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7
전투 후유증 때문에 추가로 300여 개체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과 하직했다.
마족들의 침범으로 무려 1,500여 개체가 희생된 것이다.
그날 이후 드래곤의 숫자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드래곤들은 새끼 낳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던 때문이다.
현재는 헤츨링을 포함하여 약 300여 개체가 남아 있을 뿐이다. 7,0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2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어쨌거나 다시 한 번 마계의 문이 열리면 현재의 드래곤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하여 로드들은 대를 물려주면서 특별히 흑마법사들을 잘 관찰하라는 충고를 하곤 했다.
어떤 미친놈이 또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로드직을 물려줄 때엔 약 300년에 걸친 인수인계 작업을 한다. 옥시온케리안도 300년에 걸쳐 로드직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 전대 로드로부터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현재의 레어로 자리를 옮겼다.
이실리프 자치령은 본시 테리안 왕국의 영토이되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바세른 산맥의 바로 아랫자락인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주자가 거의 없는 땅이었다.
옥시온케리안은 인간의 흔적이 거의 없는 이곳을 자신의 영토로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를 테리안 왕국에 알린 것은 아니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테리안 왕국에선 이곳이 드래곤 로드의 영토라는 걸 아직도 모른다. 그렇기에 별다른 고심 없이 이곳을 현수에게 할양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라세안과 제니스가 브론테 왕국에서 흑마법사들을 소탕하고 있는 이유는 로드로서 그들을 박멸하라는 명을 내린 때문이다.
라세안과 제니스는 흑마법사 이외에도 수많은 구울과 좀비, 스켈레톤들을 제거했다. 다른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브론테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테리안 왕국과 피판 왕국의 위험은 사전에 제거된 셈이다.
라이셔 제국과 크로완 제국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던 카이엔 제국 역시 혜택을 입은 셈이다. 높고, 험준하기는 하지만 갈비온 산맥만 넘으면 카이엔 제국의 영토인 때문이다.
라세안과 제니스는 말 나온 김에 가자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
“알았어, 지금 가지!”
“잘 생각했네, 이런 일은 빨리빨리 매듭짓는 게 좋아.”
라세안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제니스가 나선다.
“그럼 지금 갈까요?”
“그러지.”
라세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약간 떨어져 있던 케이트에게 눈짓을 한다. 매스 텔레포트를 할 것이니 마법이 구현되는 범위 내로 들어서라는 뜻이다.
“네! 알겠어요.”
케이트는 현수의 곁으로 오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장차 부군이 될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소녀가 곁에 서도 될는지요?”
“그럼! 당연하지. 이쪽으로 와.”
어차피 아내로 맞이할 여인이기에 현수는 팔을 들어 어깨동무를 하자는 몸짓을 했다.
이 기회에 스킨쉽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가까이 오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케이트는 이를 곧이곧대로 생각한 모양이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이민다. 그리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낯을 붉힌다.
“……!”
현수의 팔이 어깨에 얹어지는 순간 케이트의 두 볼은 더 이상 붉을 수 없을 정도로 발그레해진다. 그와 동시에 비 맞은 참새처럼 바르르 떤다. 부끄러움 때문이다.
현수는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케이트의 체취를 느끼는 순간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아르센 대륙엔 비누와 샴푸가 없다. 때를 미는 관습도 없고, 아침저녁으로 양치를 하지도 않는다.
휴지도 없으며, 비데는 더더욱 없다. 그리고 여성의 생리혈을 처리해 주는 생리대 역시 없다.
중성세제 역시 찾을 수 없는 물건이다.
그렇기에 겉보기엔 예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지독한 악취가 나기도 했다. 특히 정수리에서 나는 냄새는 현수로 하여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샴푸가 발달된 지구에서도 정수리 냄새가 고민인 사람이 여럿인데 이곳은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케이트로부터는 그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울창한 숲 속에서 느껴지는 상쾌함만 느껴질 뿐이다.
아르센 대륙으로 온 이후 몸에서 냄새나지 않은 사람은 카이로시아가 유일했다. 엘프와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이 밖의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냄새가 났다.
심지어 가이아 여신의 성녀인 스테이시 아르웬에게서도 유쾌하지 못한 냄새가 난다. 로잘린도 처음엔 냄새가 났다.
그런데 예상했던 악취 대신 진한 피톤치드 냄새가 느껴진다. 하여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라세안과 제니스에게서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도 그러했다.
케이트의 몸에서 냄새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제니스케리안이 모종의 조치를 취해서일 것이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실제로 제니스케리안은 케이트로부터 뿜어지는 역한 냄새가 싫어 용언마법을 구현시켰다.
냄새 제거 마법 디오도리제이션(Deodorization)과 향기 발산 마법인 이밋 프레이그런스(Emit fragrance)이다.
그 결과 악취가 사라지고, 향기를 뿜는 것이다.
“흐으음!”
현수는 저도 모르게 케이트의 체취를 깊숙이 흡입했다.
쉐리엔과 디오나니아의 꽃, 그리고 포인세에서도 향기가 뿜어지는데 그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엘프들에게서 느껴지던 숲의 향기와 유사하다. 왠지 심신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하여 향기를 음미하고 있는데 라세안이 피식 웃는다.
“자네에게 변태 기질이 있는지 몰랐네.”
“변태? 내가……?”
현수는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를 보게. 조만간 자네의 아내가 될 사람이긴 하지만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케이트를 보라고?”
