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7
* 이 소설에 등장하는 러시아 이르크추크주의 주도 이르크추크에 소재한 한국영사관의 영사는 실존 인물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 이 소설에 등장하는 권인기 검사는 실존 인물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전성운 검찰총장은 실존 인물이기를 바랍니다.
1장 가자, 자치령으로!
낡은 벤츠가 겨우내 내린 눈 위를 달린다.
공항에서 멀어지자 끝도 없는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잎사귀를 모두 떨군 자작나무들이 하얀 눈밭 위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눈길을 헤치고 가야 하기에 타이어마다 체인을 걸어 놓아 소리가 나지만 이게 없으면 다닐 수가 없다고 한다.
바깥은 영하의 추위인지라 브레첸코는 히터를 최대한으로 올린다. 뒷좌석까지 따뜻해지라는 배려이다.
그런데 현수는 이미 추위와 더위로부터 자유로운 몸이고, 테리나도 항온의류를 걸치고 있기에 춥다는 느낌이 없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테리나도 시베리아는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탄성을 지른다.
“어머, 저기 좀 보세요.”
테리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늑대 무리가 이쪽에 시선을 주고 있다. 어떤 놈이 지나가나 하는 시선이다.
바깥은 온통 잿빛이다. 이 추위에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다. 굶주려 죽거나 얼어 죽을 수도 있다.
현수는 예전의 길고양이를 떠올렸다.
집 근처 담벼락 사이 좁은 틈에 죽어 있던 바싹 야윈 아기 고양이의 모습이 저 멀리 보이는 늑대와 겹쳐 보인다. 종은 다르지만 불쌍하다는 느낌은 같다.
“리노와 셀다는 잘 지내겠지?”
둘은 양평의 저택을 뛰어다니며 지현의 보살핌을 받고 있을 것이다. 동물원 사육사의 자문까지 받아 저택 옆에 집을 지어줬지만 그곳에선 놀기만 할 뿐 잠은 숲 속 어딘가에서 잔다고 한다.
날고기만 먹으면 포악해질까 싶어 개들이 먹는 사료를 섞어주는데 들쥐나 비둘기 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하기도 한다.
저택 인근의 숲에는 이런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수가 운동하러 아차산을 누빌 때는 달랐다. 두 녀석은 타고난 사냥꾼인지 재주가 좋아 잘도 잡았다.
리노가 몰고 셀다가 사냥하는 모습도 보았고 반대의 모습도 보았다. 전자는 고라니를 사냥할 때이고 후자는 멧돼지를 잡아먹을 때다. 제법 엄니가 자란 멧돼지였지만 결국엔 리노와 셀다의 먹이가 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현수는 리노와 셀다가 평범한 늑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도 쉽게 사냥을 한 때문이다.
“흐음, 셀다가 새끼를 낳았을까?”
늑대는 4∼6월에 새끼를 낳는다. 보통 세 마리에서 여섯 마리를 낳지만 드물게 열 마리까지 낳을 때도 있다.
“새끼 때가 제일 귀여운데.”
강아지가 아장거리는 모습을 떠올린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귀여울지 생각만으로도 흐뭇한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차가 덜컹한다.
쿵―! 퍽―!
“윽!”
“크윽!”
눈구덩이에 차가 빠지면서 현수의 머리는 천장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 순간 현수에게 말을 걸려고 고개를 돌리던 테리나의 관자놀이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현수의 턱이 그곳을 강타한 것이다.
“끄응!”
테리나의 머리가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로 맥없이 파고들자 현수는 화들짝 놀라 테리나를 일으켰다.
경황이 없는지라 테리나의 가슴을 잡고 있었지만 그런 걸 느끼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테리나! 테리나! 괜찮아? 응? 눈 좀 떠봐!”
“……!”
헝겊 인형처럼 흔들리는 테리나가 심상치 않아 현수는 한 손으로 목의 경동맥을 짚으며 왼 가슴에 귀를 댔다.
