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019화 (1,018/1,307)

# 1019

먼저 펼쳐 든 것은 검은색 두루마리이다.

촤르르륵―!

제법 내용이 많아 두 팔을 약 110°가량 벌려야 했다.

친애하옵는 마탑주님 친전(親展).

아드리안의 국왕 아민 멘데스 폰 아드리안이 전합니다.

지난 만남 이후 아국은 모든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행정관과 병사들, 국민들까지 총동원하여 위대하신 존재의 혈육이시자 장차 마탑주님의 아내가 되실 분의 행방을 쫓은 바 있사옵니다.

최종적으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다프네 님은 아국 남단에 위치한 콘트라 영지의 항구에서 ‘검은 별의 전설’이라는 상선을 탄 것으로 확인되었사옵니다.

이 배의 목적지는 아국 동쪽에 위치한 라이카 왕국이며, 승선인원은 선원과 노꾼 포함하여 153명이옵니다.

다프네 님과 함께 승선한 인원은 모두 열둘로 사내 여섯과 여성 여섯이옵니다.

출발한 일시는 금일로부터 이십칠 일 전이며, 검은 별의 전설은 사흘 후에 귀항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사옵니다.

마탑주님의 아내 되실 분이 아국 영토를 벗어나기 전에 찾아내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사오니 부디 너그럽게 양해하여 주시길 청원하옵나이다.

“흐음! 27일 전에 파이젤 백작의 영지 콘트라에서 출발을 했다고?”

현수는 눈빛을 빛내며 콘트라 항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많은 상선이 정박해 있던 물류의 중심지 같은 모습이다.

그곳의 좌표를 알고 있으니 마음 같아선 당장 텔레포트를 하고 싶다. 그래 봐야 배는 사흘이나 있어야 온다.

검은 별의 전설호는 상선이다. 따라서 수많은 항구를 들를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쯤 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지금 가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게다가 눈앞엔 아직 펼쳐보지 않은 두루마리가 하나 더 있다. 붉은색으로 치장된 이것은 아드리안 국왕이 보낸 친필 서한이라는데 펼쳐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것은 검은색보다 더 길어 팔을 150°나 벌려야 했다.

촤르르르르륵―!

펼쳐진 두루마리엔 성품이 느껴지는 정갈한 글씨가 가득 쓰여 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친애하옵는 마탑주님께.

아드리안의 국왕으로서 마탑주님께 소견을 전합니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는 오로지 마탑주님만을 위한 공간입니다. 모든 것이 마탑주님의 소유이오니 부디 오래 머무시면서 마음껏 향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드리안 왕국은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를 지원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고지하여 드립니다.

각설하고, 최근 들어 마탑주님께 다섯 분의 배우자가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 공녀와 스테이시 아르웬 성녀는 라이셔 제국 출신이시고, 로잘린 로니안 드 테세린 공녀와 케이트 에이런 판 포인테스 공녀는 미판테 왕국 출신이라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간계의 조율자이시자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이신 라이세뮤리안 님의 혈육이신 다프네 님 또한 미판테 왕국 출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드리안 왕국은 이실리프 마탑의 창건자이시자 제1마탑주이셨던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 시조님으로부터 연유된 나라입니다.

아국은 이를 기념하고, 이실리프 마탑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지난 수백 년간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를 존속시키려 많은 예산을 들여 지원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지난 수백 년간 아국은 마탑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마탑주께서 아국의 여인과 인연을 맺지 않으시면 타국에서 우리 관계의 균열을 의심할 수 있으니 부디 가연을 맺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헥사곤에 머물고 있는 여섯 여인은 아국에서 엄선한 최고의 미녀이옵니다. 부디 이들을 취하시어 후세를 보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마탑주께서 취하신 여인들은 국법에 따라 왕후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실 것이며, 후세들 또한 왕자나 공주에 버금가는 위치가 될 것입니다.

