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6
“거울을 보세요. 발레리의 안구가 정상보다 약간 돌출되어 있어요. 설사도 자주하죠?”
“…죽을병입니까?”
발레리는 생존 확률이 낮은 폐암이나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낙담한 표정이다.
“물론 치료하지 않으면 부정맥이나 심부전 등으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아……! 얼마나 남았습니까?”
발레리의 표정은 몹시 심각했다. 이제 곧 사형이 집행될 것임을 전달받은 죄수가 이럴 것이다.
“치료만 받으면 죽지 않아요.”
“그, 그런 겁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누군가 던져준 튜브를 잡은 사람의 표정으로 확 바뀐다. 의기소침해진 것뿐 삶에 대한 애착마저 잃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손 좀 줘보세요.”
“네?”
“소매를 걷고 손을 내밀어 보라고요.”
“아! 네에.”
왜인지는 모르지만 발레리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마나 디텍션!”
현수의 중얼거림을 발레리는 듣지 못하였다. 워낙 작은 소리였던 때문이다.
맥문을 통해 체내로 스며든 마나는 발레리의 신체 상태에 대한 보고를 한다. 예상대로 갑상선에 문제가 있다.
다음으로 문제 있는 곳은 간이다. 날마다 독한 보드카를 마셨으니 멀쩡하면 이상하다.
“간도 안 좋아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요. 위의 기능도 약간 떨어졌고, 장의 기능도 그러네요.”
“그, 그런 걸 어떻게 아십니까?”
“한국의 전통 한의학을 익히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상의를 벗고 엎드리세요.”
발레리는 뼈만 앙상했다. 그레이브스병 때문에 살이 빠지는데도 잘 먹지 않아서 영양실조 직전까지 온 듯하다.
현수는 발레리의 등 한복판에 손바닥을 댔다. 갑상선이 있는 목과 간의 중간쯤 되는 위치이다.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손바닥을 통해 발레리의 체내로 들어간 마나는 갑상선과 간으로 나뉘어 이동하더니 잃어버린 기능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레이브스병은 초기이고, 간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그런지 금방 원상복구를 시키고는 주변으로 번져 간다.
나쁜 식습관과 오염된 환경, 잦은 음주와 흡연 등으로 인해 약해진 기능들이 빠르게 정상화된다.
이는 발레리의 몸 상태가 이전엔 상당히 괜찮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 논리로 인한 해고가 멀쩡했던 사람 하나를 망가뜨렸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런 걸 보면 명예퇴직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직원들을 해고하는 회사는 없어져야 한다.
정리해고도 마찬가지이다. 단물만 쏙 빼먹고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처사이다.
아무튼 리커버리 마법으로 모든 걸 정상화시켰지만 이렇게만 하고 일어서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침을 꺼냈다.
발레리는 그레이브스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본인은 직업이 없어 돈을 벌지 못하니 병원에 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타날리야와 플로라는 아니다.
매일 술만 마시는 남편이며 아빠이지만 취했다고 가족에게 행패를 부리는 등의 일은 하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무기력하고 불쌍한 모습은 보이지만 지긋지긋한 남편이자 아빠는 아니다.
타날리야와 플로라는 요리장과 하녀임에도 상당히 많은 월급을 받는다. 웬만한 대학교수보다도 많다.
따라서 발레리가 병에 걸렸다면 즉시 병원에 가자고 난리를 피울 것이다. 아내와 딸의 성화에 못 이겨 병원에 갔는데 아무런 이상도 없는 정상인이라는 판정이 나오면 어쩌겠는가!
물론 며칠 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안구가 튀어나와 있어 웬만한 의사 같으면 그레이브스병을 진단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상인과 똑같이 들어가 있다. 분명히 이상하다 생각할 것이기에 귀에 침을 놓았다.
발레리의 몸에서는 담뱃진 냄새가 난다.
하루에 적어도 한 갑 이상은 피우는 듯하다. 술도 매일 마신다 하여 귀에 금연침과 금주침을 놓았다.
귀에 놓은 이침(耳針)은 일반적인 침과 모양이 다르다.
작은 반창고 위에 약 1∼1.5㎜짜리 침이 박혀 있는 것이다. 샤워를 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접착력이 좋다.
“자아,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발레리는 등에 손을 한번 댄 이후 귀에서 뭔가 따끔한 느낌을 받은 것 이외엔 없기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레이브스병이라고 이름까지 붙어 있는 병이라면 쉽게 고쳐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술도 담배도 자제하세요.”
“네에.”
술과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건 애들도 아는 이야기이기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곤 옷을 정리한다.
“자, 이제 음악 이야기 좀 해보지요. 혹시 크로스 오버에 대해 거부감이 있습니까?”
크로스 오버란 여러 장르가 교차한다는 뜻이다.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팝이나 기타 다른 다른 장르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있어 거부감을 느끼느냐는 표정이다.
“크로스 오버가 클래식 전공자에게 팝을 연주하라는 것이라면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오선지에 표현되는 모든 것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르코프 상사에서 한국의 이실리프 어패럴의 제품을 수입했습니다.”
“압니다. 항온의류! 우린 Tермостатический라 부르지요.”
Tермостатический는 러시아어로 항온이라는 뜻이다.
“모스크바엔 항온의류 매장이 104곳이 있다 합니다. 우리 계산에 따르면 인구 11만 5천 명당 점포 하나입니다.”
“휘유! 엄청 북적거리겠네요.”
“맞습니다. 사람이 많아 조금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소란스러울 때도 많다고 합니다.”
“그럴 땐 차분한 음악이 좋습니다. 정서적 안정을 주거든요. 그럼 매장 분위기도 좋아질 겁니다.”
