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3
옷을 도로 갈아입었다. 빈손으로 왔는데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 노트북을 꺼내 점검할 일과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으음!”
잠에서 깬 테리나는 두 팔을 벌려 힘껏 기지개를 켠다. 쌓인 피로가 완전히 풀렸는지 가뿐한 모습이다.
“잘 잤어? 커피 어때?”
“아흠! 네에, 잘 잤어요? 근데 언제 일어났어요?”
“조금 전에. 자, 커피.”
현수가 건넨 커피잔을 받아 든 테리나는 곁을 살핀다. 슬쩍 현수가 잠잔 흔적을 점검한 것이다.
테리나가 일어나기 직전 현수는 곁에서 잠을 잤던 것처럼 했다. 그리곤 바디 리프레쉬 마법을 걸어주었다.
피곤을 말끔하게 풀어주려는 의도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날 것이기에 커피를 준비한 것이다.
“저 잠버릇 험한데 어떻게 했어요?”
“글쎄? 얌전히 잘만 자던데? 어제 많이 피곤했나 봐?”
“그, 그래요?”
테리나는 자신이 얼마나 굴러다니며 자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하여 전신을 지탱해 주는 U자형 바디필로우를 쓴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다리를 올려놓거나 가랑이 사이에 끼고 잘 때 쓰는 베개이다.
현수가 곁에서 잤다면 다리를 올렸거나 현수의 다리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잤을 것이다.
모르면 모르되 알았다면 심히 부끄럽다. 그렇기에 방금 한 말이 사실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대답을 듣진 못했다. 요란한 종소리 때문이다.
땡, 땡, 땡, 땡, 땡―!
“식사 10분 전입니다!”
누군가의 외침이다. 여기선 이런 방법으로 식사 시간을 알려주는 듯하다.
“10분 남았대. 그러고 밥 먹으러 갈 거야?”
“아뇨. 당연히 아니죠.”
여자들 중엔 동네 슈퍼를 갈 때에도 화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자칭 예쁜 여자들 대다수가 이러하다.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테리나는 서둘러 세면장으로 향했다. 현수는 매트리스와 이불 등을 아공간 속에 담았다.
이곳 사람들이 봐선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스캠프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온도계를 보니 영하 15.3℃이다. 게다가 칼바람까지 불어 체감 온도는 영하 20℃ 이하인 듯싶다.
갓 잠자리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잔뜩 웅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식당에 집결한다.
주위에 가게 같은 것이 없기에 아침을 굶으면 점심 식사 때까지 아무것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면면을 살펴보니 세수를 한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하긴 아무리 더운 물로 씻더라도 이런 추위에서는 남은 습기 때문에 얼굴이 얼어버릴 것이다.
4장 바이칼호를 향하여
아침 메뉴는 호밀빵과 소시지, 그리고 포리지3)이다.
테리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단정한 투피스 차림이다.
사람들은 이 추위에 그것만으로 될까 싶은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모두들 테리나를 현수의 여인이라 생각하기에 어제처럼 아래위를 훑는 눈빛은 없다.
‘흐음! 항온의류를 보내주라고 하는 걸 잊었네. 근데 이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챙겨야 하나?’
현수는 이런 일 정도는 알아서 조치를 취해줄 똑똑한 비서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러다 빵을 찢어 포리지에 찍어 먹는 테리나를 보았다.
하버드대학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명망 높은 로펌의 러브콜을 받은 똑똑하고 빈틈없는 여인이다.
비서로 쓰기엔 너무나 고급 인력이지만 자신은 평범하지 않다. 테리나는 부분도 잘 보지만 전체도 조망할 줄 안다.
어찌 보면 최적인 비서감이다.
‘근데 부담스러워서…….’
아내가 셋이나 있음을 알면서도 틈만 나면 도발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젯밤에도 그런 의도가 있었음을 짐작했다.
이리냐와는 같은 나라 사람이라 친하게 지내지만 지현과 연희는 아직 데면데면할 것이다.
테리나를 비서로 데리고 있으면서 오늘처럼 둘만 동행하는 일이 잦아지면 자칫 사고를 칠 수 있다.
특히 만취하여 이성이 흐트러지면 그럴 확률이 매우 높다. 현수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테리나가 그런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버릴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렇기에 탐나지만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안드레이노프가 밤새 불편함은 없었느냐고 묻는다.
모든 게 좋았다 대답하자 빙그레 웃는다. 무엇을 상상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토를 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아서 다 먹고 또 달라 하여 먹었다.
