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98화 (997/1,307)

# 998

“테리나가 여기에?”

“네, 얼마 전부터 와서 절 도와주고 있었어요.”

“그래?”

대화를 나누면서 현관 안에 발을 들여놓자 안톤이 정중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아, 안톤!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있었죠?”

“물론입니다. 신수가 훤해 보여 좋습니다.”

“그래 보여요? 하하! 좋아 보인다니 기분 좋네요.”

짐짓 너스레를 떨 때 하녀장 타찌아나와 요리장 타날리야가 다가와 고개를 숙인다.

“어서 오세요, 가주님!”

“다시 뵈니 좋네요. 그간 안녕하셨지요?”

둘에 이어 마가리타와 플로라 등도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지극히 공손한 모습이다.

모두들 정갈한 의복을 입고 있고 혈색이 좋아 보인다. 좋은 대우를 받으며 잘 지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여 덕담 한마디 하려는데 저쪽 문이 열리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다.

엷은 베이지색 정장과 검은색 스커트로 이루어진 깔끔한 디자인의 투피스를 걸친 예카테리나이다.

“회장님 오셨군요.”

“아! 테리나! 여긴 어떻게……?”

현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테리나의 뒤쪽에서 두 청년이 나온 때문이다.

“제 동생들이에요. 빅토르, 세르게이, 인사드려. 이실리프 그룹의 총수이신 김현수 회장님이셔.”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처음 뵙습니다. 빅토르 브레즈네프입니다.”

“저는 세르게이 브레즈네프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아, 그래요. 나는 김현수라고 합니다.”

둘 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재학 중인데 빅토르는 화학과 4학년, 세르게이 역시 4학년으로 지질학을 전공하고 있다.

둘 다 테리나처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들이라 한다.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둘 다 이실리프 자치령의 직원이 된 때문이다. 자치령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인력을 충원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인맥을 총동원하여 우수한 인재들을 끌어들이도록 한 것이다.

그러는 동시에 이리냐를 도와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테리나도 함께한다.

이리냐와 테리나는 많이 친해진 듯 스스럼없는 모습이다.

빅토르와 세르게이는 러시아에선 찾아보기 힘든 연봉을 받기로 한 만큼 정말 최선을 다해 일하는 중이라 한다.

차 한 잔을 마시며 현수는 이들 둘과 대화를 나눴다. 자치령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청취한 것이다.

젊은이답게 진취적이며 긍정적 사고를 가졌음이 확인되어 내심 흐뭇했다. 자신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줄 든든한 직원이 생긴 때문이다.

차를 마신 뒤에는 저택 내, 외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이 바뀌어 있다.

외부는 조경사들이 공들인 흔적이 그대로 엿보인다.

그런데 아직 날씨가 서늘해서 식재 후 적응이 원만하지 않은 듯싶다. 이걸 아리아니가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는가!

시들시들한 나무들을 보곤 곧바로 작업을 시작한다. 4대 정령 모두 호출되어 아리아니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한다.

12장 까불면 뒈진다!

노에디아는 부족한 양분을 넉넉하게 끌어모아 주었고, 엘리디아는 충분한 수분을 보충해 주었다.

이그드리아은 식물 생장에 적합한 온도가 되도록 온기를 생성시켰고, 실라디아는 이게 훈풍이 되도록 했다.

아리아니는 일련의 작업을 마칠 때쯤 숲의 요정이 내릴 수 있는 가호를 베풀어주었다.

‘주인님, 여신의 가호를 얘들한테도 베풀어주실 거죠? 제가 보니까 얘들, 시원치 않아요. 그러니 꼭이에요, 꼭!’

저택 외부 구경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설 때쯤 현수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아리아니가 한 말이다.

‘알았어. 조금 이따가 해줄게.’

곁에서 이리냐가 쫑알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이아 여신의 은총까지 베풀면 이 저택의 초목들은 병충해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될 것이다.

직사광선이 너무 강하거나 수분이 부족해도 잎이 시드는 일이 없고, 양분이 부족한 일도 없다.

유실수는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은 과실을 생산해 낼 것이고, 꽃이 피면 향기가 진동할 것이다.

내부로 들어와 가장 먼저 주방에 가보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식기가 모두 한국산으로 교체되어 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락앤락 용기 속에 각종 식재료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프라이팬과 냄비, 심지어 주걱과 국자까지 한국산이다.

2층은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보다 더 고상하고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모습이다.

이 저택은 대지 10,000평에 건평이 2,000평이다. 3층 건물이지만 현대식 건물로 따지면 7층 높이이다.

층고가 높아 시원시원한 느낌이 든다.

지하실도 3층으로 지어져 있는데 지하 1층은 반지하이다.

전에는 주인이 사용하는 침실만 열 개가 있었다.

가장 크기가 작은 방의 실면적이 30평 이상이었고, 너른 건 120평짜리였다. 이 방들의 곁에는 화장실, 샤워실, 욕실, 드레스 룸, 비품실 등이 딸려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통폐합되어 있다.

2층엔 현수의 침실과 거실, 그리고 서재와 체력 단련을 위한 방들이 준비되어 있다. 물론 부속실은 별도이다.

나머지 면적은 네 개의 커다란 방과 부속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를 위한 방들이다.

방 하나가 남았기에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이야기해 준다며 얼버무린다.

3층은 미용과 육아를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련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인테리어이다.

이리냐의 안목을 엿볼 수 있어 현수는 기분이 좋았다.

예쁘고, 상냥한데다, 몸매도 좋고, 머리도 좋은데 미적 감각까지 갖췄으니 어찌 불만이겠는가!

여기저기 구경하는 동안 이리냐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방마다 구경시켜 주면서 뽀뽀를 해댄다.

