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9
저도 모르게 한 말이다.
“네에?”
“아, 아냐, 아무것도. 험험!”
현수는 말실수한 것을 깨닫고는 분위기 전환용 헛기침을 터뜨렸다. 때맞춰 컨테이너의 문이 열렸다.
2장 시베리아의 깊은 밤
벌컥―!
“아이고, 이거 죄송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측량 1팀 팀장 빅토르 안드레이노프입니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김현수입니다.”
“그냥 빅토르라 불러주십시오.”
“네?”
“자치령의 주인이시니 그냥 편히 부르시라는 뜻입니다.”
“아, 네. 그러지요, 빅토르.”
“자, 일단 앉으세요. 근데……?”
“아! 테리나는 이실리프 그룹의 법률자문을 맡고 있는 변호사입니다. 인사하시죠.”
“아, 그러십니까? 빅토르 안드레이노프입니다.”
“네,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입니다.”
둘은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았다. 이때 현수가 끼어들었다.
“테리나는 전 서기장이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님의 증손녀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안드레이노프가 새삼스런 눈으로 테리나를 바라본다.
베이지색 투피스를 걸친 이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고리타분한 법률 서적이나 뒤적이는 변호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이다.
처음 테리나를 보았을 때 재벌 곁에서 알짱거리다 운 좋게 눈에 든 블론디(Blondie)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 현수의 애인 내지는 엔조이 상대로 봤다.
대부분의 사람이 금발미녀는 머리가 나쁘고 게으르며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안드레이노프 역시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현수의 소개가 없었다면 고급 콜걸 대접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단한 실례이니 이래서 선입견이 중요한 것이다.
“이곳에서 하는 일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싶군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준비해서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세요.”
안드레이노프가 물러난 후 현수는 컨테이너 내부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가방에서 항온마법진을 꺼내 컨테이너 벽에 부착시켰다.
눈에 뜨이면 안 되기에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마법까지 걸었다. 테리나는 브리핑 받을 때 메모하기 위해 다이어리 등을 꺼내느라 이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어쨌거나 항온마법진이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마법이 이루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갑던 공기가 순식간에 따뜻해진다.
이제부터 이곳은 늘 25℃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때 다시 문이 열리고 피메노프가 고개를 들이민다.
“회장님, 이곳에서 주무시고 가실 거죠?”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가려면 갈 수는 있겠지만 가로등도 없는 길을 밤새워서 운전하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그런데 침실로 쓰실 컨테이너가 두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어쩌죠?”
브레첸코와 운전자인 루슬란, 그리고 현수는 사내이고 테리나만 여자이다. 사내 셋이 같이 자고 테리나만 쓰라고 하면 될 듯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브레첸코와 루슬란이 몹시 불편해할 것 같다. 하늘같은 보스와 어찌 한 방을 쓰고 싶겠는가.
“침대는 어떤 걸 쓰죠? 침구는요?”
“야전침대를 쓰는데 그냥 자면 냉기가 올라와서 침낭 하나를 깔고 그 위에서 침낭 속에 들어가서 잡니다. 난방을 할 수 없거든요.”
난로를 켜면 컨테이너의 산소 농도를 떨어뜨린다.
그렇기에 난로로 실내 기온을 어느 정도 올려놓으면 잠시 환기한 후 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야전용은 1인용 침대이다. 둘이 올라가서 자기엔 너무나 불편하다. 그렇다면 한 방을 써도 괜찮을 것 같다. 하여 대답을 하려는데 테리나가 먼저 입을 연다.
“제가 회장님과 한 방을 쓰죠.”
“……!”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조금 불편하실 겁니다.”
피메노프가 예상했던 대답이다. 테리나를 현수의 여인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죠. 참 사인해 달라고 했죠? 잠시만요.”
현수는 가방 속에서 종이를 꺼내 피메노프를 만나서 반가웠으며 내내 행복하라고 쓰고 사인해서 건넸다.
