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4
“누구야? 이 중요한 순간에 누가 시끄럽게 떠들어? 대체 어떤 자식인 거야? 엉? 넌, 누구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사내는 라만차보다 조금 더 앞쪽에 있던 자이다. 척 보니 소드익스퍼트 중급인데 라만차보다 훨씬 숙련되어 있다.
나이도 서른은 훨씬 넘겨 사십의 문턱에 다다른 체격 좋은 사내이다. 이른 새벽이라 아머를 걸치고 있지 않지만 틀림없는 기사이다.
사내는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라만차를 일별하곤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네가 떠든 장본인이냐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현수의 아래위를 훑는다.
“마법사군! 넌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는 넌 누구지?”
“뭐야? 라만차, 이 녀석 누군지 알지? 이 싸가지가 없는 놈은 대체 누구야? 테리안 왕국은 아닐 거고. 미판테 왕국 출신 마법사야? 근데 왜 이렇게 떠들었어?”
2장 오랜만일세, 라세안!
이곳 자치령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인원은 흑마법사의 나라 브론테 왕국이다.
자신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던 흑마법사들을 피해 상당히 많은 수가 이주해 온 상태이다. 다음은 이 땅의 예전 주인이었던 테리안 왕국 사람들이다.
스멀던 후작은 203명의 마법사를 인솔해 왔고, 스미스 백작은 167명의 기사를 데리고 왔다. 이들을 수행하던 시녀와 시종, 그리고 병사들의 수효도 상당하다.
뿐만이 아니다. 많은 수의 유민 또한 흘러든 상태이다.
다음으로 많은 인원은 바벨강 건너편 미판테 왕국 사람들이다. 로윈 후작은 224명의 마법사를, 가가린 백작은 188명의 기사를 이끌고 왔다. 이들의 곁에서 시중들고 보좌하던 시녀와 시종, 그리고 병사 또한 상당수이다.
그럼에도 브론테 왕국의 마법사냐는 말을 묻지 않은 이유는 그쪽 출신은 모조리 흑마법사이기 때문이다.
흑마법사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것이 백마법사이다.
이들은 흑마법사를 몹시 증오한다. 하여 모든 마법사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누가 흑마법사인지를 찾아본 것이다.
그 결과 브론테 왕국 출신의 흑마법사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렇기에 미판테 출신이냐는 말을 한 것이다.
아무튼 기사의 서열은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결정된다. 같은 중급이라도 갓 중급이 된 자와 상급을 넘보는 자 사이엔 간극이 크다. 자기들끼리 하는 표현을 빌자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라만차는 즉각적으로 대답을 했어야 한다. 같은 왕국 출신 기사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하늘같은 선배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곤 연신 현수에게 고개를 조아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요.”
자신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현수에게 빌기만 하는 라만차를 본 사내는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실력을 인정받은 기사가 저서클 마법사에게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조아린다.
뭔가 큰 실수를 했음을 스스로 인정할 때,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적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 이러하다.
하여 사내는 현수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25세에, 1 내지 2레벨 마법사로 보인다. 키는 중간 정도 되고 마른 몸매라 힘도 없을 것 같다. 혹시 주변에 다른 일행이 있나 싶어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뭐야? 이 시츄에이션은! 어이, 라만차! 대체 왜 이래? 무슨 죄를 지었기에 멸치 대가리 같은 놈에게 고개를 숙여?”
“며, 멸치 대가리요? 으으! 후리켄 선배!”
“왜? 내가 못할 말 했어? 비쩍 말라 멸치 대가리처럼 보이는 거 맞구만.”
후리켄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꾸하고는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어이! 마법사. 조금 전에 네가 시끄럽게 한 거야? 지금 여기서 어떤 일이 빚어지는지 알고 그런 소란을 떤 거야?”
“서, 선배!”
“시끄러! 넌 찌그러져 있어. 마법사 따위에게 고개나 숙이고……. 기사 망신 다 시킨 것에 대한 처벌은 나중에…….”
라만차가 끼어들려 하자 후리켄이라는 기사는 손을 내젓는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다.
“어이! 마법사. 왜 대답을 안 해? 사람이 뭘 물어봤으면 제깍제깍 대답해야 할 거 아냐. 왜 떠들었냐고?”
“내가 떠든 게 아니고 니 후배 라만차가 떠든 건데?”
“라만차가……? 진짜 네가 그랬어?”
“네, 선배! 이, 이분은…….”
“이런, 뷰웅신! 이깟 저서클 마법사에게 이분은 무슨 말라비틀어진……. 좋아, 왜 떠들었는데?”
보아하니 평상시에도 마법사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인 듯싶다. 어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이! 거기, 기사!”
“…나? 근데 방금 어이, 거기라고 했나?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건방진……. 어디서 감히……! 말해봐, 넌 대체 어느 나라 출신이냐? 테리안은 아니고 미판테냐?”
“아니! 그러는 너는 어디 출신이냐?”
너무도 어이없어 반문하자 기사는 검을 잡는다. 나이 어린 현수가 말을 놓자 살짝 화가 났다는 뜻이다.
“어쭈! 그게 어른에게 묻는 태도야? 말해! 누가 널 가르쳤는지. 제자를 보면 그 스승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아주 싸가지 없는 놈 밑에서 배웠겠구만, 안 그래?”
이 정도 도발을 하면 누구나 발끈한다. 하지만 현수는 누구나가 아니다.
“후후! 내 스승님이 누군지 알면 기절할 텐데?”
“기절? 내가? 미친……! 누구야? 누가 네놈의 스승이냐? 말해봐. 기절할 준비해 줄게.”
