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5
마탑주가 아무리 많은 여인을 취하더라도 질투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다프네가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 라이세뮤리안의 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찌 드래곤의 딸을 상대로 질투 운운할 수 있겠는가! 이곳 아르센 대륙 사람들의 뇌리엔 드래곤은 절대자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그렇기에 국력을 기울여 다프네를 찾는 것에 대해 조금의 불만도 없다.
나중에 현수를 모시게 되면 언니가 될 존재라 여기기에 오히려 영광스럽다 생각하고 있다. 조만간 드래곤의 딸과 동급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흐음! 아직도인가?”
“국왕 전하께오서 모든 귀족과 기사, 그리고 변방의 병사들까지 총동원하여 이 잡듯 뒤지고 있다 하옵니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알겠소.”
현수가 고개를 끄덕일 때이다.
쪼르륵! 쪼르르륵―!
누군가의 뱃속이 비었다는 뜻이다. 물론 현수는 아니다. 아무튼 장본인이 누군지는 금방 밝혀진다.
털썩―!
“죄, 죄송하옵니다.”
바닥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린 여인은 화이트 후작의 딸 마샤이다. 여섯 여인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그래 봤자 21살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제시카 알바와 흡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금발이고, 더 하얗다는 것이다.
몸매도 아주 잘 빠져서 지구를 기준으로 보자면 엄청 섹시해 보인다.
“배가 고픈가 보네.”
“…죄송하옵니다. 소녀가 마탑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사옵니다. 이곳 헥사곤의 규칙에 따라 채찍형으로 저의 죄를 씻겠사옵니다.”
“규칙? 채찍형……?”
현수가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누구든 대답해 달라는 표정을 짓자 소피아가 나선다.
“위대하신 분에게 무례했거나 죄지은 자는 채찍형으로 다스리라는 것이 헥사곤을 설립하신 선대 국왕과 선대 영광의 마탑주님의 뜻이옵니다.”
기다렸다는 듯 소피아의 말에 토를 단 것은 아그네스이다.
“지금 같은 경우는 채찍질 열 번에 해당되옵니다.”
“마탑주님의 이맛살이 찌푸려지셨으니 가시 박힌 채찍이어야 하옵니다.”
말을 마친 소피아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마샤를 바라본다. 그 아픈 채찍질을 어찌 감당하겠느냐는 뜻이다.
“참아야지요. 아프겠지만 죄를 지었으니 제가 감당해야만 할 일이니까요.”
체념한 듯한 마샤에게 이사벨과 나오미가 다가선다.
“세 대는 제가 대신할게요.”
“저도 언니 대신 세 번 할게요.”
“……!”
죄라고도 할 수도 없는 일 때문에 스스로 가시 박힌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대신 감당하겠다는 것도 이상하여 현수는 셋을 바라보았다.
이때 냉랭한 표정의 소피아가 나선다.
“그렇게는 안 되지요.”
“……!”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소피아는 기다렸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곤 입을 연다.
“잊었나요? 우리는 공동운명체예요. 다 같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마탑주님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해요.”
“……!”
아무도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소피아 공주가 한 말이 맞기 때문이다.
“마샤 언니가 실수한 거 맞아요. 마탑주님이 인상을 찌푸리셨으니 규칙상 열 번의 채찍질을 해야 하는 것도 맞아요.”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소피아 공주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열을 육으로 나눌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다 같이 두 번씩 하기로 해요.”
소피아 공주의 말이 끝나자 한 살 많은 아이리스 공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평상시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피아는 제1왕후의 딸이고, 아이리스는 제2왕후의 딸인데 모친들이 앙숙 관계인 때문이다. 하여 아드리안 왕궁에선 궁중 암투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했다.
둘 다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기에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들어와 있지만 모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여 평상시엔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적으로 소피아의 말이 옳기에 편을 들고 나선 것이다.
“저는 찬성이에요.”
아이리스가 크게 외치자 나오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찬성이에요. 마샤 언니만 그럴 순 없지요.”
“저도 찬성이랍니다. 사실 마샤 언니가 배고픈 이유는 저 때문이에요. 제가 배가 고파서 언니 걸 빼앗아 먹었거든요.”
나오미의 말이 떨어지자 필립스 공작의 손녀 이사벨 역시 한마디 거든다.
“채찍 준비는 제게 맡겨두세요. 제가 기르는 선인장의 가시를 뽑아서 만들게요.”
이사벨은 아주 결연한 표정이다.
제대로 된 가시 박힌 채찍을 만들고, 한 대만 맞아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하게 채찍질을 하려는 모양이다.
마샤는 본인의 배에서 난 소리 때문에 동생들 모두가 나서자 고맙고 미안했다.
규칙은 규칙이니 두 대씩 나눠서 맞는 게 맞다. 그런데 채찍형은 생각보다 많이 아프고, 흉터가 남을 수 있다.
하여 우려 섞인 표정으로 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때 현수가 나섰다.
“잠깐!”
“네! 마탑주님!”
“네, 주인님!”
“말씀하소서, 위대하신 존재시여.”
“끄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부터 토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바라보곤 고개를 숙인 여섯 여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때문이다.
마치 신이라도 바라보는 듯 극도의 공경심이 담겨 있다.
죽으라는 말을 하면 서슴지 않고 자신의 목을 그을 정도로 맹목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이곳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모든 인원에게 있어 현수의 말 한 마디는 신이 내리는 명령과도 같다.
따라서 죽으라는 말을 하면 두말하지 않고 명에 따라야 한다. 그게 이곳만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이를 어길 경우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 바깥의 모든 가족들까지 악영향이 미친다.
귀족은 작위를 잃음은 물론이고, 전 재산이 몰수된다. 그리고 노예가 되어 타국에 팔려가게 된다.