“휴우∼!”
관자놀이는 급소이다. 이곳에 강한 타격이 가해지면 지금처럼 혼절하거나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현수는 기절한 테리나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뒷좌석에서 들린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브레첸코는 걱정스런 눈빛이다.
“보스, 괜찮으신 겁니까?”
“나는 괜찮네. 근데 테리나는 잠시 혼절했나 봐. 내 턱에 관자놀이를 맞았거든.”
“아……!”
브레첸코는 혼절해 있는 테리나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몸을 바로 했다.
“너! 운전 똑바로 못해?”
“죄, 죄송합니다. 거기 구덩이가 있는 줄은…….”
사실 운전자는 큰 잘못이 없다. 눈 덮인 도로 아래에 구덩이가 파여 있는 걸 어찌 알겠는가!
그럼에도 테리나가 기절했다는 걸 눈치채곤 절절맨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전해! 알았나?”
“죄송합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군기 들린 이등병처럼 대답한 운전자는 더욱 주의 깊게 전방을 주시하며 달린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어웨이크!”
샤르르릉―!
“끄으응!”
“테리나, 괜찮아? 아프지 않아?”
“제가…….”
잠시 전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다.
“차가 덜컹거릴 때 내 턱이 테리나의 관자놀이를 가격해서 잠시 기절했어. 좀 어때? 괜찮아?”
“잠시만요.”
테리나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질러 보고는 이내 아미를 찌푸린다. 통증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바디 리프레쉬! 컴플리트 힐! 리커버리!”
세 개의 마법이 차례로 구현되자 통증이 말끔히 가신다. 뿐만이 아니다.
테리나의 모든 불균형하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관자놀이 한 방 맞은 대가치곤 너무나 좋은 치료를 받은 셈이다.
“괜찮으십니까?”
브레첸코는 테리나가 현수의 연인이라 생각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대단한 미녀이기 때문이다.
보스의 여인이니 당연히 잘 보여야 한다. 그렇기에 부러 물어본 것이다.
“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이구, 무슨 말씀을…….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보스, 갈 길이 먼데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점심? 아,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 어디 좋은 곳 있으면 안내 부탁하네.”
“부탁이라니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가 모셔야죠.”
브레첸코는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기분 좋은 듯 만면에 웃음을 짓는다.
“루슬란, Озера иСады(호수와 정원)으로 가지.”
브레첸코가 가자는 곳은 네르친스크 최고의 맛집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샤실릭과 보르쉬가 일품이다.
샤실릭은 러시아 전통 음식으로 레몬, 토마토, 양파, 각종 향신료, 그리고 식초나 탄산수 등으로 고기를 숙성시켰다가 꼬치에 구워 먹는 음식이다.
보르쉬는 감자, 당근, 양파, 양배추를 넣고 비트와 토마토소스로 붉게 색깔을 낸 수프이다. 돼지고기나 베이컨이 들어간다. 다소 느끼하지만 진한 맛이 나는 음식이다.
현수는 이것 둘 다 먹어본 바 있고 좋아한다. 그렇기에 혼자 있을 때 여러 번 만들어 봤다.
네르친스크 최고의 맛이라 하니 자못 기대된다. 하여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실릭과 보르쉬, 나도 좋아하네.”
“하하! 다행입니다.”
벤츠는 자그마한 호수 곁에 지어진 2층짜리 목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눈으로 뒤덮여 온통 하얀색뿐이지만 여름이 되면 많은 꽃이 핀다고 한다.
브레첸코의 장담은 사실이었다.
현수는 지금껏 먹어본 모든 샤실릭과 보르쉬는 쓰레기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야말로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후식으로 러시아 아이스크림인 마로제노에가 나왔다. 부드럽고 유지방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 한다.
러시아 전통 아이스크림인 이것 역시 입에서 녹았다. 하긴 아이스크림이니 입에서 녹는 게 당연하다.
식대는 브레첸코가 지불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하면서 계산을 끝낸 것이다.