“오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피메노프는 신이 나서 나갔다. 잠시 후 안드레이노프가 서류들을 들고 들어온다. 그리곤 곧바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약 10만㎢에 달하는 자치령 전체에 대한 측량을 해야 하기에 측량팀은 40개가 파견되었다.
각각의 팀은 2,500㎢를 측량하는 데 팀당 측량기사 80명씩이 배속되었다. 4인 1조이니 20개 조가 125㎢씩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각 팀에는 지원조가 있는데 총원 20명이 식사와 세탁, 의료, 운송, 서류 업무 등을 지원한다.
팀당 100명이니 4,000명이 측량 작업에 동원된 것이다.
현재 약 50% 정도 진척되었으며 3∼4개월 후면 작업이 일단락될 예정이다.
“이상으로 브리핑을 마칩니다. 궁금하신 게 있으십니까?”
“팀원들이 측량하러 나갈 때 매번 차량을 이용합니까?”
“네, 아까 보신 차들이 동원되지요.”
“도로도 없는 곳이 많을 텐데 헬기 지원을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안드레이노프는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이다. 하지만 대꾸하지 않을 수는 없다.
“헬기가 있으면 기동성은 나아지겠지요. 그런데 20개 조가 모두 쓰려면 헬기가 20대는 있어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유리 파블류첸코와 안드레이 자고예프는 비용을 생각했을 것이다. 측량 작업에 헬기를 투입하려면 총 800대가 필요하다. 과한 비용이 들기에 이렇게 한 듯싶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드레이노프는 준비한 서류를 주섬주섬 정리한다.
“그래도 팀당 한 대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통신 사정도 좋지 않으니 차량만으론 일이 있을 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으니까요.”
말을 마친 현수는 테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테리나, 모스크바에 연락하여 팀당 한 대씩 헬기를 지원하라고 지시해.”
“네, 회장님.”
테리나는 얼른 메모를 하곤 위성통신 장비를 꺼냈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유리 파블류첸코가 챙겨준 것이다.
테리나는 통화하기 위해 컨테이너 밖으로 나갔다.
“헬기를 지원해 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요긴하게 잘 쓰겠습니다.”
안드레이노프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인다. 자치령은 자연 그대로인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불편한 것이 많다.
화장실의 휴지가 떨어지면 그걸 사러 네르친스크까지 가야 한다. 왕복하면 열 시간도 넘게 걸린다.
가급적 한꺼번에 몰아서 사오려고 하지만 꼭 한두 가지를 놓치는데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헬기를 지원해 준다니 마음이 편하다. 하여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인 것이다.
“참, 저녁 준비가 다 되었을 겁니다. 가시죠.”
“그럴까요?”
어차피 먹어야 할 저녁이고 주변엔 음식 파는 곳이 없다. 직접 해먹을 게 아니라면 당연히 따라나서야 한다.
식당으로 쓰는 컨테이너는 두 개를 붙여서 하나로 튼 것이다. 가운데 기다란 식탁을 놓고 마주 앉아 먹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저녁 메뉴는 스튜입니다. 회장님이 오셔서 고기를 조금 더 넣으라 했지요. 입에 맞으실 겁니다.”
안드레이노프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으니 김이 무럭무럭 나는 스튜를 내온다.
스튜는 큼직하게 썬 고기를 버터로 볶다가 양파, 감자, 당근 등을 차례로 넣어 볶은 뒤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 푹 끓여 양념하는 것이다.
쇠고기를 쓰면 비프스튜라 하고 채소이면 베지터블스튜, 닭고기면 치킨스튜라 한다.
그럴듯한 냄새에 한입 떠서 먹어보니 상당히 맛이 괜찮다. 하여 맛을 음미하며 열심히 먹었다.
테리나의 입에도 맞는지 아무 소리 없이 잘 먹는다.