이러니 아국에 영명하신 후손을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이는 아드리안의 국왕으로서 마탑주께 간절히 원하는 바이니 부디 제 뜻을 거절치 마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아국은 마탑주의 역량 덕분에 공국에서 왕국으로 발돋움하였음을 잊지 않았기에 국력이 미치는 한 최선을 다해 헥사곤의 안녕과 권위를 지원드리겠사옵니다.

추신) 지난번에 보여주셨던 것이 눈앞에 선합니다.

언젠가는 보내주시겠지만 너무도 마음이 가니 염치를 무릅쓰고 기다립니다.

― 아드리안 국왕 아민 멘데스 폰 아드리안 고두

“흐으음!”

국왕의 친필 서한을 모두 읽은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마음이 불편해서이다. 그러고 보니 두루마리의 색이 달랐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서양에선 색을 단순히 빛의 굴절로 본다. 하지만 동양에선 색을 우주로 해석하고 그 안에 만물을 담는다.

한국에선 전통적으로 오방색이라는 것을 쓴다.

이는 음양오행설에 의한 다섯 가지 순수하고 섞임이 없는 기본색이다.

청(靑), 적(赤), 백(白), 흑(黑), 황(黃)색이다.

다프네의 행방과 관련된 두루마리는 검은색으로 치장되어 있다. 오행 가운데 수(水)에 해당하며, 인간의 지혜를 관장하는 색이다.

상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으니 물과 관련이 있으며, 너무 분노하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함이 어떻겠느냐는 의미에서 이런 색을 고른 듯하다.

헥사곤의 여인들을 취해 아이를 많이 낳아달라고 한 두루마리는 붉은색이다.

이 색은 오행 가운데 화(火)에 해당하며,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그리고 적극성을 뜻하는 색이며 가장 강한 벽사의 빛깔로 쓰인다.

생성과 창조는 2세 만들기를 의미하며, 정열과 애정은 헥사곤의 여인들과의 관계이고, 적극성은 여섯 여인 모두를 두루 사랑해 주라는 뜻일 것이다.

국왕이 친필로 이러한 뜻을 밝혀왔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정중하게 정략결혼을 청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하나는 취해야 한다.

그런데 누굴 취하고, 누굴 안 취한다는 말인가!

소피아와 아이리스, 아그네스와 이사벨은 한국으로 치면 20세 미만이니 미성년자이다. 나오미는 스무 살, 마샤는 스물 한 살이니 당장 취해야 한다면 이 중 하나여야 한다.

그런데 이들 둘은 후작가의 여인이다.

왕가과 공작가를 제쳐두고 후작가의 여인만 취할 경우 아드리안 왕국의 정계가 폭풍우에 휘말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샤를 취할 경우 화이트 후작의 승작이 논의될 것이다.

라이셔 제국에선 카이로시아가 현수의 아내가 된다 하자 즉시 로이어 백작을 공작으로 올렸다. 미판테 왕국에선 로니안 자작과 포인테스 후작을 공작이 되게 하였다.

라이셔 제국이나 미판테 왕국에 비해 규모도 작고, 열세인 아드리안 왕국에선 화이트 후작을 대공으로 올려줘야 한다.

공국인 상태였다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공왕이 자신의 아래에 또 다른 대공을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의 아드리안은 왕국이다. 따라서 남들 보기엔 남세스럽겠지만 화이트 후작에게 대공위를 줄 수 있다.

이럴 경우 로레알 공작과 필립스 공작과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된다. 나오미의 조부인 할렌 후작과도 껄끄러워질 수 있다. 현수가 나오미를 취할 경우 상황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리즈 시절의 그레이스 켈리, 나오미 왓츠,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 올리비아 핫세, 제시카 알바 중 하나만 고르라 하면 한 번에 선택할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밤잠을 제대로 이룰 남자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현수는 딜레마에 빠진 기분이 되었다.

국왕의 청이니 형식적으로라도 하나 정도는 취하는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 그런데 고를 수가 없다.

“아! 머리 아파.”