적어도 아드리안 왕국에서 이실리프 마탑주는 신과 동급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현수의 명을 따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현수는 사태의 발단이 된 마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샤!”
“네! 주인님.”
자신의 모든 것을 언제든지 내줄 수 있기에 마샤의 눈빛은 촉촉했다. 아직 어린 소피아나 아이리스는 보여줄 수 없는 섹시함이 느껴진다.
‘헐……! 아, 이런 미친……!’
순간적으로 마샤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던 현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우리 뭐 좀 먹을까?”
“네에……?”
느닷없는 말에 화들짝 놀란 듯 눈이 커진다.
마샤의 하나뿐인 오라비 장 자크 드 화이트(Jean Jacques De White)는 수도 멀린에서 가장 유명한 바람둥이이다.
참고로, 18세기 때 이탈리아 최고의 모험가이자 성직자이며 작가, 군인, 첩자, 외교관이었으며, 최고의 바람둥이였던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의 별명이 장 자크이다.
아무튼 젊은 시절의 브래드 피트를 꼭 빼닮은 자크는 수많은 귀족가 여인의 마음을 빼앗아 상사병을 앓게 했다.
자크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꼬실 때 가장 잘 쓰는 말이 바로 ‘우리 뭐 좀 먹을까?’이다.
자크는 잘생긴 얼굴, 빼어난 신체조건, 그리고 후작가의 장남이라는 배경과 일찌감치 소드익스퍼트 초급에 올라 정식 기사 작위까지 받은 것을 두루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게다가 누구라도 현혹될 화려한 언변까지 갖췄기에 어떤 여인이라도 꼬실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이 말은 사실이다. 꼬시려고 마음먹었는데 실패한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여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바람둥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자크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여자들의 눈에 자크는 한국으로 치면 장동건, 정우성, 원빈, 조인성, 송승헌의 장점만 취합해 놓은 사람이다.
하여 그에게 간택되기만 하면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환상 속에 잠기게 한다.
몸만 빼앗고 나 몰라라 했으면 악감정이라도 품겠지만 자크는 그럼 의미의 바람둥이는 아니다.
마음만 빼앗고, 가능성만 보여줄 뿐 성적으로 유린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 것에 대해 반감이 없는 것이다.
아무튼 마샤는 자크의 하나뿐인 여동생이기에 오라비의 이런 모습을 많이 봤다. 그런데 오라비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느끼한 말이 현수의 입에서도 나왔다.
이 순간 마샤의 뇌리는 텅 비어 버렸다. 오라비인 자크 따위는 상대도 되지 못할 만큼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마탑주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자는 뜻으로 들린 때문이다.
하여 저도 모르게 평소의 조신함을 잃어버렸다.
“조, 좋아요! 근데 뭐 먹어요?”
“글쎄……! 뭐가 좋을까? 으음, 파스타가 어떨까? 여자들이 좋아하잖아. 마샤! 알리오에올리오, 봉골레, 카르보나라 중에서 골라. 내가 맛있게 해줄게.”
“네? 그게 뭐예요?”
현수는 지구의 요리를 고르라고 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마샤를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들 중 최하가 후작가 출신이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괴상한 요리명에 세상에 그런 것도 있나 하는 표정이다.
“아! 그건 말이지……. 알았어, 내가 종류별로 만들어줄 테니 일단 한번 먹어봐.”
말을 마친 현수는 밖으로 나가 취사용 컨테이너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아공간에 없다.
그건 로니안 공작 일행이 사용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못 만들 이유가 없다.
아공간에 담겨 있던 것들 중 필요한 기구를 꺼내 식탁과 조리대를 만든 후 즉시 요리를 시작했다.
소피아를 비롯한 여섯 여인은 물론이고, 최측근에서 이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열두 명의 시녀까지 숨소리를 죽인 채 파스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있다.
‘딱―!’ 소리와 더불어 휴대용 가스버너에서 새파란 불길이 솟아나자 감탄사를 터뜨린다.
1.8리터짜리 생수병을 꺼내 냄비 속에 물을 붓자 또 감탄사를 터뜨린다.
물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페트병을 보고 놀란 것이다.
해산물을 볶을 때는 화이트 와인을, 육류를 볶을 때는 레드와인을 이용하여 화려한 불쇼를 보여주자 입을 딱 벌린다.
그간 요리를 많이 해서 그런지 현수의 팬 잡는 실력은 웬만한 쉐프 부럽지 않아 보였다.
아무튼 재빠른 솜씨로 이 팬, 저 팬으로 봉골레와 카르보나라, 그리고 알리오에올리오와 아마트리치아나, 스콜리오, 알프레도, 볼로네제 파스타를 만들어냈다.
이것만 먹으면 느끼할 수 있기에 상큼한 맛을 내줄 오렌지주스와 포도주스를 꺼내 크리스털 잔에 따랐다.
물론 시원한 생수도 따라 놨다.
소피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아공간에서 나온 크리스털 잔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본다.
이곳 아르센에도 유리는 있지만 천연 유리만 존재한다. 아직 유리를 제조할 기술이 없는 때문이다.
참고로 천연 유리는 비결정성 무기물질로 마그마가 빨리 냉각될 때 생성된다. 그래서 소량만 생성되기에 이곳에선 유리도 당당한 보석 대접을 받는다.
여인들은 주먹보다도 큰 보석을 정교하게 깎아서 만든 게 눈앞의 크리스털 잔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곳에선 보물 중에서도 특A급이다.
아드리안 왕궁에도 유리잔은 있다. 다만 눈앞의 것처럼 맑고 투명한 것이 아니라 뿌연 녹색이다.
이것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사용된다. 선대 왕들을 추모하는 예를 올릴 때 제기의 용도이다.
“자아! 식으면 맛이 없으니까 다 같이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