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8
브레첸코는 이 밖에도 상당히 많은 뻥을 지어낸다.
부하들은 지겹도록 이야길 듣는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살이 붙으며 점점 더 이야기가 정교해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벤츠는 눈길을 따라 계속 달렸다.
똑같은 창밖 풍경이 지쳤는지 테리나는 선잠에 빠져들었다. 현수가 팔을 둘러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연료를 보충해야겠다며 정차했다.
잠시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켜던 현수는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늑대와 시선이 마주쳤다.
덩치가 제법 큰 놈인데 30마리 정도를 이끌고 있다. 이쪽을 공격해도 되는지 계산하는 눈빛이다.
[배가 고프냐?]
마나에 의지를 실어 보내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다. 하긴 인간이 뜻을 전했으니 놀랄 만도 하다.
[먹이를 줄 테니 먼 곳으로 가서 살아.]
리노와 셀다가 있기에 늑대들이 공격하더라도 죽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현수의 아공간엔 아르센 대륙의 고깃덩이가 제법 많다. 멀린이 남긴 것도 있고 이곳저곳 다니는 동안 여러 사람이 가지고 가라 하여 넣어둔 것이다.
케이 상단의 알론도 있고 장인이 된 로니안 공작도 있다. 가장 많은 고깃덩이를 준 사람은 하인스 상단을 맡고 있는 얀센이다. 현수가 대륙을 횡행하는 동안 사용하라고 황소로 치면 200마리분의 육류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쇠고기는 아니다. 지구로 치면 사슴 고기와 멧돼지 고기가 대부분이다. 지구의 그것과는 다르다. 더 질기고 누린내도 심하다. 하여 현수는 가급적 먹지 않는 것이다.
[조금 있다가 여기에 고기를 놓고 갈 테니 먹으렴.]
늑대 우두머리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인간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지라 어리둥절한 것이다.
정차해 있던 벤츠는 연료 탱크를 가득 채운 후 곧바로 출발했다. 아직 갈 길인 먼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차에 오르기 전 현수는 자동차 뒤에 송아지 한 마리 정도의 고깃덩이를 떨궈 놓았다.
“매스 윈드 커터!”
샤르르릉―!
위이잉! 위이이잉!
수십 개의 바람의 칼날이 송아지만 한 고깃덩이를 갈가리 찢어 흐트러뜨렸다. 하나의 덩어리를 육편으로 만들어 사방에 널어놓은 것이다.
피 냄새를 맡았는지 늑대 무리가 달려들어 한바탕 잔치를 벌였지만 현수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앞을 보고 가기에도 바쁜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우두머리가 먼저 배를 채우고 서열에 따라 남은 것을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송아지 크기의 고깃덩이가 육편이 되어 사방에 널렸기에 모두가 한꺼번에 배를 채웠다. 아마도 생전 처음 겪는 공평한 먹이 분배였을 것이다.
몰래 뒤를 돌아본 현수는 30마리 정도 되는 늑대가 주린 배를 채우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배가 부르니 오늘은 사냥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죽어야 했을지도 모를 생명을 하루쯤은 더 살게 한 기분이 들었다.
벤츠는 어둑어둑해지는 늦은 오후까지도 길을 따라 전진했다. 갈림길 없는 외길인지라 이정표 따위는 볼 필요도 없었다. 다만 눈 덮인 길인지라 가끔 멈춰 서서 제대로 길 위를 달리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뿐이다.
선잠에 들었던 테리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행색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현수에게 못 볼 꼴을 보인 건 아닌가 싶은 조바심 때문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완전한 어둠 속을 달리게 되었다. 눈 덮인 길을 아무런 조명 없이 오로지 두 줄기 헤드라이트에 의지해서 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브레첸코는 수시로 내려 방향을 체크했다. 혹시라도 잘못된 길로 접어들까 싶은 때문이다.
“보스, 여기부터 이실리프 자치령입니다.”
이 이야길 듣고도 세 시간을 더 달렸다. 그러는 사이에 사위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겼다.