“네?”

“아, 아닐세, 아무것도!”

“아, 네에.”

알베르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국왕께서 내게 답을 들어오라 하였는가?”

“아, 아니옵니다. 소인의 임무는 위대하신 마탑주님께 두 개의 두루마리를 무사히 건네 드리는 것이 다이옵니다.”

“그래? 그럼 물러가도록.”

“네! 그럼 이만 물러가옵니다. 내내 강녕하시옵소서.”

알베르토는 현수의 나이가 최하 200세는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 나이가 아니면 10서클이라는 지고무상한 화후를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몹시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며 물러가려 고개를 조아린다.

“참! 국왕께 전할 것이 있으니 잠시 대기하라.”

“네!”

알베르토는 무조건 따르겠다는 뜻으로 또 고개를 조아리고 멈춰 섰다.

“나를 따르라.”

“네, 마탑주님!”

현수의 뒤를 따라 헥사곤의 정문에 당도하자 아델이 정중히 허리를 꺾는다.

“충―! 위대하신 마탑주님을 알현하옵니다.”

아델은 현수의 뒤를 따라온 알베르토를 보았지만 예를 갖추지 않았다. 태양과 반딧불이가 같이 있는데 어찌 반딧불이를 신경 쓰겠는가!

한편, 알베르토는 분수를 알기에 아델이 대놓고 무시해도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그래! 헥사곤에 동원 가능한 마차가 있는가?”

“마차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얼마나 호화스러운 것인지가 아니라 용도를 묻는 질문일 것이다.

“짐을 실을 것이다.”

“아! 그거라면 세 대가 있습니다.”

“모두 가져오도록!”

“네! 잠시만 기다려주시옵소서.”

아델이 눈짓하자 곁에 있던 병사들이 후다닥 달려간다.

이런 일은 기사가 할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현수로부터 지시가 떨어지면 즉각 이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세 대의 짐마차가 당도했다. 각각의 마차엔 병사들이 둘씩 딸려 있다.

“아공간 오픈!”

현수는 아공간을 열어 멀린이 남긴 금은보화를 꺼냈다.

금화와 은화는 물론이고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사파이어, 호박, 진주, 오팔, 루비, 아쿠아마린 등이다.

아드리안 공국이 가장 번성했을 때 국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양이다. 알베르토는 물론이고 아델과 병사들 역시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흐음! 금이 너무 많군.”

짐칸 바닥에 금화들을 쏟아 놨는데 마차 바퀴가 땅속으로 파고든다. 너무 무거워서 이러하다.

현수는 마차에 경량화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ζΨ ΣΞή ξδ λΓΔΏ!”

구동어가 영창되자 푸른 마나가 마법진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더 많은 금괴를 꺼내 실었다.

마차 바퀴는 더 이상 땅을 파고 들지는 않았다. 마법진 덕에 무게가 20분의 1로 줄어든 때문이다.

잠시 후, 세 대의 마차에 가득 실린 금은보화는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국왕께 이실리프 마탑에서 주는 선물이라 전해주게.”

현수의 시선을 받은 알베르토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네에, 명을 받자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알베르토는 나날이 줄더니 이제 곧 텅텅 비기 일보 직전이던 국고가 가득 채워짐을 상상하며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국왕이 보낸 친필 서한의 말미엔 추신이 달려 있다.

현수는 이를 읽고 전에 보여주었던 금은보화를 보내달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삼국연합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너무 많은 지출을 하여 아드리안 왕국의 곳간이 텅텅 비어 있다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왕이 보내달라고 했던 것은 다른 것이다.

일전에 보여주었던 겉감은 TC186이고, 충전재는 천연목화 65%에 폴리에스테르 35%짜리 이불과 목화솜으로 만든 요, 그리고 베개 네 개이다.

이불은 24,900원에 할인 판매되는 것이고, 요는 40,000원짜리이다. 베개는 개당 9,000원짜리이니 다 합쳐 봐야 10만 9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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