현수로부터 사랑 받는 일에 굶주려 있던 때문이다. 하지만 침실로 갈 수는 없었다. 아래층에 테리나와 그 동생들이 있고,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저택 구경을 마친 현수는 테라스로 나가 차를 마셨다.

이 자리엔 테리나도 동석했다. 몽골과 북한에 들어가기 전에 법률적인 검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테리나는 하버드 로스쿨 출신답게 빈틈이 없다.

가히 장자방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모든 상황과 경우의 수를 꿰고 있었다.

참고로, 장자방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인 장량(張良)을 일컫는 말이다. 장량의 자가 자방(子房)이어서 장자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유방이 이르기를, ‘장량은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했다.

테리나는 국제정세와 경제상황, 그리고 이웃 국가의 관계와 향후전망을 종합하여 세 개의 안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이 중 무엇을 선택하든 다 현수의 뜻대로 될 터이니 편히 고르라고 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음을 의미한다.

현수는 테리나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답고 조신하며 영특한 두뇌를 가진 여인이다.

하나 단점이 있다면 아내가 셋이나 있는 유부남을 포기하지 못해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결혼 전에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가 있는 자리에서 맹세한 바 있다. 더 이상의 여인은 거두지 않겠노라고.

조금 더 일찍 만나 연애 전선에 끼어 있었다면 테리나 역시 현수의 여인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경쟁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수는 이미 지나가 버린 버스다.

타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현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반짝인다.

현수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대화를 이어갔다. 보고 받을 건 받아야 하고 의논할 것은 의논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테리나와의 대화는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건너편 저택으로 가야 했이 때문이다.

러시아의 밤을 지배하는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의 저택이다.

현수가 당도했다는 소식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귀가하는 중이라 했다. 아울러 올가와 나타샤 부부도 모인다.

이리냐와 동행한 현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을 즐겼다.

올가와 나타샤 부부는 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현수의 위상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지나 사람들의 느긋함은 만만디(慢慢的)라는 세 글자로 요약된다. 행동이 굼뜨거나 일의 진척이 느림을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만(慢)은 ‘게으르다’, ‘거만하다’, ‘오만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글자이다.

아무튼 지나 사람들을 왜 만만디라 정의하느냐고 물으면 대륙 사람의 기질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런데 러시아는 지나보다도 훨씬 더 넓은 나라이다.

영토 면적 세계 1위로 약 1,709만 8,242㎢이다. 대한민국보다 170배 이상 넓은 국가이다.

지나는 세계 5위인데 약 959만 8,094㎢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지나보다도 더 만만디하다.

러시아 관공서의 공무원 가운데 일부는 너무 느릿느릿하여 민원인들의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민원인이 와도 전화 통화를 하느라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개인적인 용무까지 다 끝나야 민원인이 제출한 서류를 접수한다. 그런데 그 일을 시작할 생각조차 없다.

언제든 제 마음이 내켜야 그때가 민원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시각이다. 화가 나지만 방법이 없다. 한국도 그렇지만 대들어봤자 좋을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랐다.

이실리프 자치령 개발 사업과 관련된 일 때문에 관공서를 찾아가면 그야말로 초특급으로 처리된다.

예전 같으면 미리 뇌물을 안 주면 일 처리를 미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관행적인 뇌물을 주려 해도 받지 않는다.

그걸 받으면 아주 개박살이 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모든 관공서엔 푸틴의 명령이 하달되어 있다.

크렘린궁에서 직접 내려 보낸 이 서류엔 이실리프 자치령에 관계된 일은 무엇이든 우호적으로 협조할 것이며, 초특급으로 처리해 주라고 쓰여 있다.

이 과정에서 누구든 뇌물을 받거나 불편부당한 일을 저지르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즉시 파면 조치되고 감옥에 갇히게 됨이 굵은 글씨로 명시되어 있다.

심지어 ‘적극 협조’, ‘최대한 신속한 일 처리’, ‘뇌물 요구’, ‘불편부당한 일 발생’이라는 구절은 굵은 글씨일 뿐만 아니라 붉은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여겼는지 박스 안에 글씨가 들어가도록 해놓았고, 폰트의 크기도 다른 것보다 확연히 커서 안 보였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한마디로 까불면 뒈진다는 뜻이다.

러시아에서 누가 있어 푸틴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겠는가!

공무원들은 서류가 접수되면 그 즉시 일을 시작하고,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부족한 부분을 챙겨주기까지 한다.

유리와 안드레이는 전직 판사와 검사인지라 공무원 사회가 어떤지를 잘 알고 있다. 하여 여의치 않을 경우 장인의 힘을 빌어서 쓸 생각을 품었다.

레드마피아로부터 협박을 받고도 뻗댈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올가의 남편 유리 파블류첸코와 나타샤의 남편 안드레이 자고예프는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중 새삼스레 깨달은 사실 하나가 있다.

향후 150년간 현수는 이실리프 자치령의 왕(王)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국법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며, 완벽하게 치외법권이 보장되어 있다.

푸틴은 러시아의 정권이 바뀌더라도 자구(字句) 하나조차 못 바꾸도록 해놓았다.

막대한 양의 황금을 대가로 챙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업률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일이며, 상당히 많은 세수 확보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신경 써준 것이다.

어쨌거나 현재까지는 자치령을 다스릴 법이 없다. 따라서 현수의 말 한마디가 그대로 국법이 된다.

그런데 자신들은 이 왕국을 반분하여 통치하는 총독 내지는 내무대신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서열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현수는 장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특별한 일 없이 이바노비치가 은퇴하게 되면 50만 레드마피아의 수장이 된다. 현재로선 이럴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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