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020화 (1,019/1,307)

# 1020

너무나 부드럽고 가벼워, 엎어도 엎은 것 같지 않던 것을 보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냄새나는 가죽침구를 쓰고 있다. 극과 극이라 할 수 있기에 잠자리가 늘 불편했다.

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이불과 요, 그리고 베개 네 개를 보내달라는 뜻으로 추신을 달았다.

그런데 엄청난 금은보화를 실어서 보내려는 것이다.

“아델! 자네에겐 이것들을 왕궁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부여한다. 병사들과 함께하도록!”

“넵! 마탑주님의 명에 따라 신 아델, 이것들을 왕궁까지 무사히 호송하고 오겠습니다. 추웅―!”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오른 주먹을 왼 가슴에 얹으며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충, 충, 추충충충!”

여섯 명의 병사 역시 긴장된, 그러면서도 몹시 영광스럽다는 표정으로 군례를 올린다.

“헥사곤의 깃발을 사용해도 좋다.”

“아! 알겠습니다.”

현수가 읽은 율법서의 내용 중 헥사곤의 깃발에 관한 구절이 있다.

이실리프 마탑의 로고가 그려진 깃발 아래에 금색 끈을 달면 아드리안의 모든 귀족은 즉시 예를 갖춰야 한다.

공국의 어디에서든 국왕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명문화해 놓은 것이다. 이는 아드리안 왕국법에도 명기되어 있는 내용이다.

깃발 든 자가 선두에 서면 아무런 포장 없이 엄청난 금은보화를 가져가도 탈취하려는 마음조차 품지 못할 것이다.

그랬다간 세상 모든 마법사와 세상 모든 기사의 공격을 받아 지리멸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지시하실 내용이 있으신지요?”

“스승님의 유해 안장식을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 가능한가?”

“안장식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춰졌습니다. 언제라도 가능하니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아! 그런가? 그럼 모레는 어떤가?”

알베르토는 즉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린다.

“마탑주님! 사흘 후는 어떻습니까? 시조님의 안장식인지라 가급적 많은 귀족이 참석했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흘 후?”

사흘 후면 검은 별의 전설호가 항구에 도착하는 날이다.

‘새벽에 도착하는 건 아니겠지.’

상선이니 도착하면 하역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오랜 항해를 마치고 온 선원들은 선술집에 머물 것이니 조금 늦게 간다 해도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진 않을 것이다.

“알겠네. 그렇게 국왕에게 전하게.”

“알겠사옵니다. 성대한 안장식이 거행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알베르토는 크게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한다. 왕실 시종장으로서 국왕을 대리하는 의미이다.

“그럼 물러가도록 하게.”

“네! 마탑주님, 모레 뵙겠습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실리프 마탑의 깃발을 앞장세운 행렬이 출발한다.

멀찌감치 떨어져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깃발 아래에 달린 금색 끈을 보곤 모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국왕의 행차와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알베르토가 물러간 후 현수는 스승의 유해가 안장될 후원을 찾았다. 당장에라도 안장식을 치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인이 그려 넣은 마법진들도 시동어만 외치면 즉시 구동될 상황이다.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곤 본인의 집무실인 세상의 중심으로 되돌아왔다.

“아! 오셨어요?”

소피아 등은 뭔가를 작업하던 중이다.

“뭐하는 거지?”

“주인님께서 고치신 율법을 정리하고 있사옵니다. 작업이 다 되면 보시고 윤허하여 주셔요.”

“그러지.”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집무실 안쪽에 마련된 침실로 들어갔다. 허락해 주지 않으면 청소조차 할 수 없는 방이다.

“흐으음!”

현수는 커피 한 잔을 만들어놓곤 나직한 침음을 냈다. 국왕의 간곡한 청이 마음에 걸려서이다.

눈을 감으니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들이 서로 꺾어달라고 간청하는 듯한 환상이 보인다.

얼른 눈을 뜬 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휴우! 이럴 땐 머리를 쉬게 하는 게 좋지.”

현수는 옷을 갈아입었다. 지구로 귀환하여 머리를 차분하게 한 뒤 다시 오려는 것이다.

같은 시각, 율법서 수정을 마친 여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음모를 꾸미는 중이다.

현수가 당도하기 직전 받았던 수업은 사내를 유혹하는 법이었다. 수업을 담당했던 은퇴한 왕궁 침실 시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내를 유혹하려면 진하지 않은 향수로 코를 자극하고, 적당한 노출로 시각을 자극해야 합니다.”

이 말이 끝났을 때 여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여러분들처럼 아름다운 분들은 더 쉽겠죠.”

이 대목에서 소피아 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자연스런 스킨십을 유도하여 촉감을 자극하면서,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청각까지 자극하면 백이면 백 전부가 넘어옵니다.”

소피아 등은 열심히 필기를 했다.

마탑주의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필사적으로 현수를 유혹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수업에 대한 열의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 같이 꽃잎 띄운 물에서 수욕을 하고 반쯤 헐벗은 야시시한 의복을 걸치고 기다리기로 했다.

현수가 나오기만 하면 일제히 달려들어 혼을 쏙 빼놓은 다음 안아달라고 애원하기로 했다.

물론 코맹맹이 소리로 하는 애원이다.

같은 시각, 옷을 다 갈아입은 현수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트랜스퍼 데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진다. 이곳에 다시 나타날 시각은 앞으로 사흘 후이다.

* * *

“흐으음! 역시 다르군.”

모스크바의 공해는 서울보다는 약하지만 결코 청정하진 않다. 현수는 텁텁한 공기가 왠지 짜증이 났다. 좋은 급식에서 갑자기 저질 급식으로 바뀐 듯한 느낌 때문이다.

