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8
그런데 지금은 ‘계시다’는 표현을 한다. 로드임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자세로 임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그러지.”
현수가 라세안의 뒤를 따르자 제니스와 케이트는 그 뒤를 따른다. 앞서가는 현수와 약간 거리가 떨어지자 제니스가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오늘 밤, 신방을 꾸며주랴?”
“네……?”
“어차피 결혼하기로 한 거니 이곳에서 로드더러 주례를 서라고 하면 되잖아.”
“로, 로드께서 주례를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일이다.
중간계의 조율자를 대표하는 드래곤 로드가 결혼식에서 주례사를 읊은 일은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하라고 하면 할 거야, 안 그래?”
제니스케리안은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태어난 이후 수천 년간 다투던 서열을 양보했다. 그 대가로 소원 열 가지를 들어주기로 한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제니스라는 이름 뒤에 케리안을 다시 붙이게 된 것이다. 술 마시고 한 번 실수한 것치고는 너무 과한 처벌이었던 것이고, 자존심 문제였던 때문이다.
따라서 현수와 케이트의 결혼 주례를 서라고 하면 찍소리 않고 들어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제니스는 야심을 품고 있다.
현수와 케이트가 결혼할 때 로드의 특명으로 모든 드래곤을 결혼식에 참석시키는 것이다.
똥 한 번 잘못 쌌다고 지금껏 무시당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리고 500년짜리 수면기를 가져야 했다. 그런데 드래곤과 싸워도 능히 이겨낼 인간 중 최강자가 자신의 사위가 되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옥시엔케리안에게 로드직을 물려준 전대 로드는 9서클 마스터 이상인 인간과는 다투지 말라고 했다.
자칫 드래곤 체면이 구겨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수는 10서클 마스터이다. 게다가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하기에 일대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뿐만이 아니다.
현수의 아공간에 담긴 핵배낭이라는 것이 터지면 험산준령도 평지가 되고, 모든 생명체가 말살된다고 들었다.
터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도주할 여유조차 없다는 그것은 그야말로 궁극의 병기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게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다.
독한 마음을 품으면 이 세상 어떤 드래곤도 성치 못할 무시무시한 물건은 현수의 아공간 속에 담겨 있기에 힘으로 빼앗을 수조차 없는 것이다.
거짓말을 모르는 라세안이 한 말이니 믿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수로부터 존장 대접을 받는 것은 다른 드래곤들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세안도 이런 이유가 있어 다프네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 그건 그렇지만…….”
케이트가 말꼬리를 흐리자 제니스는 그럼 되었다는 단정적인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는 건 싫지는 않다는 거지? 그럼 오늘 여기서 결혼식 올리는 거다. 알았지?”
“…네에.”
케이트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제니스는 마음이 바빠졌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때문이다.
“얘! 너는 날 따라와.”
“네? 아, 네에.”
케이트와 제니스가 다른 통로로 꺾어가자 현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졸지에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 된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으니 인간 세상의 그것처럼 화려하지도 않을 것이고, 격식도 복잡하지 않다.
어차피 할 것이니 약식으로 하고 나중에 한꺼번에 아내를 맞이하는 예식을 따로 올리면 된다.
문제는 처조부가 될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공작과 케이트의 부모에게 혼인을 승낙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드래곤 로드의 주례라……!”
성녀를 아내로 맞이하지만 여신이 직접 강림하여 결혼식을 주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전례가 없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례를 설 것인가가 문제이다.
4장 주례는 누가 서지?
위저드 로드이니 이 세상 어떤 마법사들도 위에 설 수 없다. 그랜드마스터이니 어떤 기사도 마찬가지이다.
각국의 국왕과 황제들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교황도 그럴 수 없다. 성녀와 교황은 대등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현수의 결혼식 주례는 드래곤 로드가 제일 적합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라세안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제법 그럴듯한 문이 드러난다.
폭은 5m, 높이는 15m 정도 되는 커다란 문이다. 목재 문에 철판을 덧씌운 것으로 화려한 문양이 상감되어 있다.
그림에는 알을 깨고 나온 헤츨링이 드래곤 성체로 성장하는 과정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어린 시절엔 많은 독서를 시키는 모양이다. 그러는 한편 검을 수련하고 마법도 배운다. 성체가 되었음을 가늠하는 분수령은 브레스를 뿜어낼 능력을 갖췄는지인 듯싶다.
상감되어 있는 그림을 살피며 따라 들어가자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던 금발 미청년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 어서 오시게.”
“오랜만입니다, 로드!”
현수는 정중히 예를 갖췄다. 고개 한 번 숙인다고 체면 깎일 일이 아니고, 그래서 손해 볼 일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자자, 이쪽으로 앉으시게.”
옥시온케리안 역시 하대하지 않고 반공대로 응대한다. 현수가 인간 중 최강자라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옥시온케리안이 가리킨 곳엔 나무로 만든 의자가 놓여 있다. 푹신함을 전혀 느낄 수 없는 100% 목재의자인데 그야말로 장인의 손길이 알알이 배어든 예술작품 수준이다.
조선시대 때 임금이 앉았던 용상보다도 훨씬 더 멋지다.
‘저거 자치령에 가져다 놓으면 괜찮을 것 같네.’
의자 위에 방석을 올려놓기만 하면 아주 훌륭한 접객용 소파가 될 듯싶다. 가장 안쪽의 큰 것은 본인 집무실 의자로 괜찮을 것 같다. 물론 푹신한 방석과 등받이가 있어야 그럴 것이다. 어찌 되었건 욕심나는 것이다.
“로드! 이것들은 푹신할 것 같지 않군요. 치질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치질이요?”
