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2
이곳 시간으로 어젯밤, 이리냐는 새벽이 될 때까지 현수에게 시달렸다. 사실은 시달린 것이 아니고 매달린 것이다.
현수를 오랜만에 보니 아예 뽕을 뽑으려 했던 것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이 있는데 현수를 본 김에 얼른 잉태하고 싶어 아양을 떨었다.
현수로선 마다할 일이 아니기에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조금 심했다.
“물 줘?”
“네에,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던 이리냐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젯밤에 약간의 알코올을 섭취했기에 목이 마른 것이다.
쪼르르륵―!
시원한 물 한 잔을 따라 줬더니 벌컥벌컥 잘도 마신다.
“캬아아―! 시원해요.”
“그래? 내려가서 모닝커피 어때?”
“호호, 저야 좋죠.”
얼른 팔짱을 끼곤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왜?”
“자기야 얼굴을 확실하게 봐두려구요. 한 번 가면 또 한참 있다 올 거잖아요.”
“에구, 미안해! 내가 너무 오래간만에 온 거지?”
“쳇! 알긴 아네요. 아무튼 자기랑 이렇게 있으니 너무 좋아요. 아아! 행복해.”
이리냐는 진짜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으며 아양을 떤다. 이때 문이 열리고 한 인영이 나타난다.
예카테리나 브레즈네프이다.
“어머! 안녕히 주무셨어요? 두 분 보기 좋으네요.”
“아! 그래요?”
“호호! 우리 커피 마시러 가는데 같이 갈래요?”
이리냐의 말에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지금 막 운동하러 나가려던 참이에요.”
“그래요? 그럼 잘 다녀와요. 이따 아침 식탁에서 만나요.”
“네! 회장님.”
현수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예카테리나는 살짝살짝 뛰면서 복도 저쪽으로 사라진다. 조깅이라도 할 모양이다.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니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린다.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인지라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허리는 잘록하고, 육감적인 둔부가 실룩거린다.
평소에도 운동을 꾸준히 해서 컨디션이 좋아 그런지 몰라도 달리는 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하여 시선을 주고 있을 때 이리냐가 묻는다.
“테리나 언니, 예쁘죠?”
“응? 뭐라고?”
“테리나 언니 말이에요. 아름답고, 건강한데다, 똑똑하고, 예의 발라요. 게다가 겸손하고, 침착해서 배울 점이 참 많은 언니예요.”
“아! 그래?”
현수 입장에선 뭐라 더 할 말이 없기에 말꼬리를 흐리자 이리냐가 쫑알거린다.
“저 언니 너무 좋아요. 여기서 그냥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되죠?”
“여기서? 2층은 우리들만의 공간인데?”
이 저택 역시 2층은 현수와 이리냐, 그리고 지현과 연희를 위한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라 할지라도 늘 허락받고 드나들게 하였다. 주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함이다.
이런 걸 뻔히 알면서 외인인 예카테리나를 머물게 하자는 말을 하니 그걸 잊었느냐는 표정으로 반문한 것이다.
“우리들만을 위한 공간이긴 해도 방이 남잖아요.”
“1층과 3층에도 빈방 많은데?”
“1층은 일하는 사람이 많이 드나들고, 3층엔 아무도 없잖아요. 그니까 2층을 쓰게 해요.”
이리냐는 얼른 허락해 달라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본다. 어찌 이런 애교를 이길 수 있겠는가!
“맘대로 해! 이 저택의 관리 책임자는 이리냐니까.”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리냐는 신났다는 표정으로 폴짝폴짝 뛴다.
“야호! 자기야가 허락해 줬다. 헤헤, 헤헤헤!”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한 웃음을 짓는데 천사를 보는 듯하다. 하여 현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사랑하는 아내가 천사처럼 아름답고 밝으니 즐거워하는 기분이 전염이라도 된 듯싶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가주님.”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안톤은 벌써 완벽하게 복장을 갖추고 있다. 현수 내외를 기다린 듯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안톤도 잘 쉬었습니까?”
“네! 잠자리가 아주 편해서 이 저택에선 숙면을 취할 수 있어 좋습니다.”
한국산 침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듯싶다.
“다행이군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묻는다.
“두 분께 커피 올릴까요?”
“부탁해요, 안톤!”
“별말씀을……. 잠시 기다리시면 대령하겠습니다. 신문은 저쪽에 있습니다. 혹시 TV를 보시겠습니까? 리모컨은 저기 저쪽에…….”
“아뇨! TV는 되었습니다.”
“네! 그럼 주방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안톤이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자 현수와 이리냐는 창밖 풍광이 잘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현수가 팔을 들자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들이밀고는 품속으로 파고든다.
모스크바의 4월 평균기온은 5.4℃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른 아침이다. 바깥은 아직 쌀쌀하다는 뜻이다.
정원엔 겨우내 내렸던 하얀 눈이 녹지 않은 채 쌓여 있다.
초록보다는 흰색이 압도적으로 많은 풍광이지만 담장까지의 거리가 제법 되기에 잠시 동안 시선은 둘 수 있었다.
“눈이 많이 왔었나 보네.”
“네에. 며칠 전에도 또 폭설이 내렸어요.”
“그래?”
“네, 눈이 와서…….”
이리냐의 수다가 시작되었지만 현수는 건성으로 듣는다. 자세히 들어서 기억에 새겨야 할 이야기가 아닌 때문이다.