음식으로 비교하자면 데코레이션 화려한 호텔 스테이크와 1970년대 군대 짬밥이다.

“하여간 지구는 다 좋은데 이게 마음에 안 들어.”

나직이 투덜거린 현수는 계단을 딛고 아래로 내려갔다.

쌕, 쌕―!

이리냐는 이불을 걷어차 늘씬한 교구를 드러낸 채 잠들어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곳에서의 지난밤은 제법 격렬했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 만난 때문이다.

이리냐는 사막을 횡단하던 상인이 오아시스를 탐하듯 현수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현수 역시 오랜만에 보는 이리냐가 너무 좋았다. 하여 체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이불을 걷어차면 감기에 걸리는데.”

이불을 덮어주자 이리냐는 웅크렸던 몸을 쭉 편다.

이 침실은 늘 25℃를 유지하도록 항온마법진을 부착시켜 춥지도 덥지도 않다.

그럼에도 약간 서늘하다 느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온도를 높여줘야 한다.

딸깍―!

침실 옆 서재로 옮겨 간 현수는 스탠드의 불을 켰다.

은은한 불빛이 어둠을 몰아내자 고급스럽고, 우아하며, 고풍스러운 집기들이 보인다.

책상, 의자, 서가, 장식장, 소파 등이다.

이 밖에 빌트인 되어 있는 냉장고도 있다. 각종 음료수와 맥주, 그리고 간단한 안주가 들어 있다고 했다.

둘러보니 모두 호두나무 원목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것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나뭇결을 가졌다.

다른 나무에 비해 어둡고, 진한 컬러를 가져 중후한 아름다움이 있다. 가공성과 내구성이 좋아 악기 제작용 등으로도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책상 위에는 LG에서 만든 29인치짜리 모니터TV가 놓여 있다. 컴퓨터의 본체도 보인다.

지저분해 보일 수 있는 연결선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니 전문가의 손을 탄 것 같다.

책상 위엔 고급스런 필기구 이외에도 은빛 유선전화기와 메모지함도 있다.

가구는 고풍스러운데 이것들은 너무 현대적이라 다소 언밸런스한 느낌이다.

10장 모스크바에서

털썩―!

편안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다이어리를 꺼냈다. 이리냐가 생각나서 항온마법진을 손보려는 것이다.

이제부턴 항온마법진이 아니라 선택온도 유지마법진이라 이름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아르센 대륙의 마법 지식과 지구의 스위치 지식을 융합시킨 첨단 마법진이다.

쓱, 쓱, 쓰쓱, 쓰쓰쓱―!

머릿속 생각을 다이어리에 옮겨 적는 동안 아주 복잡한 계산식이 쓰인다.

기하, 벡터, 미분, 적분, 행렬, 수열, 함수의 극한, 로그, 타원의 방정식 등 온갖 수학적 지식이 있어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차원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현수의 손놀림엔 거침이 없다.

전능의 팔찌 안쪽에 그려진 브레인 리프레쉬 마법 덕분에 IQ가 지속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전에는 255로 측정되었지만 다시 측정하면 300 가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300을 훌쩍 넘어 있을 수도 있다.

수식의 계산을 끝내곤 제도판 앞에 앉아 여러 종류의 마법진을 그렸다.

이 작업엔 T자, 컴퍼스, 자, 각도기, 스케일, 운형자 등 온갖 설계기구가 동원되었다.

그리는 동안 수시로 수정을 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발짝 물러서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제도판에 그려진 도형은 매우 복잡했다.

켄트지 중앙부를 제외한 상하와 좌우엔 상세도가 그려져 있는데 룬어까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흐음……!”

이실리프 학파의 가장 큰 장점은 마나 효율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현수는 이번에 새롭게 창안하는 마법진엔 최하급 마나석을 박을 생각이다.

이것이라도 반영구적으로 효력을 발생시키면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효율 마나집적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흐음, 이 정도면…….”

현수는 본인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만든 마법진은 실내기온을 16℃에서 32℃까지 1℃ 간격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계절용 선택온도 유지마법진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는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아르센 대륙에서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러시아와 몽골, 콩고민주공화국과 에티오피아의 조차지에서는 더욱 유용할 것이다. 살이 에일 듯한 추위와 찌는 듯한 더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집 밖의 활동은 항온의류 등으로 충분히 해결되니 외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쾌적한 삶을 영위하는 곳으로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다.

도면 작성을 마친 후엔 꼼꼼하게 살폈다.

마법 구현이 잘못될 경우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지구 최고의 두뇌가 어찌 오작동하겠는가!

결과는 이상무였다.

“좋아! 그럼 이번엔…….”

아공간 속에 담겨 있던 스테인리스 철판이 꺼내졌다. 두께 12㎜, 가로 1,219㎜, 세로 2,438㎜짜리이다.

먼저 가로세로 1.2m가 되게 재단했다.

이때 사용된 마법은 워터 드릴이다. 그 결과 스테인리스 철판은 무소음, 무진동으로 잘려졌다.

연후에 조심스런 손길로 마법진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세심한 설계를 하였기에 마나석을 박을 구멍은 두 개면 충분했다.

하나가 사용되는 동안 다른 하나는 마나집적진에서 빨아들인 것을 저장한다.

그러다 완충되면 즉시 임무 교대를 하도록 했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구에서 개발된 릴레이(Relay) 기술을 도입하였다.

릴레이란 입력이 어떤 값에 도달하였을 때 작동하여 다른 회로를 개폐하는 장치이다.

지구의 기술을 마법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어찌 쉬웠겠는가! 현수의 고도로 발달된 두뇌가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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