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8
검붉으면 대장 위쪽의 출혈을, 갈색이면 적혈구가 파괴되는 자가면역질환이나 간질환을 의심해 봐야 한다.
회색 똥은 담도폐쇄질환 여부를, 녹색 똥은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나 장염 증상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걸 어찌 알았는지 매일 현수의 대소변을 받아 일일이 맛을 보고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이 기록은 7일에 한 번씩 헥사곤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는 약제사에게 보내진다. 탈이 있다 판단되면 적절한 처방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그것도 고위 귀족가의 여인들에게 어찌 자신이 싼 똥과 오줌 맛을 보게 하겠는가!
하여 이 항목 삭제를 지시한 것이다.
“주인님! 이건… 이건 주인님의 건강을 위해…….”
“내 몸은 바디체인지를 겪으면서 완벽해졌다. 따라서 이런 행위가 무의미하니 삭제하라는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차기 마탑주님은…….”
현수가 이사벨에게 시선을 주자 말끝을 흐린다. 할 말 있으시면 하라는 뜻일 것이다.
“내 수명은 앞으로도 1,200년 이상이 남았다.”
“네에? 정말이요?”
인간이 어찌 1,200년을 넘게 산단 말인가!
하여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방금 전에 들었던 바디 체인지를 떠올렸다.
깨달음을 얻으면서 신체가 재구성되어 수명이 늘어난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다. 그런데 1,200년이 넘게 늘어나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쨌거나 국가의 존속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예를 들어, 로마 503년, 무굴 322년, 러시아 421년, 페르시아 221년, 오스만 624년이다.
한반도의 경우를 살펴보면 가야 562년, 백제 678년, 고구려 705년, 신라 992년, 고려 474년, 조선 505년이다.
현수의 기대 수명은 1,300년이다. 이제 서른이니 앞으로 1,270년쯤 더 무병장수한다는 뜻이다.
마탑주의 승계는 마탑주가 죽어야 이루어진다. 지금껏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양위된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너무 노쇠하여 더 이상 움직일 기운이 없게 되면 부탑주가 역할을 대신할 뿐이다.
다시 말해 이실리프 마탑의 제3대 마탑주는 앞으로 1,270년쯤 더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1,200년이란 세월 동안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가 존재할 것이라곤 아무도 예측 못한다.
그사이에 아드리안 왕국 자체가 소멸되거나 멸망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실리프 마탑이 있으니 이런 일은 벌어지지 못할 것이다.
현수는 인류 최초이며, 마지막일지도 모를 10서클 마스터이다. 또한 위저드 로드이며 그랜드 마스터인데 누가 감히 아드리안 왕국을 넘보겠는가!
아무튼 몇몇 조항을 짚어 즉시 삭제했다.
마샤는 너무 많이 지우는 것 같아 우려 섞인 음성으로 신중을 당부했다.
연장자다운 말이었지만 가납되지 않았다.
남은 조항을 보니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과 질투하지 말라는 것 정도가 남았다.
가족 이외의 사내들과의 대면을 금지시킨 율법도 삭제되었고, 외출을 금지시킨 것 역시 지워졌다.
그래도 너무 자유분방한 것은 곤란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기에 한 달에 2번만 외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허용되는데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겨울엔 일몰시각이 마감시한으로 수정되었다.
“흐음! 이제 되었군. 수정된 율법은 오늘 오전 일출한 시각으로부터 시행되는 것으로 기록하겠다.”
“……!”
이런 걸 하게 되면 지금 당장이라든지 혹은 내일부터라든지 할 텐데 시간을 당긴다 하자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이쯤 되면 저의를 알려주는 것이 편하다.
“따라서 각기 4대씩 맞아야 하는 채찍질은 안 해도 된다.”
“아……!”
“감사하나이다, 주인님!”
여인들은 배려받은 것이 감격스러운지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한다. 바로 곁에 있던 소피아의 팔엔 소름이 잔뜩 돋아 있다. 주인님의 사랑에 전율을 느낀 때문이다.
