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5
검사들은 소드익스퍼트에서 소드마스터로 진화할 때 저도 모르게 자신의 검법을 가다듬게 된다.
그래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검을 휘두른다.
그런데 참오에서 깨어난 이후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시 시전해 보라고 해도 못한다.
그런데 실전 상황에서 위기에 처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이를 시전하게 된다. 이냐시오에게 잘 지켜보라는 의미는 상승검법을 견식하여 이를 참고하라는 뜻이었다.
이 말은 이냐시오의 귀에만 들린 것이 아니다. 장내의 모든 기사가 귀를 쫑긋 세우고 둘의 대화를 들었다.
이쯤 되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중2에게 느닷없이 미적분 이론을 설명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가 될 때 저도 모르게 검을 휘두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의 검식은 깨달음이 실린 상승검법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니 잘 봐두었다가 그대로 따라하면서 그 속에 담긴 뜻을 유추해 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아……!”
모두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創造, Creation)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에 비하여 전에 있던 어떤 것을 참고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제(創製, Invention)는 비교적 쉽다.
훈민정음 해례본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기록되어 있다.
나랏 말미 듕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사디 아니씌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이런 젼로 어린 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故愚民 有所欲言
내 제 뜨들 시러펴디 노미 하니라.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내 이 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 노니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고져 미니라.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이를 현대문으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 책의 첫머리엔 ‘솅젱 훈민(世宗御製 訓民正音)’이라 쓰여 있다.
이 중 어제(御製)는 왕께서 만드셨다는 뜻이다.
분명히 조(造)가 아니고 제(製)이다. 이는 한글 이전에 무언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세종실록과 정인지의 해례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23년에 작성된 세종실록 103권을 보면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前) 조선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려다 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25년의 기록을 보면 ‘이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 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정인지의 해례서문을 보면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시면서 이름 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를 본따고……(하략)’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때 세종대왕이 참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자는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라는 문자이다.
기원전 22세기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되어 있다.
어쨌거나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보다 뭔가를 보고 모방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현수의 이야기를 들은 기사들은 일제히 가가린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공교롭게도 이 순간 가가린 백작이 칼을 뽑아 든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검식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검법을 가르쳐 주려는 듯 아주 느린 움직임이다. 그리고 반복적이다. 모든 기사는 숨죽이며 이를 지켜보고 있다.
현수 입장에선 별것도 아니기에 슬그머니 물러섰다.
그럼에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모두들 완전히 몰입한 상태인 때문이다.
“모두들 얻는 게 있어야 할 텐데.”
아무리 열심히 본다고 해도 그 검식의 오의마저 깨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천히 걸어 자치령 공사 현장들을 둘러보았다. 빌모아 일족의 정성과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진척이 있었다. 생각보다 공사기간이 짧을 듯하여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기중기나 불도저, 페어로더나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없음에도 이런 진척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경량화 마법의 힘일 것이다.
“포크레인을 안 가져와도 돼서 다행이야. 그런데 좀 쌀쌀하네. 제대로 된 난방 시설이 없을 텐데 어찌 지내지?”
이곳은 아직 2월이다. 그리고 깊은 산중이라 몹시 춥다.
이곳은 지구만큼 의복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기모 의류도 없고, 플리스도 없으며, 히트텍도 없다.
이렇듯 기능성이 아니더라도 솜을 넣고 누빈 것이나, 닭이나 거위 깃털을 주요 소재로 쓴 덕다운이나 구즈다운 의류 또한 없다.
짐승 가죽을 엉성하게 꿰매서 만든 무겁고, 냄새나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이런 기후에 익숙해진 몸이라 할지라도 추위를 느낄 만큼 쌀쌀하다.
“흐음! 급한 대로 항온마법진을 나눠줘야겠군.”
의사들이 권하는 겨울철 적정 난방 온도는 17∼22℃이고, 습도는 20∼60%라 되어 있다.
외기와 기온차가 크면 출입할 때마다 급격한 온도 변화에 적응하여야 하므로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 온도에 맞추면 조금 춥다. 그렇기에 항온마법진의 온도를 25℃로 맞출 생각이다. 이 정도면 밖이 아무리 추워도 포근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 해결해 줘선 안 된다.
작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세수를 하거나 샤워, 또는 목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작업을 하고 있으니 위생이 매우 중요한 때문이다.
만일 콜레라, 발진티프스, 이질, 장티푸스, 백일해, 홍역, 성홍열 같은 전염병이 돈다면 어찌 되겠는가!
병의 원인과 전파 경로, 치료 방법 등을 전혀 모르기에 앉은 채 당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폐페스트는 감염되면 고열과 두통, 그리고 호흡곤란 증상이 나타나는 치명적인 급성 전염병이다.
즉시 치료되지 않으면 24시간 안에 사망할 수도 있다.