2014년 4월 16일은 음력으로 3월 17일이다. 보름이 불과 이틀 전이었다. 한국에선 아직 보름달에 가까운 모습이다.
혹자는 지구는 둥그니 보는 장소에 따라 달의 모양도 달라 보일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런데 달의 공전 주기는 거의 한 달이다. 반면 지구의 자전 주기는 하루이다.
지구에서 보는 달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기 때문이다.
서울에 보름달이 떴을 때 지구를 반 바퀴쯤 돈 모스크바에서 본 달은 어떨까?
지구 자전 주기는 24시간이다. 반 바퀴면 약 12시간인데 그동안 달이 얼마나 움직였을까?
참고로 지구에서 보는 달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지구 주위를 공전하기 때문이다.
360° ÷ 30일 ÷ 2 = 6°
달은 약 6°도쯤 움직였을 뿐이다. 이 정도면 별 차이 없을 것이니 모스크바에서도 보름달로 보인다.
시베리아도 마찬가지이다. 보름달이 떠 있다. 그리고 드넓은 설원이 펼쳐져 있다. 이쯤 되면 제법 밝아야 한다.
달빛에 설원에서 반사된 빛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하지 않다. 짙은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어서이다.
그래서 벤츠는 두 줄기 헤드라이트만으로 짙은 어둠을 뚫고 달리는 중이다.
쉼 없이 달려가던 중 멀리 불빛이 보인다. 드디어 사람들이 사는 곳에 당도한 것이다.
부지런히 달려가니 2층으로 쌓은 컨테이너들이 보인다. 서로 붙어 있는 데다 모두 뒷모습이기에 주위를 돌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 개의 컨테이너가 오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입구를 찾았다. 오각형 중 뾰족한 부분에 자동차 한 대가 드나들 정도로 벌어져 있는 것이다.
“보스, 예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텅―!
먼저 내린 브레첸코는 주변을 살피곤 수신호로 클랙슨(Kla xon)을 누르라 했다.
빠앙! 빠아앙―! 빠앙! 빠아앙!
소리를 들었는지 컨테이너 중 하나의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진다. 문이 닫힌 것이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누구슈?”
사내는 엽총을 어깨에 걸치고 있다. 짐승들의 습격이 잦은 듯하다.
차가 드나들 수 있는 입구는 이중으로 철망 문이 설치되어 있다. 늑대 같은 짐승들이 뛰어넘을 수 없도록 약 3m 높이인데 그 위에 둥근 철조망이 쳐져 있다.
웬만한 짐승의 습격은 방어할 수 있을 듯싶다.
“모스크바에서 왔소.”
“모스크바 누구……?”
사내는 심하게 경계하는 듯 브레첸코의 얼굴을 비춘 랜턴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브레첸코는 눈이 부신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이 자치령의 주인이오.”
“누구? 이곳의 주인은 동양인인데?”
랜턴으로 확인한 브레첸코는 전형적인 러시아인 모습이다. 그렇기에 누굴 속이느냐는 듯한 어투이다.
이때 현수가 하차했다.
텅―!
사내는 현수를 볼 수 없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보다 현수가 뒤쪽에 있는 때문이다.
저벅저벅!
사내는 엽총을 내리는 동시에 랜턴을 비춘다. 혹시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현수는 눈이 부셨지만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
“나는 이 자치령의 주인인 김현수라 합니다.”
“아, 네에!”
사내가 짧은 감탄사를 터뜨린 이유는 현수의 얼굴을 확인한 때문이다.
이 사내는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열렬한 팬이다.
참고로 한국 대표팀 감독이던 아드보카드가 감독으로 재임했고, 김동진 선수가 소속되어 있기도 했다.
아무튼 사내는 축구의 신으로 소문난 현수가 이 자치령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기꺼이 측량팀에 참가한 것이다.
여기서 일하면 어쩌다 한 번쯤은 축구의 신을 지금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결과이다.
