.”

“그런 건가?”

현수의 설명이 그럴듯하다 여기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손목을 내미는 푸틴이다.

“나도 진맥이라는 것 한번 해주게. 손목만 만져보면 무슨 병인지 알아낸다고 들었네.”

“…알았습니다. 한번 보죠.”

현수는 푸틴의 손목을 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의사가 진맥하는 모습과 거의 같다.

손목을 잡는 순간 ‘마나 디텍션’이라 중얼거린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 손목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목을 통해 푸틴의 체내로 스며든 마나는 허리에 이상이 있음을 보고한다. 디스크 환자인 것이다.

지난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당시 다리를 저는 듯 보였다.

그때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관계자는 푸틴이 허리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이 때문에 해외 순방이 취소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흐음! 한쪽 다리에서 당기는 증상이 느껴지고, 누워서 다리를 올리면 통증이 심해지나요?”

“허어! 역시 명의로군. 손목만 잡고도 그런 걸 알 수 있나? 대단해! 정말 대단해!”

“한국의 전통의학에선 그렇습니다. 치료해 드릴까요?”

“…부탁하네.”

푸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수는 곁에 서 있는 비서에게 시선을 준다.

“침을 놓으려면 침상이 필요합니다. 준비되나요?”

대답은 메드베데프가 한다.

“저기 저 안쪽에 침대가 있네.”

러시아는 대통령의 임기가 6년이며 3선은 불가하다.

하여 2회 연임 후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푸틴은 총리를 맡았다.

임기가 끝난 후 다시 출마하여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렇기에 메드베데프는 이 집무실을 6년간 사용했다. 하여 집무실 안쪽에 휴게공간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요? 그럼 가시죠.”

현수가 일어서자 푸틴이 따라 일어서며 경호원들에게 손짓한다. 안전하니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다.

푸틴은 허리 디스크 때문에 해외 순방도 여의치 않고, 무엇보다도 연인인 알리나 카바예바 의원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

현수가 준 바이롯 덕분에 간신히 체면은 살렸지만 고질적인 디스크 때문에 마음껏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성자라 불리는 현수가 치료를 해준다니 얼씨구나 하며 일어선 것이다.

“자, 이쪽에 엎드리세요.”

“알겠네.”

푸틴은 엎드린 채 허리띠를 푼 후 와이셔츠를 위로 당겨 올린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이 드러난다.

현수는 들고 있던 가방에 손을 넣어 침을 꺼냈다. 아공간에 있는 것을 꺼낸 것이다.

“시침하겠습니다. 약간 따끔할 수 있어요.”

“걱정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현수는 신중한 표정으로 푸틴의 허리를 만져보곤 침을 꺼내 들고 시침할 자리를 찾았다. 마법을 쓰지 않아도 침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푸틴은 4, 5번 요추에 문제가 있었다.

진맥해 보니 족지소음신경(足之少陰腎經)과 족지태양방광경(足之太陽膀胱經)을 다스리면 원인이 제거될 듯하다.

현수는 맥진을 통해 허와 실[虛實], 그리고 한과 열[寒熱]을 가늠해 보았다.

‘흐음! 황제내경(黃帝內經)에 기록된 대로 이사일보(二瀉一補)로 시침하면 되겠군. 근데 한번에 완치시키려면 어찌해야지? 시침 후에 마법을 써야 하나?’

현수는 가급적 마법을 쓰지 않을 생각이다. 하여 예전에 읽은 의서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그래, 사암도인오행침법, 자오유주운침법, 기경침법, 벽해선사침법 등을 활용하면 되겠군.’

시계를 살펴보았다. 자오유주운침법 때문이다.

이 침법은 경혈이 열리는 시각이 따로 있는데 그 시각에 시침하라 하기 때문이다.

‘마침 괜찮은 시각이네.’

현수는 신중한 표정으로 혈 자리에 침을 놓았다. 그냥 침만 놓는 것이 저어되어 침 끝에 미량의 마나를 실었다.

더 빠른 효과를 보기 위한 시도이다.

약간 따끔했는지 푸틴은 시침할 때마다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를 무시했다.

맨 처음 시침한 자리는 족태양방광경에 속하는 족통곡혈이다. 왼발 새끼발가락 바깥쪽이다.

두 번째는 족소음신경의 태계혈이다. 발꿈치 위쪽에 맥이 뛰는 우묵한 곳이다. 세 번째 시침한 자리는 축빈혈이다. 장딴지 살이 갈라지는 가운데 위치한다.

두 곳은 사(賜)하고 한 곳은 보(補)하는 시침을 한 후 잠시 기다리며 진맥했다. 경험이 일천하기에 한의사가 하는 진맥이 아니라 마나 디텍션 마법으로 상황을 살핀 것이다.

한편, 메드베데프는 의아한 표정이다. 아픈 건 허리인데 침을 다리에다 놓았다. 그것도 겨우 세 개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결과는 두고 보면 알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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