식사를 마친 현수는 여전히 먹고 있는 안드레이노프에게 말을 걸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고기가 좀 적군요. 더 넣으라 했는데 뺀 모양입니다.”
“아, 그게… 사실은…….”
모스크바에서 배정한 식재료비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평상시에 다소 멀건 스튜를 먹는 이유는 식비를 아끼기 위함이다.
이실리프 그룹에서 측량팀원에게 지급하는 급여는 러시아 최고 수준이다. 현수가 그렇게 하라 지시한 결과이다.
아무것도 없는 오지에서 근무해야 하니 그만한 배려가 있어야 하기에 내린 초치이다.
그런데 측량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끝난다. 일종의 계약직인 셈이다. 팀원들은 돈을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어야 하기에 팀에 배정된 비용을 가급적 절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눠 갖기로 한 것이다.
설명을 들은 현수는 안드레이노프를 바라보았다. 양심적이면서 솔직하고 통솔력도 있는 사람 같다.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들, 응접용 컨테이너의 정돈 상태, 그리고 피메노프 등 팀원들이 바라보는 시선 등을 종합해서 내린 판단이다.
“식비는 아끼지 마십시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회사에서 지원해 준 돈을 나눠 갖기로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이때 현수는 테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테리나, 그거.”
“네, 여기 있어요.”
테리나가 꺼낸 건 하얀 봉투이다. 겉에는 러시아어로 ‘열심히 일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안에는 5,000루블짜리 지폐 400장이 들어 있다. 200만 루블이니 한화로 환산하면 5,000만 원가량 된다.
100명이 나눠 가져야 하니 1인당 2,000루블을 격려금으로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평균 급여는 월 1,500루블이다. 따라서 일인당 2,000루블이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이거 받으십시오. 애써주시는 것에 대한 제 마음입니다. 직원들과 나눠 쓰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고맙게 쓰겠습니다.”
봉투를 받은 안드레이노프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곁에서 식사하던 팀원들은 눈빛을 빛낸다.
러시아에는 금일봉이라는 개념이 없다.
구소련 시절엔 높은 사람이 시찰을 나오면 아랫사람들이 돈을 모아 상납했다. 그렇기에 다소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는 듯 현수를 바라보다.
식사를 마치곤 침실용 컨테이너로 안내되었다. 워낙 추운 곳인지라 화장실용과 샤워용도 별도로 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안드레이노프는 깍듯이 허리를 접는다.
봉투의 두께로 미루어 짐작컨대 적으면 500루블짜리, 많으면 1,000루블짜리 400장일 것이라 생각했다.
많아도 40만 루블이라 생각하고 열어보았는데 무려 200만 루블이 담겨 있었다.
안드레이노프와 피메로프 등은 평상시엔 접하기조차 어려운 5,000루블짜리 새 지폐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혼동될 지경이다.
일인당 2,000루블씩 하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스캠프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식재료비를 아껴 일인당 더 받는 돈이 월 120루블 정도 된다. 난방비를 아껴서 받는 돈은 90루블이고 진행비를 아낀 건 80루블이다.
이 밖에 다른 소소한 비용을 아껴 한 달에 300루블을 가욋돈으로 받았다. 한화로 약 3,500원이다.
이러니 환호성이 터져 나올 만하다. 이쯤 되면 사기 진작은 제대로 된 듯하다.
“다들 기분이 좋은가 봐요.”
테리나의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모두가 즐거워하니 본인도 기분이 좋은 듯하다.
현수는 새 침낭을 펼쳐 야전침대 위에 펼쳐놓곤 걸터앉았다. 바깥은 깜깜하지만 아직 잠잘 시각은 아니다.
“거기서 자면 불편하지 않겠어?”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물은 게 아니라 불편할 것이라 단정하는 말이다. 하긴 테리나처럼 곱게 자란 여인이 언제 야전침대에서 자봤겠는가.
“괜찮아요. 오늘 하루잖아요.”
하루 정도라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듯 환히 웃으며 침낭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