현수는 서빙을 해준 30대 후반 아주머니에게 팁을 주려 지갑을 열었다. 그런데 이리냐가 채워준 루블화는 1,000루블과 5,000루블짜리 지폐밖에 없었다.
1루블당 25원 정도 되니 각각 25,000원과 125,000원짜리이다.
의사 평균 급여가 28,000루블인 나라이다.
따라서 5,000루블은 너무 과한 팁이다. 하여 1,000루블짜리를 주었다. 주방에도 1,000루블을 팁으로 보냈다.
브레첸코는 이 집 단골인 듯 생색을 냈다.
그들은 다시 차를 타고 눈길을 헤치며 달렸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처음엔 어려워했지만 브레첸코는 익숙해졌는지 현수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어려 보여서 그럴 것이다.
주로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에 관한 것이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 하여 웃음이 나왔으나 어찌 웃겠는가!
지르코프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노보로시스크의 보스가 항온의류라는 것을 독점하여 팔기 시작했다는데 네르친스크엔 아직 안 들어왔다.
자신도 항온의류 매장을 운영하면 좋겠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레드마피아 단원인 건 좋은데 폭력으로 돈을 뜯는 건 이제 싫증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안 그래도 된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이실리프 자치령을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브레첸코는 오늘을 결코 잊지 못한다.
하늘같은 보스와 한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격의 없이 나눈 것을 영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점점 더 부풀려져 차를 타고 가다 곰을 만난 이야기까지 만들어진다.
차를 타고 가다 내려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숲 속에 있던 곰이 튀어나와 자신을 공격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브레첸코가 아무것도 모르고 방광을 비우고 있을 때, 곰은 불과 2∼3m 거리까지 다가왔다.
앞발질 한 방이면 인생 종칠 순간이다.
시베리아 불곰은 앞발로 황소나 사슴, 사람 등의 척추를 부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브레첸코는 누런 물줄기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때였다.
타앙―!
브레첸코가 경각지경에 달한 순간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쿠웅―!
시베리아 불곰이 육중한 신형을 대지에 눕히는 소리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10m 정도 떨어진 곳에 보스가 서 있었다. 현수가 한 방으로 곰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때 모두들 이렇게 말한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권총 한 방으로 그 큰 곰을 잡아요?”
“얌마,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나중에 보니까 총알이 곰의 왼쪽 눈알을 뚫고 들어갔어. 안에 들어가 뇌를 휘저어놨는데 어떻게 살아서 움직여?”
브레첸코가 나름대로 만들어낸 논리이다. 이때 누군가 또 딴지를 걸고 나선다.
“보스, 10m라곤 하지만 권총으로 어떻게 조준사를 해요.”
권총은 소총에 비해 조준선이 짧고 사격 반동을 효과적으로 조절하기 힘들기 때문에 잘 안 맞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권총 사격은 잘 안 맞는 게 아니라 못 맞추는 것이다. 자세와 파지법만 정확히 해도 명중률이 상당히 높아진다.
“얌마, 보스는 사격의 신이야, 신! 10m가 아니라 20m 거리에서도 담배꽁초를 정확히 맞추시는 분이야.”
이는 100% 브레첸코가 지어낸 말이다. 현수가 총 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현수는 특등 사수 중에서도 특등 사수이다. 그렇기에 국방과학연구소 소화기개발팀 사수로 군복무를 마쳤다.
그때 온갖 종류의 총을 다 쏴 보았다.
그중엔 권총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지겨울 정도로 많이 쏴봤기에 브레첸코가 말한 그대로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브레첸코의 부하 중 하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도 안 돼요. 그럼 올림픽에 나가셔야죠.”
“어이구, 이런 멍청이! 올림픽에서 쏘는 권총은 공기총이야. 실탄이 아니라구.”
이 대목에서 깨갱한다.
“나중에 달아보니까 그놈 무게가 450㎏이었어. 보스가 아니었으면 내가 놈의 먹이가 되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