문득 장난기가 돋은 현수가 눈썹을 치켜 올린다.
“정말? 내 스승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대단은 무슨……. 오냐! 말해봐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네놈의 스승이 이실리프 마탑주이실 리는 없으니 내가 기절할 일은 없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현수의 스승이 제아무리 고서클 마법사라 할지라도 자신이 모시는 스멀던 후작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판테 왕국의 로윈 후작이라면 조금은 찜찜할 것이다.
스멀던 후작과 로윈 후작은 이곳에서 처음 만났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돈독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에 분명히 미판테 왕국 사람이 아니라 하였으니 이처럼 자신만만한 것이다.
“서, 선배……!”
더 말을 나뒀다간 경을 치게 생겼는지라 라만차가 급히 끼어들려 하였으나 또 후리켄이 팔을 휘젓는다.
“시끄러! 넌 찌그러져 있으라고 했잖아.”
후리켄은 성난 시선으로 현수를 째려본다. 누가 스승인지 어서 대라는 뜻이다.
“내 스승님은…….”
“그래! 니 스승님은……?”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라는 분이시지.”
“멀린, 누구……?”
후리켄은 웬 듣보잡이냐는 표정이다. 기사인지라 마법사들에 관한 화제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멀린은 신화처럼 전해지는 인물이지만 누구나 다 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듣기 때문이다.
그때의 묘사되는 멀린은 거의 신과 동급이다. 광룡을 때려잡은 마법사이니 대단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당시 멀린이 미친 드래곤을 제압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는 구전되는 동안 점점 더 과장되었다. 그래야 듣는 사람들이 더 실감나게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사든 누구든 멀린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따라서 멀린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 알기 때문이다. 후리켄도 당연히 멀린을 안다.
하지만 기억 저쪽에 잘 저장된 이름일 뿐이다. 그렇기에 듣고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이쯤 되면 확실히 설명해 줘야 알아듣는다.
“내 스승님은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시지! 이실리프 마탑을 창건하셨고, 제1마탑주 자리에 계셨던 분이시다.”
“네, 네에?”
후리켄의 눈이 대번에 크게 떠진다. 흰자위가 많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곤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이, 이실리프 마, 마탑의 타, 탑주님이시라면… 호, 혹시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 마, 마탑주님이신 겁니까?”
후리켄의 얼굴은 눈에 뜨이게 창백해져 있다. 아울러 다리에서 힘이 빠졌는지 후둘후둘거린다.
이제야 자신이 누구를 건드렸는지 알게 된 때문이다.
“그래! 나는 이실리프 마탑의 제2마탑주이고, 위저드 로드이며, 그랜드 마스터에 보우 마스터이기도 하지.”
“세, 세상에……!”
“여기 이실리프 자치령의 주인이며, 새로 건국된 이실리프 왕국의 국왕이기도 하다.”
“끄응―!”
털썩―!
후리켄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이 나오는가 싶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린다. 너무도 아득하여 혼절해 버린 것이다.
하늘같은 존재에게 죄를 지었다.
본인도 벌을 받겠지만 당연히 관리감독자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다.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는 스멀던 후작의 무릎 꿇은 모습이 스치자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선배……!”
라만차가 얼른 다가가 흔들어보지만 무반응이다.
“후리켄이 깨어나면 너희 둘 모두 가로베기 3천 번, 세로베기 3천 번씩 하도록!”
“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충―!”
라만차는 경을 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얼른 군례를 올린다. 하늘에다 대고 주먹질을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비교적 앞쪽에 있던 자들은 뒤에서 일어난 소란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가린 백작과 스미스 백작이 깨달음을 얻어 소드마스터의 반열로 오르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껏 숨죽인 채 전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떠들고 뭔가 묵직한 것이 땅에 떨어지는 진동마저 느껴지자 화가 났다.
지금은 중요한 순간이라 소란을 피울 수가 없어 잠자코 있지만 누군지 확인이 되면 반드시 징치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다. 소란을 피웠던 누군가가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당연히 시선이 돌아간다. 로브를 걸친 마법사이다.
몹시 중요한 순간을 망치는 장본인이 마법사라는 생각이 들자 일제히 검을 뽑아 든다.
스르릉―! 스르르르릉―!
누가 시키거나, 누군가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님에도 일심동체인 듯 일제히 움직인 것이다.
그리곤 분노의 눈빛으로 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갈 길을 걸었다. 소리를 내어 걷든, 고함을 질러 소란을 피우든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현수는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결계를 친 바 있다.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면 흠집조차 입힐 수 없는 것이다.
결계는 외부에서의 음파와 진동마저 차단시킨다. 그렇기에 라만차과 후리켄의 도발을 타이르지 않고 제압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기사들은 흉흉한 기세로 현수를 노려보며 모여들었다.
이 순간이다. 누군가 현수를 알아본 모양이다.
“마탑주님 행차이십니다. 모두 물러서세요.”
“……!”
분위기 반전이란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라만차의 다급한 음성을 들은 기사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군례를 올린다.
쿵, 쿵, 쿵, 쿠쿠쿠쿠쿠쿠쿠쿵―!
“추, 추, 추추추추추추추추추충―!”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이냐시오에게 다가갔다.
“아! 고모부, 오셨습니까?”
“그래! 별문제 없지?”
“그럼요! 여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 녀석! 잘 지켜보고 있거라. 저들이 무의식중에 행하는 행동도 눈여겨보라는 뜻이다.”
“아! 네에, 알겠습니다.”
이냐시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