발레리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발레리와 동료들로 이루어진 현악 사중주단이 점포를 돌면서 팝이나 세미 클래식 등 사람들의 귀에 익거나 선율이 아름다운 곡들을 연주해 줬으면 합니다.”
“저를 고용하시려는 겁니까?”
직업 없이 지낸 시간이 꽤 된다.
그렇기에 발레리는 다소 상기된 표정이다. 고용한다 함은 급여를 지불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월 6만 루블이면 어떻겠습니까?”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의사의 평균 급여가 월 2만 8,000루블(약 107만 원) 정도 된다.
6만 루블이라면 상당히 센 급여이다. 발레리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금액이기도 하다.
현수는 학교를 다닐 때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배웠다.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직업에 귀하고 천함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수입 금액까지 차이가 없어선 안 된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력이라는 걸 갖추지 않으면 점점 퇴보하기 때문이다.
현수의 생각엔 많은 공부가 요구되거나, 필요한 기구가 비싼 직업은 당연히 더 많은 급여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가만히 앉아 제발로 찾아오는 손님에게 돈을 받고 물건을 내주는 일을 하는 사람보다 MRI나 CT를 갖춰놓고 진료하는 의사가 당연히 더 많이 벌어야 한다.
방금 전 현수가 발레리에게 제안한 급여는 러시아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렇기에 발레리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방금 한 말이 진담이냐는 뜻이다.
“발레리가 추천하면 가급적 고용하죠. 경력과 실력에 따라 급여가 달라져야 하니 그 기준은 발레리가 짜오세요.”
“…알겠습니다.”
방금 현수가 한 말의 의미는 이러하다.
나는 예술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다. 그러니 경험 많은 당신이 도와라. 당신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주겠지만 양심적으로 움직여 달라.
발레리는 의기소침했던 사람이지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현수가 한 말 속에 담긴 속뜻을 느낀 발레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에, 책임지고 쓸 만한 사람들로 구성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발레리를 1팀 팀장으로 임명합니다. 우선은 현악 4중주단을 구성하고 항온의류 매장을 순회하면서 연주해 주십시오.”
“곡명은…….”
매장에서 어떤 곡을 연주하면 좋겠냐는 뜻이다.
“클래식이 좋기는 한데 대중적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현악 4중주단이 라테츠키 행진곡을 연주할 수도 없죠. 그러니 대중이 많이 접했던 쉬운 곡 위주로 선곡해 주십시오. 그것도 발레리에게 주어진 권한입니다.”
현수의 말이 떨어지자 발레리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직각으로 허리를 꺾는다.
“김현수 회장님의 뜻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를 재활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상시의 발레리는 스스로를 취직하고 싶어도 자리가 없던 반쯤 모자란 찌질이로 자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의식과 소명의식까지 한꺼번에 주어지자 자신을 쓰레기라 여겼던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드러난 것이다.
말을 해놓고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행복하면서도 부담스러운 기분은 여전하다.
하여 잠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현수는 발레리와 조금 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현악 4중주단 홀로 104개에 달하는 매장을 매일 들러볼 수는 없다. 하여 여러 유닛을 구상하였다.
러시아 필하모닉에서 쫓겨난 사람들 위주로 악단들을 만들려했던 것이다.
발레리의 최종 목표는 러시아 필하모닉에 버금갈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것이며, 늙을 때까지 근무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소망은 이루어진다.
현수가 애써 눈여겨보아서가 아니라 발레리의 실력이 워낙 출중하므로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 * *
“보스!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안전벨트를 푸셔도 됩니다.”
“그래? 알았어.”
스테파니의 상냥한 안내를 받은 현수는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섰다. 그리곤 벗어놓았던 양복을 걸쳤다.
이실리프 어패럴에서 특별 제작한 항온의류이니 바깥이 다소 쌀쌀한 날씨지만 춥다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동승한 테리나는 베이지색 투피스 차림이다. 이것 역시 항온의류인지라 두터운 파카나 외투를 따로 가져오지 않았다.
현수의 자가용 제트기가 착륙한 이곳은 러시아 이실리프 자치령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 있는 네르친스크이다.
1869년에 러시아와 청나라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던 바로 그곳이다.
자치령엔 아직 활주로가 없어 이곳으로 온 것이다.
트랩을 밟고 내려서니 양복 차림의 사내가 대기하고 있다 정중히 고개 숙인다. 한눈에 보기에도 ‘나는 마피아다’라는 느낌을 주는 건장한 40대 사내이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누구… 죠?”
“알렉산더 브레첸코입니다, 보스! 모스크바의 보스로부터 잘 모시라는 전갈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래요? 고맙군요.”
“당연한 일입니다, 보스! 그리고 저는 보스의 수하입니다. 반말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알았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지극한 영광입니다. 보스!”
알렉산더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는가?”
“물론입니다. 이실리프 자치령이지요. 제법 머니 얼른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브레첸코가 가져온 차는 다소 낡기는 했지만 아직은 쓸만한 벤츠이다. 현수와 테리나가 뒷좌석에 타자 브레첸코가 문을 닫고는 얼른 조수석에 오른다.
“출발해!”
네르친스크에서 조차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이다. 그리고 겨우내 내렸던 눈이 녹지 않은 곳이 많다.
따라서 꽤 오랜 시간을 가야 한다.
“흐음! 이곳 조차지는 처음 가는군.”
현수는 눈빛을 빛냈다. 세상을 바꿀 대역사가 시작되는 곳으로 간다는 생각 때문이다.
『전능의 팔찌』 4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