이때이다.
쿵, 쿵, 쿵―!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아뢰옵나이다. 왕궁에서 시종장이 왔사옵니다. 국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마탑주님과의 독대를 청하였사옵니다.”
“그래? 알았다. 이곳으로 들라 하라.”
“네에, 명을 받자옵니다.”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지자 여인들은 일제히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하늘같은 마탑주의 면전에서 물러날 때엔 엉덩이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있기 때문이다.
여인들이 썰물처럼 사라진 직후 세상의 중심의 문이 스르르 열린다. 하지만 경첩이 없어 마찰음은 있다.
삐이꺽―!
“……!”
문이 열린 후 가장 먼저 보인 모습은 누군가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다. 잠시 후,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 사내가 들어선다.
사내는 조심스런 눈길로 주변을 살피다 현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부복하며 소리친다.
“신, 알베르토 폰 조디악, 위대하신 마법사의 하늘인 마탑주님을 충심으로 알현하옵나이다.”
쿵―!
돌로 이루어진 바닥에 머리 박는 소리가 들린다.
주르륵―!
조심스레 이마를 드는데 예상대로 살이 터져 피가 흐른다.
하여간 이 동네는 과잉충성이 문제이다.
구불구불하게 접어서 박음질을 한 듯한 레이스 잔뜩 달린 앞섶은 금방 붉게 물든다.
“힐―! 워싱! 클린! 이베포레이션!”
말 떨어지기 무섭게 터졌던 이맛살이 봉합된다. 그리곤 선혈로 물들었던 예복이 순식간에 깨끗해진다.
조금 전까지 누런빛이 감도는 흰색이었다면 지금은 완연히 하얀색 쪽에 가깝도록 바뀌어 있다. 세탁마법 덕분이다.
“아……!”
알베르토는 오래 입어 약간은 꼬질꼬질했던 예복이 순식간에 세탁되는 모습에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린다.
왕궁에도 마법사들은 있지만 이런 능력은 없을 것이다.
시종장도 귀족이지만 고작 의복 세탁에 마법을 쓰지 않기에 확인되지 않은 일이다.
현수가 아드리안 왕국의 수도 멀린을 찾은 이유는 실종된 다프네의 행방이 확인되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함이다.
그런데 모든 정보가 집결되는 왕궁으로 향하지 않고 헥사곤으로 온 이유는 국왕과 대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곧바로 왕궁을 찾았다면 삽시간에 난리가 벌어졌을 것이다.
대소신료 전부 현수를 맞이하기 위해 의복을 정제하고 공손히 시립한 채 기다려야 한다.
국왕도 하던 일을 멈추고 현수와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모든 왕비와 왕자들, 그리고 공주들까지 왕궁을 찾은 현수에게 예를 갖추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마탑주를 맞이하는 예법이기 때문이다.
영광의 마탑은 마탑주와 부탑주를 비롯하여 3서클 이상 마법사 전원이 깨끗하게 세탁된 로브를 걸친 채 도열해 있어야 한다.
이들의 건너편엔 현수가 준 드워프제 아머를 걸치고, 드워프제 검을 치켜든 기사들이 서 있어야 한다.
모든 시종과 시녀, 그리고 왕궁 노예들은 현수가 디딜지 모를 곳에 양탄자와 비슷한 의도로 제작된 깔개를 깔아놓은 채 무릎 꿇고 기다려야 한다.
현수 하나 때문에 왕궁 전체가 한국의 군대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CPX에 걸리는 것이다.
현수의 방문 목적은 다프네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 하나뿐이다. 아내 될 여자이니 이는 개인적인 일이다.
따라서 본인으로 인한 번거로움이 타인들에게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아 헥사곤으로 온 것이다.
