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4
뿐만 아니라 열전도 현상이 거의 없으며, 마법에 대한 대항력이 강한 물질이다.
마지막으로 드래곤의 부패하지 않은 살은 최고의 식재료이다. 이것을 먹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솟는다고 한다.
물론 드래곤의 살을 요리해서 먹어봤다는 기록은 없다. 그럴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현수의 아공간엔 실버드래곤의 온전한 사체 한 구가 보관되어 있다. 마법적 보존처리가 워낙 잘되어 갓 죽은 듯 아주 생생한 상태이다.
이를 어찌 처리할 것인지는 현수의 결정에 좌우될 것이다.
“흐음! 드래곤의 사체라……!”
다른 어떤 것보다도 드래곤 하트의 효용이 클 것이다.
“마나를 좋아하는 포인세 재배지를 더 넓게 할 수 있게 되었군. 근데 바이롯 재배지에 보관하면 어떨까?”
사내들을 제왕으로 만들어주는 바이롯의 유일한 단점은 과도한 방사로 인한 기력 소모가 문제된다는 것이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마나포션을 사용했다. 그런데 바이롯 자체가 마나를 함유할 수 있게 되면 어떨까 싶다.
현수의 이런 발상은 천 년 묵은 산삼보다도 좋다는 슈피리어 바이롯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단점이었던 과도한 기력 소모 대신 원기 회복이라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후후! 아무튼 큰 거 한 건 한 기분이네.”
아공간에 있는 동안은 사체에 어떠한 변화도 발생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어찌 처리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켈레모라니님의 레어를 한번 가봐야겠군.”
자신의 심장을 보호하고 있는 비늘엔 1,000년간 정제된 순수한 마나로 가득하다.
사용하면 다시 보충되도록 오토 리차지 기능이 있는데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실버드래곤의 비늘로 켈레모라니의 비늘과 같은 걸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허공을 날고 있던 아리아니가 얼른 현수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옛 주인님의 레어에 혹시 서재 같은 거 있어?”
“서재라 함은 책들이 그득한 곳이지요?”
“그래!”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아니는 뭔가 아련한 추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연다.
“켈레모라니 님은 옛날이야기를 참 좋아하셨어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무슨 소린가 싶어 시선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아리아니의 말이 이어진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책을 모아놓으셨고, 잘 보존되어 있지요. 책이 상당히 많아요.”
“그래? 그럼, 나중에 그거 내가 봐도 될까?”
“물론이에요. 옥시온케리안 님께서 말씀하시길 주인님은 옛 주인님의 후계자시래요. 그래서 옛 주인님께서 남기신 모든 것의 주인이세요.”
“아! 그래?”
이런 말은 언제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리아니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존재이다.
“내가 너의 옛 주인님을 만지는 것도 되는 거야?”
드래곤들 가운데 가장 마법적 성취가 높은 존재가 골드 일족이다. 그런 골드 일족 중에서도 고룡에 속하는 켈레모라니는 자신의 비늘에 1서클부터 9서클까지 알고 있는 모든 마법 구결을 기록해 두었다.
드래곤의 사체이니 이미 천금보다 비싸다. 그런데 다른 드래곤과 달리 모든 비늘에 뭔가가 쓰여져 있다.
마법 구결인 것도 있고, 어떻게 하면 몸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지, 아름다운 몸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도 있다.
이 세상 마법사들이 꿈에서라도 한 번만 봤으면 싶을 보물 중의 보물이다.
현수는 문자화되어 있는 용언마법을 보고 멀린의 그것과 약간씩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인간의 마법과 드래곤의 용언마법의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하면 융화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될 듯 될 듯하지만 아직은 완벽하게 경계를 좁히진 못한 상태이다. 한 번쯤 더 자세히 켈레모라니의 사체를 보고 싶었지만 아리아니가 저어하는 듯하여 말도 안 꺼냈었다.
“후계자가 되셨으니까 만지셔도 되요. 다만…….”
켈레모라니가 생전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아리아니가 제일 잘 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을 땐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가장 깨끗한 물을 찾아 씻었다.
식사 후엔 반드시 입안을 헹궜고, 더러운 것이 손에 닿았다면 그 즉시 씻어 내렸다.
자기 전에 다시 한 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닦아야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먼지 한 점 없는 잠자리이다.
본체일 때는 더러워지는 법이 없음에도 하루에 한 번 호수를 유영했다. 그리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비늘을 일일이 점검했다.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발톱도 깎았다.
어떤 모습을 취하든 주변까지 늘 청결해야 했고, 완전무결한 정리정돈을 추구했다.
그렇기에 뭔가 말을 하려다 만다. 이제 제법 눈치 빨라진 현수가 어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가!
“약속할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켈레모라니 님의 사체를 훼손하는 일은 없을 거야. 드래곤 하트도 안 건드려.”
“…아니에요. 후계자이시니까 뭐든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되요. 뭐든지요.”
아리아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꼭 다문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웬만하면 보존해 달라는 뜻을 어찌 모르겠는가!
“알았어! 각별히 주의할게. 그나저나 내가 켈레모라니 님의 후계자라고 누가 그랬어?”
“로드께서 그리 말씀하셨어요. 주인님께서는 골드 일족과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셨다구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곧 결혼할 케이트는 골드 일족이 유일하게 거둔 인간 제자이다.
이것만으로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켈레모라니의 후계자이면서 옥시온케리안의 영역 안에 이실리프 자치령이 조성되고 있으니 골드 일족과는 정말 깊은 인연이 되는 셈이다.
“그랬군.”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7장 제자를 사칭한 죄
“어서 오십시오, 마탑주님!”