시선을 돌려보니 케이트의 두 볼이 잘 익은 능금처럼 붉다. 현수가 대놓고 자신의 목덜미 냄새를 맡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괜찮은데 뭐. 어차피 부부 될 사이잖아.”
제니스케리안의 말이다.
현수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의기소침했었다.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인간에게 졌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러다 로드와의 중재 요청에 대한 대가로 제자인 케이트와 결혼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둘의 결혼이 성사되면 자신은 장모와 대등한 위치가 되기 때문에 일평생 공대를 받을 수 있으며, 구겨진 체면이 어느 정도 회복된다는 생각을 한 때문이다.
따라서 제니스는 현수와 케이트의 혼인이 한시바삐 성사되기를 고대하는 중이다. 그런데 라세안이 현수를 변태라 몰아가자 얼른 편들어준 것이다.
“험험! 가, 갑시다.”
문득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현수가 헛기침을 토하자 제니스케리안이 빙긋 웃는다. 말을 하며 현수가 케이트를 조금 더 힘주어 안았기 때문이다.
현수 입장에선 지금 와서 손을 빼는 게 더 이상하기에 반대로 더 세게 당겨 안은 것이다.
그런데 발육이 좋아 그런지 뭉클한 느낌이 든다. 브래지어라는 게 없는 동네라 이렇다.
이때 제니스케리안의 입술이 달싹인다.
“매스 텔레포트!”
슈라라라라랑―!
용언 마법이기에 소리도 다른 듯하다. 하여 이에 신경 쓰고 있는데 금방 풍경이 바뀐다. 거대한 협곡 끝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 입구에 당도한 것이다.
“하인스! 잠시만 기다리게.”
말을 마친 라세안은 대답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하, 하인스 님……!”
“아! 그, 그래. 미안!”
현수는 얼른 손에서 힘을 뺐다. 케이트가 갑갑한 듯 몸짓을 하고야 거의 부둥켜안고 있다는 걸 자각한 것이다.
“아뇨, 괜찮아요.”
케이트는 몹시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현수는 장차 부군이 될 사람이다. 그리고 이곳은 남존여비가 지구보다도 더 심한 곳이다.
후작의 손녀로 태어났기에 심한 차별을 받지는 않았지만 성장하면 정략결혼을 하게 될 것이고, 가문을 위해 무엇이든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케이트는 가난한 포인테스 영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의 빌리델 백작가로 보내질 것이라 생각했다.
영지 내에 철광과 구리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옥한 농토 또한 가지고 있어 상당히 풍요로운 곳이라 들었다.
이 백작가에는 아들이 셋 있는데 셋 다 여색을 몹시 밝힌다고 한다. 장남과 차남은 이미 결혼하였으며 각기 다섯씩 후처를 두고 있다.
삼남만 미혼인데 소문난 난봉꾼이다.
그래도 후작가의 손녀이니 후처로 달라고 하지는 못할 것인지라 빌리델 백작가의 삼남에게 보내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놈은 영주성 내의 모든 시녀를 섭렵하자 마을로 나가 처녀, 유부녀를 가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영지의 여자들을 유린하고 다니는 중이다.
이자의 본명은 사티바 데 빌리델이지만 흔히들 ‘사티로스 데 빌리델’이라고 칭한다.
사티로스(Satyr)는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로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짧은 뿔이 나 있고, 몸은 빳빳한 털로 뒤덮여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사티바를 사티로스라 부르는 이유는 둘 다 정욕 그 자체와 같은 존재인 색정광이기 때문이다.
하여 빌리델 백작의 영지에선 40세 이하인 여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극도로 외출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이렇듯 짐승 같은 놈이지만 그곳으로 보내진다면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리라 생각했다.
한 몸 희생해서라도 영지의 가난을 해결하고 팠던 것이다.
그런데 드래곤의 제자가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이실리프 마탑주와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백작가의 삼남에 비하면 거의 환상적인 상대이다.
그런데 몹시 버겁고 조심스러워해야 할 존재이다. 마나의 길을 걷는 모든 마법사의 수장인 때문이다.
군대로 치면 갓 임지에 배속된 하사가 어느 날 갑자기 참모총장의 여인으로 내정된 것과 같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상황이다.
마법사들에게 있어 로드는 단순한 상관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사가 별을 50개쯤 단 군통수권자의 아내로 내정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린다. 그런데 현수의 심기는 조금이라도 거스르고 싶지 않다.
평생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무엇이든 희생해야 하며, 의중을 따라야 하는 지고무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수가 이런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내가 너무 힘준 거지?”
“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케이트는 정말 아니라는 듯 크게 고개를 젓는다.
“어쨌거나 미안해. 앞으로 주의할게.”
하늘같은 로드가 사과를 한다. 케이트는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빚어졌다는 생각에 또 한 번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더 세게 안으셔도 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더 세게?”
“네? 아! 그, 그게 아니고…….”
케이트는 말실수를 깨닫고는 입술을 잘근 깨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몹시 귀여우면서도 고혹적이고, 섹시하다.
현수는 헛기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험, 험!”
짐짓 딴청을 부리며 주변을 살피는데 라세안이 나온다.
“마침 안에 계시네. 가지.”
라세안은 한때 옥시온케리안과 차기 로드직을 경합했던 존재이다. 그래서 입김 센 고룡들을 찾아다니며 접대하던 때가 있었다. 요즘 말로 로비를 한 것이다.
그때는 상대의 단점을 지적하고,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었다. 그리고 옥시온케리안을 지칭할 때 매번 ‘노랭이 그놈’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