같은 순간, 현수의 뇌리로 스치는 상념이 있다.
이곳 시각으로 어젯밤에 들은 타날리야의 남편과 모스크바 필하모닉에서 나온 사람들에 대한 활용방안이다.
북적이는 항온의류 판매장을 돌며 손님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한편 소란스러움을 잠시라도 줄여 매장의 차분함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다.
놀라운 기량을 가졌지만 해직되어 술로 나날을 보내거나 본인의 적성에도 맞지 않는 허드렛일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타날리야의 남편은 아내와 딸이 이 저택으로부터 받는 보수가 많기에 술로 나날을 보내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적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의 현수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경제적 여건이 되지 못해 그러지 못했다.
그러던 중 길고양이 한 마리와 친해졌다.
비가 몹시 오던 어느 이른 봄날 집밖에서 애처로운 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소리 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소리였다.
뭔가 싶어 나가 보니 이웃집 담벼락 틈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어른 주먹보다 조금 컸으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 울고 있었던 것이다.
새끼를 두고 어미가 어디로 갔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불쌍해 보였지만 어미로부터 떼어놓아선 안 된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간신히 잠들었는데 새벽에 다시 한 번 깼다.
모두가 잠자리에 있을 시각이었는데 비가 그쳐서 그런지 아기 고양이의 힘없는 울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 보니 비가 와서 아주 쌀쌀한 날씨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아기 고양이는 어제 그 자리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힘이 없어 그런지 도망가진 않았다.
떨고 있는 녀석을 잡았는데 젖어 있었다. 딱히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었던 때문일 것이다.
쌀쌀한 데다 차가운 바람까지 불고 있으니 놔두면 죽을 것 같아 집으로 데려왔다.
마른 수건으로 서둘러 물기를 제거하곤, 따뜻한 물에 밥을 말아서 줬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귀여웠다. 녀석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잤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밤, 바깥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번쩍 뜨고는 소리가 들린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현수 생각엔 어미가 찾아온 것 같았다.
며칠 새 정이 들어 내보내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어찌 그러겠는가!
어서 빨리 어미를 만나고 싶다는 듯 아기 고양이는 밤새 울었다. 하여 문을 열어주니 기다렸다는 듯 튀어 나갔다.
녀석은 가끔 눈에 뜨였다. 그때마다 소리내어 불렀지만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야생성을 되찾아 그런가 싶어 섭섭해하진 않았다. 안타까운 건 제대로 먹지 못하는지 야윈 모습이라는 것이다.
현수는 먹다 남는 반찬 중 고양이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으면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그러다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계속 먹이를 주면 다른 고양이들까지 꼬이고, 그러면 동네 시끄러워진다고 주지 말라는 것이다.
힘없는 초등학생이 어쩌겠는가!
아직 어린 녀석이라 먹이를 어찌 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굶어죽을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두어 달쯤 지났을 때 이웃집과의 담벼락 사이에서 죽은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삐쩍 마른 모습이니 굶어 죽은 듯하다.
그때 많이 울었고, 얻은 교훈이 있었다.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까지 도왔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여긴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면 화끈하게 돕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타날리야의 남편 등은 그만한 성취를 얻을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재능과 노력이 겸비되지 않았다면 모스크바 필하모닉 같이 명성 높은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치적인 논리 때문에 직장을 잃고, 전혀 재능이 없는 일을 해야 하니 불쌍하다.
11장 견적서 사건
‘흐음!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되겠지. 자치령이 완공되면 그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도 괜찮겠어. 거기에도 예술은 필요하니까. 재능 있는 아이들을 위한 교사도 필요하고.’
현수의 이런 생각은 훗날 이실리프 교향악단, 이실리프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실리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실리프 팝스 오케스트라 같은 연주단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전용버스와 전용비행기를 타고 자치령을 돌며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임무를 맡는다.
단원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리투아니아 등 주변국에서 온 예술인들도 포함된다.
실력은 있지만 정치에서 밀려 러시아에 발붙이지 못하고 떠났던 예술인들이 대거 합류하기 때문이다.
“가주님! 커피 가져왔습니다.”
안톤의 말이 끝나자 요리장인 타날리야의 딸 플로라가 커피 잔을 내려놓는다.
“맛있게 드십시오, 가주님! 가모님!”
플로라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레이스가 달린 전형적인 하녀복 차림이다. 머리에도 흰색 두건을 쓰고 있다.
흰색 스타킹도 신었다.
“안톤! 이 복장은 뭐죠?”
강요해서 이런 복장을 입혔느냐는 의도를 파악했는지 안톤은 빙그레 웃는다.
“아뇨, 플로라가 원해서 입은 겁니다.”
“…그래요? 알았습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톤과 플로라가 물러나려 한다.
“플로라! 플로라의 아빠를 보고 싶은데 연락 가능하지?”
“네? 저, 저희 아빠를요……? 잘못했습니다, 가주님!”
털썩―!
플로라는 얼른 무릎을 꿇는다. 사실 플로라가 이 옷을 입은 이유는 인터넷 때문이다.
이 저택에 고용된 후 이라냐를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좋은 옷, 좋은 신발, 좋은 액세서리, 좋은 빽, 좋은 화장품, 좋은 차 등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평생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에 더욱 부러웠다.
이리냐가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현수 때문이다. 하여 플로라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한국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색해 보았다. 신데렐라를 꿈꾼 것이다.
플로라가 본 것 중 하나는 메이드 도우미가 한국을 강타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