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3
하여 기사는 현수의 빈틈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마치 철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어떤 공격을 하든 그것을 저지하고 곧바로 반격할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인이 수세에 몰려 쩔쩔매게 된다. 하여 눈알만 굴릴 뿐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어이! 그 긴 걸 들고도 못 들어오는 거야? 그럼 내가 가? 내가 먼저 공격할까?”
현수가 마치 동네 양아치처럼 슬쩍슬쩍 어깨를 들썩이는데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덥지도 않은데 사내의 이마에선 진땀이 솟기 시작한다.
“……!”
어쩌면 상대를 잘못 파악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직감한 때문이다.
가가린 백작이 가르침을 내릴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상대에게서 빈틈을 찾을 수 없거든 그와의 대결은 피해라. 분명 너보다 고수이기에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다.”
“명색이 기사인데도 그래요?”
“기사는 목숨이 두 개더냐? 무모한 대결은 명만 짧게 할 뿐이다. 오늘은 물러나지만 수련을 거듭하여 훗날 그 치욕을 갚는 게 더 현명하지 않겠느냐?”
“네! 스승님의 말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가가린 백작이 한마디 더했다.
“그런데 말이다. 가끔은 진짜 고수가 아닐 수도 있다.”
“네? 진짜가 아니라니요?”
“우연히 빈틈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걸 이야기하는 거다.”
“아……!”
“그럴 땐 먼저 움직여 상대를 시험해 보거라. 그래도 빈틈이 안 보이면 그때는 줄행랑이 상수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오나라 합려(闔閭)를 섬기던 명장 손무(孫武 : BC 6세기경)가 있었다.
그가 저술한 손자병법을 보면 제36계가 주위상(走爲上)이다. 불리하면 도망치라는 것이다.
가가린 백작은 아르센 대륙의 귀족이며, 명망 높은 기사이다. 대개의 귀족과 기사들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지구에서도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 이러했다.
그런 기사들 이야기 중 하나가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쓴 돈키호테이다.
주인공 돈키호테는 자신이 잘나가는 기사라 생각하는 살짝 맛이 간 놈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비리를 바로 잡겠다며 늙은 말 로시난테(Rocinante)를 타고 돌아다닌다.
그러다 길가의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한다. 당연히 소탕해야 하는 대상이기에 돈키호테는 말을 몰아 달려갔다.
결과가 어떻겠는가!
무모함에 대한 예를 들 때 이 부분을 많이 인용한다.
그런데 이곳 아르센의 기사 중 상당수에겐 돈키호테 같은 기질이 있다. 그래서 아무리 불리해도 도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에 임한다.
물론 이럴 경우 거의 대부분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그걸 명예로 여기니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웃기는 일이다.
아무튼 가가린 백작은 불리하면 줄행랑을 놓으라고 가르쳤다. 이곳의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이며, 어떤 면에서는 선구자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상대가 좀처럼 다가오지 않자 현수는 슬쩍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싱글싱글 웃어주었다. 비웃는 듯한 분위기이다.
“어이! 공격 안 하고 계속 그러고만 있을 거야? 그럼 짧은 걸 든 내가 공격한다.”
“그, 그러시든지……!”
녀석은 당황한 듯 살짝 말을 더듬는다.
“근데 네 이름은 뭐냐?”
“나? 나는 라만차 드 판테스다.”
“호오, 성이 있군. 귀족이냐?”
“아, 아버지가 준남작이시다.”
“그래? 그나저나 니가 공격을 안 하니 내가 먼저 공격하지. 이게 보기엔 이래도 제법 예리하니 주의해야 할 거야.”
날 길이 15㎝짜리 대거를 들고 140㎝짜리 클레이모어를 든 상대에게 먼저 공격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나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돈키호테가 풍차에게 달려드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라만차 드 판테스가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난 때문이다. 이는 현수가 아무렇게나 대거를 흔들고 있음에도 전혀 빈틈을 발견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고수다! 으으, 왜 참견은 해가지고…….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스승님 말씀대로 튀어야 하는데 어디로 가지?’
좌우로는 갈 수가 없다. 길다란 담장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방으로 빠져야 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둡지만 다행히 길은 잘 닦여 있다.
빌모아 일족의 감독하에 브론테 왕국에서 피난 온 일꾼들이 만든 포장도로이다. 가로세로 각기 15㎝짜리 돌을 박아서 만들었는데 색상을 고려하여 하나의 그림이 되도록 박았다.
이실리프 자치령이 영원무궁토록 발전하라는 의미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느껴지도록 한 것이다.
어쨌거나 아주 잘 닦인 도로이니 마구 달려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불상사는 없다.
흘끔 뒤를 돌아본 라만차는 짐짓 상대의 공격에 대비한다는 듯 클레이모어를 고쳐 잡는다.
“더, 덤벼!”
“짜식! 쫄았구나.”
라만차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진짜로 쫄아 있었던 것이다.
“쪼, 쫄기는! 누, 누가 쫄았다고 그래? 근데 넌 누구냐? 마법사 같은데 칼도 잘 쓰냐? 마법사야, 검사야?”
“나? 마법사이면서 검사이기도 하지. 활도 잘 쏴!”
“화, 활도……?”
얼른 현수의 등을 바라본다.
활이 거기 걸려 있다면 도주하다 등에 화살이 꽂히는 불상사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하여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이다. 현수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라만차는 볼 수 없었다.
횃불을 등지고 있었던 때문이다.
현수의 입술은 ‘아공간 오픈’이라는 모양이었다. 곧이어, ‘아리아니! 활과 화살 하나 부탁해’라고도 움직였다.
아공간 관리자 아리아니의 움직임은 섬전처럼 빠르다.