어쨌거나 현수의 얼굴을 확인한 사내는 두어 발짝 물러나더니 지체없이 안쪽 철망 문을 열었다.
이곳의 주인이 온 것을 인정한 것이다.
삐이꺽―!
경첩에 그리스(Grease)를 발랐지만 워낙 추워 제 기능을 못하는 모양이다. 곧이어 바깥쪽 문도 열린다.
삐이꺽―!
“어서 오십시오, 김 회장님. 이실리프 자치령의 베이스캠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더할 수 없이 깍듯한 모습이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함이…?”
“아! 저는 마라트 피메노프라 합니다. 축구의 신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따 사인 부탁드립니다.”
“에구, 축구의 신이라니요. 어쩌다 그런 겁니다.”
현수의 겸양 어린 말에 피메노프가 펄쩍 뛴다.
“무슨 말씀을……. 김 회장님의 슛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메시나 호날두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에구…….”
현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말끝을 흐렸다.
“아무튼 사인은 이따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메노프의 입이 양쪽으로 벌어진다. 현수는 축구선수가 아니다. 직장인이며 기업인인데 너무 높다. 하여 사인을 받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렇기에 매우 흡족한 것이다.
부우웅―!
벤츠가 안으로 들어서며 빛을 비추자 컨테이너로 둘러싸인 널찍한 광장이 드러난다.
약 40대의 사륜구동 자동차가 질서정연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이 밖에 트럭도 있고 지게차도 보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내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컨테이너들의 문이 열리고 불빛이 쏟아져 나온다.
이 밤중에 누가 왔나 싶은 모양이다.
“피메노프, 누가 온 거야?”
“아, 팀장님, 모스크바에서 김현수 회장님이 오셨습니다.”
“…뭐, 뭐야? 어, 어서 응접실로 모시게.”
“네, 그렇지 않아도 그러는 중입니다.”
피메노프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엔 책상과 소파, 그리고 로터리 히터가 놓여 있다.
한국에선 점차 사용이 줄고 있는 경유 난로이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딱―! 화르륵, 화르르륵!
스위치를 눌러 로터리 히터를 가동시킨 피메노프는 밖으로 나갔다. 브레첸코와 운전자는 주차하느라 따라오지 않아 컨테이너 안에는 테리나와 둘만 남았다.
“춥지?”
“아뇨. 항온의류를 입었잖아요.”
“구두는 아니잖아.”
차에서 내려 컨테이너까지 오는 동안 백 발자국도 걷지 않았다. 그럼에도 냉기 때문에 발이 시리다.
해가 떨어짐과 동시에 냉기가 엄습했다. 게다가 투피스에 걸맞은 힐을 신었는데 보온력이 빵점이다.
“벗어봐.”
“네에.”
테리나는 순순히 구두를 벗는다. 현수가 괜히 벗으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자에 걸터앉는 테리나 앞에 쪼그려 앉은 현수는 가방 속에서 항온마법진을 꺼내 구두의 깔창 아래에 넣었다.
“액티베이션(Activation).”
활성화 마법이 구현되자 차가웠던 구두가 금방 미지근해진다. 마법인지라 열전도나 복사 같은 과학 법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수가 구두를 건네자 테리나가 예쁜 발을 밀어 넣는다. 스타킹을 신었지만 추운 듯 보인다. 마음 같아선 항온마법진을 넣어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스타킹을 벗으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잘못되면 변태로 지목될 수도 있다.
“어때? 조금 괜찮아졌어?”
“…네에, 고마워요.”
테리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발이 시릴 정도의 냉기가 느껴졌다. 엄동설한의 밖은 아니지만 응접용 컨테이너는 전혀 난방이 되지 않아 냉방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하지 않다. 마치 두툼한 방한화를 신은 듯 전혀 냉기를 느낄 수 없다. 아주 얇은 무언가를 깔창 아래에 넣은 것뿐인데 이러하니 신기했지만 묻지 않았다.
괜히 현수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음을 짐작하기에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다행이군. 스타킹도 벗어서 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