“그래! 수고가 많네.”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정문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피친트 아델 드 팔리안은 금방 상기된다.
하늘같은 마탑주로부터 칭찬받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아, 참! 이, 이쪽으로 들어가십시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정문은 중앙의 대문과 좌우 쪽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문은 15m 폭으로 마탑주의 전유물이다. 좌측 쪽문은 폭 7.5m이고, 우측은 3.75m로 만들어져 있다.
정문은 국왕과 마탑주가 행차할 때만 열린다.
좌측 쪽문은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거주하고 있는 여인의 가족들이 면회실로 갈 때 사용하는 문이다. 대부분 고위 귀족의 여식이기에 예우차원이다.
나머지는 전부 우측 문을 쓴다.
좌측문은 일 년에 열두 번쯤 열린다. 연간 2회만 면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측 문은 시녀들도 드나들기에 수시로 열리지만 정문은 1년에 한 번도 안 열리던 때가 많았다.
마탑주가 없으니 국왕도 방문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끼이이, 끼이이, 끼이이이이이―!
아델과 두 명의 병사가 전력을 다해 밀고 있지만 정문은 너무 육중하고, 너무 뻑뻑하다.
“그리스! 그리스! 윈드! 윈드!”
샤라라라랑―!
현수의 손끝에서 뿜어진 마법이 구현되자 뻑뻑하던 경첩 부위의 마찰력이 순식간에 제로에 수렴된다.
곧이어 당도한 바람마저 가세하자 힘겹게 열리던 문이 순식간에 활짝 열린다.
“아……! 고맙습니다.”
아델은 마탑주가 도왔음을 깨닫고 크게 허리를 숙인다. 그러는 사이에 현수는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서너 발짝을 떼었을 때 아델이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소리친다.
“마탑주님! 제자이신 로스톤 팔머 드 홀로렌 기사는 어떻게 하라고 할까요?”
“제자? 누가? 로스톤이?”
어찌 된 영문이냐는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아델의 보고가 이어진다.
“네! 제자이신 기사 로스톤은 현재 이실리프 빈관에 대기 중에 있습니다. 마탑주님께서 귀환하셨으니 찾아뵈라고 전할까요?”
“그 녀석이 빈관에 있다고?”
“네! 경비단장님께서 명하셔서 빈관 객실 중 가장 좋은 슈피리어 룸에 머물고 있습니다.”
“……!”
로스톤은 홀로렌 영지를 방문했을 때 근무태만을 지적하자 겁 없이 덤벼든 녀석이다.
그래서 경솔한 판단으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킬 뻔했던 스미든 코린 반 호마린과 함께 개고생을 시킬 예정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최고급 호사를 누리고 있다?
누가 먼저 현수의 제자라는 말을 꺼냈는지 모르지만 최상급 대접을 받고 있다니 살짝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바로 찾아뵈라고 말 전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대신 로스톤에게 내일부터 매일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를 열 바퀴씩 뛴 후 가로베기 3,000번, 세로베기 3,000번씩을 하라고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영역은 외부 정원을 뺀 부분만 가로 500m, 세로 1,000m이다.
이것의 둘레는 3㎞이지만 외곽 길은 약 4㎞로 조성되어 있다. 경비기사들은 하루에 두 번 이곳을 돌며 이상 여부를 확인한다.
아무튼 이것을 열 바퀴 돌면 40㎞이다.
달리기가 생활화되어 있지 않은 일반인의 경우 4시간이 넘게 걸릴 거리이다.
게다가 로스톤은 기사이므로 갑옷을 입고 뛸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6시간 이상은 달려야 한다.
이 정도면 지쳐서 쓰러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달리기를 마친 후 가로베기와 세로베기를 각각 3,000번씩 하라고 한다. 현수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 정도 수련은 매일 한 듯싶다.
아델은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계획하였고, 그것을 실천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로스톤과 똑같이 할 자신이 없다. 훈련 강도가 무지막지하게 강하기 때문이다.
‘역시 마탑주님께서는 다르시군. 으음, 나도 내일부터 로스톤 경과 함께 뛰어야겠군.’
몸은 몹시 힘이 들겠지만 훈련을 견뎌내면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현수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매일 실시할 것이며, 몸에 무리가 있다 판단되더라도 신관에겐 가지 말라 전하게.”
그간 호사를 누렸으니 고생 한번 해보라는 뜻이다.
“아! 네에. 알겠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완수할 수 있는 고된 수련이야말로 더 높은 경지로 이끄는 지름길이라 생각한 아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고생 안 해도 될 사람이지만 스스로 훈련에 동참하니 고생문이 훤히 열린 셈이다.
현수는 천천히 걸어 마탑주 집무실인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다른 곳은 온통 여인들 천지인 때문이다.
그런데 아델이 어떻게 기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소피아를 비롯한 아이리스와 아그네스, 그리고 이사벨과 나오미, 마샤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다.
“더없이 위대하신 마탑주님을 알현하옵니다.”
“주인님을 다시 뵈오니 너무 좋사옵니다.”
“소녀, 주인님만 학수고대하였나이다.”
“끄응!”
여섯 여인이 공손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추었건만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토했다. 고개를 숙이면서 자연스레 앞섶이 벌어져 열두 개의 수밀도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부착시킨 항온마법진이 문제이다.
바깥은 쌀쌀하지만 이곳은 온실 속처럼 따뜻하다. 하여 얇은 옷차림인지라 못 볼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소피아! 왕궁으로부터 연락이 있었는가?”
“아직이옵니다.”
여섯 여인 모두 현수가 다프네를 찾고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조금도 투기의 빛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