그렇기에 현수의 손에 활이 쥐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초 남짓하다. 다음 순간 라만차가 경악성을 토한다.
“헉……!”
현수에겐 분명히 활이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로브 안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걸 꺼내려면 로브를 들춰야 한다.
로브가 펄럭이지 않고는 활을 꺼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라만차는 대경실색하며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화, 활! 그건 어디서……. 누, 누구십니까?”
현수는 대답 대신 조준했다.
타깃은 라만차의 뒤쪽 의나무에 달린 손가락 끝마디만 한 붉은 열매이다.
이를 자신의 이마를 조준했다 느낀 라만차는 옆으로 이동하며 클레이모어를 고쳐 잡는다.
화살이 날아오면 재빨리 떨궈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보호할 헬멧을 쓰지 않았고, 아머도 걸치지 않았으므로 화살에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
심장에 맞아서 죽으면 단숨에 죽으면 그만이지만 금방 죽지 않는 경우엔 나중에 아주 큰 고통을 겪는 수가 있다.
파상풍(Tetanus)에 걸리게 되면 목과 허리가 뒤로 젖혀져 몸이 활처럼 휘어지는 각궁반장(角弓反張) 증세가 나타난다.
아울러 입을 벌리거나 음식물을 삼키기 힘들고, 몸의 모든 근육이 경직되며, 경련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진다.
이런 지독한 고통을 겪으며 죽게 되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다시 달싹인다.
“아리아니! 활과 화살 아공간 입고해!”
“넹―!”
말 떨어지기 무섭게 빈손이 된다. 현수는 다시 대거를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아리아니는 지구에서 너무 많은 걸 배운 듯하다. 대답을 해놓고는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나 귀엽죠?’ 하는 표정이다. 현수가 싱긋 웃어주는 동안 라만차의 두 눈은 화등잔만 해진다.
순식간에 무기가 바뀌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허억……!”
또 한 번 경악성을 토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어찌 이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가!
사라진 활과 화살은 어디로 갔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등에 맨 것도 아니고, 로브를 들추고 안에 넣은 것도 아니다. 하여 어디에 있나 찾느라 잠시 눈알을 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다.
“어이! 이제 슬슬 시작해야지. 아까 네 클레이모어엔 눈이 없다고 했나? 보다시피 이 대거에도 눈은 없어. 그러니 조심해야 할 거야.”
슬쩍 대거의 양쪽 옆면을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빈틈을 찾을 수 없던 라만차는 긴장하는지 마른침을 삼킨다.
‘으으, 진짜 고수잖아! 쓰벌, 나 이제 새 됐다.’
라만차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핀다. 현수가 한 발짝이라도 다가서면 그 즉시 튀려는 준비를 하는 중이다.
이때 현수가 갑자기 다가오며 대거를 쑥 내민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가히 섬전이다.
“켁! 큭―!”
어느새 턱밑에 대거가 닿아 있다. 싸늘한 느낌이다. 이제 상대가 힘주어 쑤실 것이다. 그럼 세상과 하직이다.
라만차는 와락 겁을 느끼곤 부들부들 떤다.
그러다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도 미룬 채 오로지 수련장에서만 살았는데 너무도 허무하다.
그것도 마법사의 검에 의해 죽는다!
기사로서 치욕이다.
하지만 반항할 상황도 아니다. 하여 네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미구에 닥칠 고통이 겁이 났지만 찔리면 바로 죽을 것이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반응이 없자 슬며시 오른쪽 눈만 떴다. 상대가 오른손잡이이니 왼쪽을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열린다.
“이제 앞으로 가서 봐도 되지?”
“네……? 아! 네에, 그럼요.”
라만차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진짜로 말 안 해줄 거야? 저 앞에 뭐가 있기에 그렇게 보는 거였어?”
“네? 아, 저 앞엔 제 스승님이신 가가린 백작님과 스미스 백작님께서 계십니다. 지금 깨달음을 얻으셔서 소드마스터의 반열에 오르시는 중이라 하여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래? 뭐 별로 볼 것도 없군. 여기 계속 있을 건가?”
“네? 아, 네에. 그럼요.”
“그럼 두 백작이 명상에서 깨어나면 바실리로 날 찾아오라고 하게.”
“바실리요……? 거기서 누구를……. 서, 설마……!”
라만차는 자신의 뇌리를 스친 인물과 현수가 동일인인지 여부를 가늠하고 있다.
이실리프 자치령의 주인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은 이실리프 마탑주이면서 위저드 로드이고, 그랜드 마스터이다.
겉보기엔 25세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300세 정도이며, C급 용병 차림을 즐겨한다고 한다.
스승인 가가린 백작이 말하길 하인스 마탑주님은 매우 너그럽고, 소탈한 분이기는 하나 심기를 건드리면 어느 나라든 패망시킬 정도로 강력한 분이시다.
10서클 마스터에 오르신 분이니 드래곤보다 약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절대 무례히 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자칫 테리안 왕국의 패망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라만차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진다. 아울러 전신에서 진땀이 배어나온다.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그 짧은 대거로 클레이모어를 든 자신을 단숨에 제압할 수 없다.
하여 현수의 정체를 짐작한 때문이다.
“호, 호, 혹시 마, 마, 마탑주님이십니까? 크엉!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요, 용서를 바랍니다.”
쿵―! 쾅―!
첫 번째 쿵은 무릎이 땅과 충돌할 때 난 소리이고, 두 번째 쾅은 이마로 땅을 들이받을 때 난 소리이다.
“제, 제발! 사, 살려주십시오. 네? 제, 제발!”
라만차는 저도 모르게 큰 음성으로 애원했다. 이때 누군가 고함을 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