모르는 눈치이다. 하긴 드래곤이 치질을 어찌 알겠는가! 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현수가 입을 연다.
“치질은 말입니다. 이렇게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면 걸리는 질병의 일종입니다. 혹시 배변할 때 선혈이 묻어나오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
갑자기 튀어나온 똥 이야기에 옥시온케리안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이때 현수의 말이 속사포처럼 이어진다.
“또는 항문의 조직 일부가 밖으로 빠져나와서 불편하거나 통증을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이것도 아니라면 갑자기 대변의 굵기가 가늘어진 적 없습니까?”
“그건……!”
옥시온케리안은 현수의 말에 문득 떠오른 일이 있는 모양이다. 때는 이때이다.
“이 중 하나라도 해당이 되면 치질입니다. 지금은 괜찮더라도 치질이 심해지면 항문 주위 신체조직 중 일부가 밖으로 삐져나와 상당히 고통스럽습니다.”
“……!”
항문 주위 신체 조직이 밖으로 나온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정말 그러냐는 표정이다.
“치질은 말입니다. 이렇게 딱딱한 의자에 장시간 앉아 있으면 생기는 질병입니다.”
너무도 탐나는 의자인지라 슬쩍 뻥을 친 것이지만 옥시온케리안이 어찌 알겠는가!
과거에 변의 굵기가 줄어든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을 먹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변의 굵기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걸 모르니 혹시 심각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속에 잠겨 있을 뿐이다.
이런 때는 쐐기를 박아야 한다.
“이런 딱딱한 의자보다는 푹신하고 안락한 게 좋지요. 마침 제게 그런 게 있는데 이것과 바꿔드릴까요?”
현수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을 라세안이다.
“아! 소파라는 거? 그래, 그거 좋지. 아주 푹신해!”
“로드를 만난 기념으로 제가 선심 쓰겠습니다.”
라세안은 시선이 마주친 옥시온케리안에게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시선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한 옥시온케리안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좋다면야 바꾸지요. 감사합니다.”
옥시온케리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수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곤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나무의자를 안에 넣고 가죽 소파 세트를 꺼냈다.
나무 의자는 개당 1,000만 원이 넘을 수도 있는 명품 중의 명품이다.
반면 현수가 꺼낸 것은 80만 원 정도 되는 6인용 카우치용 라텍스탑 가죽 소파이다. 오리털이 들어 있어 탄력성, 통풍성, 항균력, 복원력이 뛰어나다고 광고하는 것이다.
그래도 겉보기엔 상당히 괜찮아 보이는 물건이다.
“감사는요. 자, 한번 앉아보십시오.”
현수의 안내를 받아 소파에 앉아 스툴에 발을 올려놓았다.
옥시온케리안은 엉덩이와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함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좋군요.”
“그렇죠? 마음에 들어 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흐음! 기왕에 선심을 쓰는 것이니 한 세트를 더 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과 회합할 때 쓰십시오. 선물입니다.”
꺼내는 김에 소파와 세트로 만들어진 탁자를 꺼내 놓으니 그럴듯하다. 이 탁자는 96,000원짜리이다.
그런데 현수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슬쩍 물러나며 턱을 괸다.
“아! 그거……!”
아공간에서 나온 건 샤기 스타일 러그이다. 39,000원만 내면 배송비 무료로 구입할 수 있는 것 두 장이다.
소파 색상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라일락 핑크색의 러그를 까니 분위기가 한결 고급스러워 보인다. 하여 현수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같은 순간, 옥시온케리안과 라이세뮤리안은 두께 25㎜짜리 러그를 보고 감탄하는 중이다.
한결같은 굵기와 높이인지라 예사 장인이 만든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 중인 것이다.
“자아! 이제 분위기가 좀 사는군요. 앉으시죠.”
“그, 그럴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왠지 러그를 밟는 것이 저어된다는 표정이다.
“아, 참!”
현수기 꺼낸 것은 동네병원마다 있는 싸구려 체크무늬 슬리퍼이다.
“신으세요.”
꺼내는 김에 열두 켤레를 꺼내자 옥시온케리안의 눈빛이 빛난다. 한 켤레에 2,500원짜리 체크무늬 슬리퍼가 마음에 뜬 때문이다. 하긴 이 동네엔 없는 물건이다.
“고맙네.”
“고맙기는요. 제가 로드의 영역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니 이 정도 인사는 당연한 일이지요.”
“……!”
815,000원짜리 소파 두 세트와 96,000원짜리 탁자 하나, 39,000원짜리 러그 두 장과 2,500원짜리 실내용 슬리퍼 열두 켤레의 가격을 모두 합치면 1,834,000원이다.
현수가 챙긴 목재의자는 지구에선 하나당 최소 1,000만 원 이상을 호가할 예술품인데 열두 개나 된다.
이건 현수의 안목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지난 2012년, 지나의 경매시장에선 골동품 의자의 진위 여부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다.
옥으로 만든 한(漢)나라 시대 화장대와 등받이 없는 의자 세트가 무려 390억 원에 낙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나라는 기원전 206년에서 220년까지 존속되었던 고대국가이다. 따라서 건국원년에 제작된 의자라면 2,234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뜻이다.
옥시온케리안이 보유하고 있던 의자 12개의 제작 시기는 이보다 더 오래되었다. 현재로부터 약 2,500년 전에 당대 최고의 장인이라 불리던 드워프가 10년을 공들여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구의 경매시장에 가져가 방사성 탄소연대측정을 해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값에 팔릴 수 있다.
엄청나게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된 것이지만 흠 한 점 없는 완벽한 예술품인 상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