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3
“그랬지! 그래야 한 뿌리라도 더 자네에게 줄 수 있잖아. 라수스 협곡은 험한 데가 많아서 인간들이 못 캐는 것도 많다구. 그러니 보다 섬세한 작업이 가능한 놈들을 시켰지.”
라세안은 다시 생각해 봐도 잘했다는 듯 우쭐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곧 엄청난 양의 만드라고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맙소사! 그래서 어떤 일이 빚어졌는지 몰라?”
“일……? 무슨 일이 빚어져?”
“자네가 몰아낸 몬스터들이 인간들을 공격해서 엄청난 수가 죽고 다쳤다고.”
현수의 음성엔 약간의 분노가 어려 있었다. 굶주린 몬스터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사체들을 너무 많이 본 때문이다.
“그, 그래……? 난, 협곡 바깥쪽에 나가 있으라고 한 것뿐인데. 끄응! 어쩌지? 많이 죽고 다쳤나?”
“그걸 말이라고 해? 라수스 협곡에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있는지 가장 잘 아는 게 자넨데.”
“그, 그건 그렇지. 쩝,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네. 어쩌지? 난 10서클 마법사가 아니라 리절렉션을 쓸 줄 모르는데.”
할 수만 있으면 부활 마법을 난사해서라도 죽은 이들을 되살리겠다는 말이다.
“어이구, 이 친구야! 시체가 아직도 멀쩡히 있겠어? 벌써 썩기 시작했거나 몬스터에 의해 훼손당했는데.”
“……!”
라세안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만드라고라를 더 많이 캐려는 목적으로 상위포식자들을 외곽으로 쫓아내고 고블린들에게 협곡 내부를 샅샅이 뒤지도록 했다.
그것에 대한 대가는 고블린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공간 제공이다. 고블린은 오크들이 주로 잡아먹는다. 샤벨타이거나 베어울프들이 습격하면 급격하게 수가 줄어든다.
먹을 만큼만 사냥하는 것이겠지만 한 번 오면 너무 많이 잡아먹기 때문이다.
사실 고블린의 고기는 조금 질기고, 맛이 없다. 그래서 진짜 굶주렸을 때만 오기에 희생이 큰 것이다. 그래서 번식력이 아주 강하지만 늘 일정한 숫자만 유지될 뿐이다.
그리고 늘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살금살금 걸으며 살고 있다. 항상 조바심치며 살고,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잡혀먹을지 모를 불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몬스터들의 습격을 방어해 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기에 라세안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동굴 속 깊은 곳에 있던 고블린들까지 모두 떼를 지어 나타났다.
사람으로 치면 갓 태어나 기어 다니는 아기부터 내일모레면 장례를 치르게 생긴 노인까지 다 나온 셈이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조리 튀어나왔다.
채취해 오는 만드라고라의 양에 따라 제공받게 될 영역이 달라질 것이라는 라세안의 언질 때문이다.
어쨌거나 라세안은 엄청난 수의 고블린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웬만한 산등성이 하나는 까맣게 뒤덮을 정도로 많았던 때문이다.
고블린들은 라세안의 보호하에 라수스 협곡을 이 잡듯 뒤지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 몬스터 러쉬에 놀란 미판테 왕국민들만 죽어나고 있다.
“한시라도 바삐 원상 복구시키게.”
“그, 그러지.”
라세안은 당장 가려는 듯 엉덩이를 들썩인다.
“그전에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뭐, 뭔데?”
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까 싶어 심히 저어된다는 표정이다.
“다프네가 노예사냥꾼들에게 잡혀가 노예로 팔렸네.”
“뭐? 뭐라고……?”
대번에 음성이 커진다. 아무리 인간 쪽 성향을 타고났다고 해도 다프네는 드래고니안이다.
절반은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하찮은 인간들이 자신의 딸을 노예로 잡아갔다니 대번에 노성을 터뜨린 것이다. 과연 성질 급한 레드드래곤답다.
“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아드리안 왕국 수도 멀린에서 노예경매가 이루어졌고, 누군가 1,600골드에 사갔네.”
“그래서?”
라세안은 딸이 노예로 팔렸다는 말에 화는 나지만 억지로 분노를 누른다는 듯 낮은 음성으로 묻는다.
“현재 아드리안 왕국의 모든 기사와 병사, 그리고 마법사들까지 풀어 다프네의 행방을 쫓고 있네.”
“……!”
“나도 이 길로 거기에 가서 다프네를 찾을 것이니 자네는 몬스터들 정리가 되는 대로 합류해 주게.”
라세안은 딸부터 찾겠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현수의 표정이 단호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네. 몬스터들부터 정리하지. …다프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아니, 아닐세!”
라세안이 말끝을 흐리자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다프네는 내 아내이네. 자넨 내 장인이고!”
다프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결혼하겠다는 뜻이다.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내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그건 들어본 바 있는 말이군. 그럼 다프네의 소원도 한 가지 들어줘야 하겠군.”
현수가 라수스 협곡을 지나는 동안 다프네와 내기를 걸었을 때 한 말이기에 기억하는 모양이다.
“물론이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약속은 지켜질 것이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옥시온케리안이 한마디 한다.
“제니스와 함께 가시게.”
“고맙습니다, 로드!”
거들어준다는데 마다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의 선후가 있다. 하여 라세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니스와 함께 협곡의 몬스터 정리를 하고 합류하는 게 빠르지 않겠나?”
드래곤들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존재감을 느낀다.
우리말로는 ‘핏줄은 서로 당긴다’라는 것이다.
다프네의 혈통 역시 절반은 드래곤이며, 라세안은 친부이니 찾기 쉽지 않겠냐는 뜻이다.
“그러지! 최대한 빨리 하고 가겠네. 멀린에 있을 것인가?”