의료 개념이 비교적 잘 정립되어 있는 지구에서의 치사율은 약 60%이다. 만일 이곳에서 전염되기 시작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90% 이상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격리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생관념을 갖도록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러한 환경을 갖춰주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피곤한 몸으로 언제 장작불을 지펴 물을 데우고 씻겠는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40℃짜리 항온마법진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을 커다란 물통 또는 물웅덩이에 넣어두면 항상 따뜻한 물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치령 외곽까지 간 현수는 마나에 의지를 실어 보냈다.
[라세안! 라세안! 하인스네. 근처에 있는가?]
미판테 왕국에서 여러 번 이렇게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하여 어디 멀리 갔나 싶어 돌아설 때이다.
현수가 있는 곳으로부터 약 20m 전방의 공간 일부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격렬한 마나유동 현상이 빚어진다. 마나에 민감한 현수가 어찌 이것을 모르겠는가!
시선을 집중시켜 보니 작은 동산만 한 덩치가 허공에서 돋아나고 있다. 비늘 빛깔이 붉은빛을 띠고 있으니 분명한 레드드래곤이다.
쿠웅―!
2m 높이에서 육중한 동체가 떨어지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폴리모프 인 휴먼(Polymorph in human)!”
파리릿! 파리리리릿―!
커다란 날개가 접히면서 순식간에 형상이 바뀐다. 라세안의 모습이다.
“핫핫핫! 이 친구야, 오랜만일세.”
“…그래! 오랜만이야. 잘 있었지?”
현수의 대답이 약간 늦은 이유는 폴리모프 마법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모습을 바꾸는 이 마법이 어쩌면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나야! 잘 지냈지.”
“그럼! 자네는?”
라세안은 아주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때 뒤편의 허공이 다시 일렁인다. 그리곤 두 여인을 토해놓는다.
푸르릇! 푸르르릇!
“아! 하인스 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하인스 님!”
라세안의 뒤를 따른 이들은 제니스케리안과 케이트이다.
“아! 제니스케리안 님! 그리고 케이트! 오랜만이네요.”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잠시 분위기가 뻘쭘하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온 불청객들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라세안이 먼저 입을 연다.
“그래! 왜 불렀나?”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여기서 이럴 수 없으니 잠시만 기다리게. 아공간 오픈!”
아공간 속의 응접용 컨테이너를 꺼내 편평한 곳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두툼한 양탄자가 깔려 있어 푹신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안에는 1, 2, 3인용 소파와 탁자, 그리고 협탁 등이 비치되어 있다.
“자, 안으로 들어가세.”
“응? 그, 그래!”
쇠로 만든 컨테이너는 언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너무도 정교한 때문이다.
라세안과 제니스케리안, 그리고 케이트는 장인 종족인 드워프도 이런 건 못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걸 모르기에 현수는 들어설 때마다 클린마법으로 신발 밑창을 깨끗하게 해주었다.
“흐음! 좋군.”
푹신한 소파에 앉은 라세안은 신기한 듯 꾹꾹 눌러본다. 그럴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원상으로 복구되자 재미 들린 듯 몇 번 더 그런다.
제니스케리안 역시 소파의 푹신함과 안락함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반면 케이트는 다소곳하게 앉아 현수만 바라보고 있다.
장차 부군이 될 사람이다. 그런데 몇 번 만나지도 않아 얼굴조차 눈에 익지 않은 상태이다.
평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사랑해야 할 사람이다. 이곳은 가부장적인 경향이 강한 세상이기에 당연한 생각이다.
영혼의 주인이 될 사람이니 이번 기회에 현수의 모습을 뇌리에 각인시키려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이다.
“라세안! 미판테 왕국에서도 자네를 여러 번 불렀는데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나? 난 제니스와 함께 브론테 왕국에 가 있었지. 거기서 할 일이 많았거든. 근데 왜?”
“자네 딸 다프네가 실종되었네. 협곡에 머물고 있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야.”
노예사냥꾼들이 협곡 안까지 들어가 다프네를 납치했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둘러댄 말이다.
“다프네가? 못 찾았나?”
“그래! 백방으로 사람들을 풀어 찾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 소식이 없네.”
“그래? 어딘가에 있겠지. 참, 협곡 안에 있으면 못 찾겠는 걸? 안 그래?”
라수스 협곡은 아직까지 모든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딱 하나, 현수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다프네가 협곡 내부에 있다면 인간을 아무리 많이 풀어놔도 못 찾는 게 당연한 일이기에 한 말이다.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협곡 내부엔 없네. 협곡 밖에서 실종되었기 때문이지.”
“그래? 그걸 어떻게 아나?”
“마지막 흔적이 협곡 밖이거든.”
“쩝―! 그놈의 계집애. 얌전히 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