그래도 마탑주가 헥사곤에 당도했다는 것은 즉각 왕궁으로 알려질 것이다. 적어도 아르리안 왕국에선 왕비가 왕자를 낳았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소식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헥사곤 안으로 들어간 직후 경계근무 중이던 피친트 아델 드 팔리안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원래 수도에서는 말을 타더라도 속력을 내선 안 된다. 행인이 부상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속력으로 달렸다.
요란한 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혹시 전쟁이라도 터졌나 싶어 근심스런 표정으로 아델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델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왕궁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
9장 누굴 고르지?
헥사곤과 왕궁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아델은 금방 왕궁 정문에 다다랐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헥사곤에서 왔다. 급한 용무가 있으니 모두 비켜라!”
누군가가 말을 몰고 오자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왕궁 수문위사들은 아델의 고함에 즉시 썰물처럼 물러섰다.
아델이 걸친 아머는 현수가 지급한 드워프제이다. 독특한 문양과 색상을 가졌기에 한눈에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아델의 손에는 깃발 하나가 들려 있다.
헥사곤을 상징하는 이실리프 마탑의 고유한 문장이 그려진 것이다. 이는 아무나 들고 다닐 수 없는 것이기에 즉시 길을 터준 것이다.
그대로 말을 몰아 왕성 안에 들어간 아델은 내성 입구에 다다라서야 하마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실리프 마탑주가 당도했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안으로 달려갔다. 1초라도 빨리 국왕에게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수의 당도 소식을 보고받은 국왕은 즉시 그간 취합한 정보를 정리한 문서를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누가 헥사곤을 방문할 것인지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다.
마탑주와 국왕은 대등하다.
일전에 국왕이 먼저 헥사곤을 방문했다. 그런데 또 국왕이 행차를 하면 모양새가 빠진다.
게다가 아무리 짧은 거리라 하더라도 국왕이 행차하려면 많은 수행원이 따라나서야 한다.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중요한 것은 다프네의 행방에 관한 정보이다.
이걸 빨리 전해줘야 하는데 국왕이 행차하려면 준비하느라 시간이 지체될 수 있다. 그렇기에 국왕을 대신한 귀족이 나서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문제는 누가 가느냐는 것이다.
권력의 실세라 할 수 있는 로레알 공작과 필립스 공작, 그리고 할렌 후작과 화이트 후작은 갈 수 없다.
올해 허용된 두 번의 면회를 이미 사용한 때문이다.
관례대로 연초에 한 번 방문하여 여식 내지 손녀가 잘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현수가 왔다 간 직후에도 갔었다.
혹시라도 가연이 있었나 싶어 그걸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올해 허용된 두 번의 방문 모두가 이루어졌으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왕국엔 두 명의 후작이 더 있지만 둘 다 변방의 영지에 가 있다. 그렇다면 백작급이 나서야 하는데 그건 안 된다.
국왕과 대등한 마탑주를 만나러 가는데 백작을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적임자를 찾아냈다.
도승지(都承旨) 역할을 하는 국왕의 비서실장이다.
참고로, 도승지는 조선시대 때 승정원에 있던 여섯 승지 중 수석 승지로 왕명을 하달하고, 하의(下意)를 상달(上達)하는 일을 맡았다.
문제는 이 자리가 공석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이 자리에 있던 백작이 서거한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고서와 국왕의 친필 서한이 작성되는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결과 낙점된 것은 알베르토 폰 조디악 자작이다.
백작보다도 낮은 작위임에도 알베르토로 결정된 것은 지난 40년간 왕실 시종장을 역임한 때문이다.
아무튼 현수의 마법에 살짝 놀란 알베르토는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는 듯 입을 연다.
“위대하신 마탑주님께 국왕전하께오서 전하라 하신 보고서와 친필 서한이 있사옵니다.”
“흐음, 그런가? 그렇다면 내주게.”
“네! 마탑주님.”
무릎을 꿇은 알베르토는 더 이상 공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보고서와 친필 서한을 두 손으로 올린다.
둘 다 두루마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하나는 검은색이고, 다른 하나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