“다프네의 행방이 드러날 때까지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머물겠네.”
“알겠네. 그리로 가지.”
라세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수는 옥시온케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로드! 오늘의 만남이 조금 더 여유로웠으면 좋겠는데 방금 들으셨다시피 제 아내 될 여인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어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가!
옥시온케리안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끼리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니 급한 일부터 해야지요. 그나저나 돕고 싶지만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는 몸이니 그 점 양해 바랍니다.”
“네! 이해합니다. 한시바삐 처리하고 다시 만나 담소의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오늘 반가웠습니다. 급한 일 있으니 오늘의 만남은 여기서 마치십시다.”
“네! 로드!”
로드의 레어를 나온 현수는 라세안과 헤어졌다. 그리곤 곧장 멀린으로 텔레포트했다. 같은 순간 라세안은 라수스 협곡으로 향했고, 제니스와 케이트 역시 협곡으로 갔다.
오늘 꾸미려던 신방은 뒤로 미뤄졌지만 케이트는 아무런 불만도 없다. 첫날밤을 어찌 치를지 두려웠는데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뿐이다. 반면 제니스는 볼이 튀어나왔다.
한시바삐 현수를 사위 자리에 앉히려던 계획이 무산된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라세안에게 있다고 전가시켰다.
몬스터들을 내몰지 않았으면 다프네가 인간들에게 납치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 우긴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기에 라세안은 절절매다가 먼저 텔레포트했다. 제니스와 케이트 역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현수는 드래곤 로드를 만나는 자리에서 사기를 쳤다.
그 결과 쓸모없는 모켈레 무벰베의 사체와 금방 숨은 거둔 것처럼 드래곤 하트까지 멀쩡한 실버드래곤의 사체를 맞바꿨다. 대단한 행운이다.
드래곤의 사체는 아르센의 모든 사람이 바라마지 않은 귀물 중의 귀물이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법사보다는 기사가 더 많이 찾는다.
드래곤의 비늘은 검강이 아니면 흠집조차 생기지 않으며, 쇠보다 훨씬 가벼워 활동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비싸서 몸 전체를 감싸는 갑옷이 아닌 심장 부위만을 보호하는 호심갑(護心甲) 또는 가슴을 보호하는 엄심갑(掩心甲)으로 주로 쓰인다.
이것의 또 다른 효용은 마법에 대한 저항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파이어 애로우나 아이스 볼트뿐만 아니라 라이트닝 마법에도 끄떡없다.
전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4서클 마법 대부분을 무효화하니 드래곤의 비늘 하나만 있으면 전투마법사가 두렵지 않다.
기사 입장에선 일석이조인 방어구이다.
찾는 사람은 많고, 물건은 귀하니 비늘 하나당 약 1,000골드에 거래된다.
한화로 환산하면 10억 원이니 엄청 비싸다. 하여 후작 이상 고위 귀족이나 손에 넣을 수 있다.
드래곤의 가죽은 비늘보다 약간 저렴하다.
그리고 비늘보다 마름질하기 쉬워 전신 갑옷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도검불침일 뿐만 아니라 한서불침 효용까지 있다.
마법에 대한 저항성은 비늘보다는 떨어지지만 2서클까지는 무효화시킬 수 있다.
드래곤의 커다란 덩치를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수의 갑옷을 제작할 수 있고, 한 벌당 3,000∼4,000골드 정도로 거래된다.
드래곤의 사체 한 구만 있으면 가죽만으로도 엄청난 부(富)를 이룰 수 있다.
힘줄은 강궁의 시위로도 쓰이지만 주로 공성병기나 수성병기로 사용되는 대형 쇠뇌의 시위로 사용된다.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데 오우거의 힘줄과 비교하면 인장력이랄지 복원력, 내구성 등이 월등히 뛰어나 이것 역시 고가로 거래된다.
드래곤의 썩지 않은 혈액은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이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인지라 부르는 게 값이다.
마법사와 연금술사 모두 드래곤의 혈액은 불노장생의 묘약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원료라 생각하고 있다.
별 탈 없이 일만 년이나 사는 생물체이니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부패하지 않은 드래곤의 혈액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드래곤이 제 피를 뽑아줄 리 없고, 죽은 지 얼마 안 된 드래곤을 발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드래곤들은 자신의 사후가 평안하길 바라기 때문에 인간이나 기타 몬스터 등이 범접할 수 없는 곳에서 최후를 준비한다.
대개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 위나, 아주 깊은 동굴의 안쪽에 마련된 특수공간인 경우가 많다.
이건 사체가 온전히 마나의 품으로 흩어진 뒤에야 풀리는 결계로 가려진 경우가 많아 가까이 가도 발견하기 힘들다.
켈레모라니처럼 자신의 레어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더더욱 가까이 할 수 없다.
아주 강력한 무력을 가진 가디언들이 지키고 있기에 진입이 불가능한 때문이다.
따라서 갓 죽은 드래곤을 볼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사정이 다르다. 본인이 직접 드래곤과 대결하여 목숨을 끊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의 스승 멀린도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하나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피를 뽑아내진 않았다.
대결하는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 뽑아낼 피가 적었던 이유도 있지만 본인도 지친 상태였던 때문이다.
한편, 드래곤의 뼈는 강철보다도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이것으로 제작된 검이 있다면 소드마스터가 아니더라도 검강 또는 오러에 의한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검강을 구현시킬 수 없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다.
이러는 동안 위력보다는 검식 위주로 대결에 임하면 소드마스터를 감당할 수 있거나 이길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드래곤의 뼈로 만든 본 소드(Bone sword)는 구울, 좀비, 스켈레톤, 뱀파이어 등 어둠의 세력과는 상극이라 척사(斥邪)의 용도로 많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