어제의 격려금이 작용하는지 아주 친절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테리나의 위성통신 장비가 울린다.
“네,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입니다.”
“아! 미스 브레즈네프, 유리 파블류첸코입니다. 회장님 곁에 계십니까?”
공식적인 내용이라 그런지 깍듯하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화를 받은 현수는 파블류첸코와 통화했다.
유리는 각각의 측량팀에 KUMERTAU Ka―32 Helix 한 대씩을 보내겠다고 한다.
서방의 헬기가 대당 약 300억 정도 되는데 이 녀석은 80억 정도 임에도 엄청 튼튼하다.
최대 18명까지 탑승할 수 있으며, 소방용으로 쓸 경우엔 17드럼의 물을 적재할 수 있다. 베이스캠프에서 필요한 용도에 꼭 맞는 것이다.
원래는 헬기 구입 계약을 맺고 몇 달은 지나야 실물이 인도된다. 그럼에도 거의 즉각적으로 일이 처리된 것은 안드레이 자고예프의 부친 덕분이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항공기 제조사들이 합병되어 만들어진 거대 기업 UAC의 부사장이 영향력을 발휘한 결과이다.
현수는 감사의 뜻을 꼭 전하도록 지시하고 통화를 마쳤다.
안드레이노프는 조만간 헬기가 당도할 것이며, 팀당 두 명의 조종사가 배속될 것이라는 말에 입이 벌어진다. 헬기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너무도 확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러시아 헬기에 대해 잘 몰랐기에 Ka―32 Helix의 제원을 물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스캠프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유리 파블류첸코와 안드레이 자고예프지만 이쪽 상황을 대강은 짐작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친 후 작별 인사를 했다.
브레첸코과 루슬란은 베이스캠프 사람들이 네르친스크에 오면 적극적으로 돕기로 했다.
때론 필요한 것을 대신 구해주는 임무도 맡기로 했다.
앞으론 식재료를 더 싼값에 매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생활용품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순전히 현수의 덕이다.
현수와 테리나는 어제처럼 뒷좌석에 올라 네르친스크로 향했다.
딱히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대정령 및 아리아니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바이칼호를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지난번에 갔을 땐 온통 얼음이었지만 지금은 4월 중순이다. 지금쯤이면 많이 녹아서 새로운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테리나는 러시아에서 나서 자랐지만 말로만 들었을 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다소 들뜬 모습이다.
바이칼호는 ‘시베리아의 담수 공장’, ‘성스러운 바다’, ‘세계의 민물 창고’, ‘시베리아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으로 불린다.
호수의 넓이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다.
최대 깊이는 1,637m로 세계에서 가장 깊으며, 주변은 2,000m급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호수에는 전 세계 민물(담수)의 1/5이 담겨 있다.
표면적은 북아메리카 5대호의 13%밖에 안 되지만 물의 양은 5대호를 다 합친 것보다 세 배나 더 많기 때문에 ‘세계의 민물 창고’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도 한 번은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현수 일행이 베이스캠프를 떠날 때 측량팀 전원이 나와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룻밤을 머물었을 뿐이지만 깊은 인상을 준 듯싶다. 현수 역시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추운 데서 고생이 많은 분들이에요.”
“항온의류를 넉넉히 지급하라고 연락해.”
“그건 벌써 말했어요. 총인원이 백 명이지만 넉넉하게 보내라고 했어요.”
입안의 혀처럼 어쩜 이렇게 속내를 잘 알까? 비서로 쓰면 정말 최고일 듯싶다.
테리나는 ‘저 잘했죠?’ 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한마디 안 해줄 수 없다.
“…잘했네. 앞으로도 그렇게 해.”
“네?”
“아냐, 아무것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어제 지겹게 보던 그 풍경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넓긴 정말 넓어.”
지평선을 보며 현수가 한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장님!”
윌리엄 스테판 기장이 정중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다. 한국을 오가며 한국식 예절에 대해 들은 바 있는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스테파니 역시 환히 웃으며 허리를 숙인다.
“바이칼호 구경을 가려 합니다. 이르쿠츠크로 갑시다.”
“네, 모시겠습니다.”
윌리엄이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환히 웃는다.
자가용 제트기가 네르친스크 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올라 일정 고도에 오르자 스테파니가 환히 웃으며 다가온다.
“회장님, 이르쿠츠크에서 얼마나 머무실 건가요?”
“글쎄, 한 이틀?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몰라. 근데 왜?”
아리아니와 사대정령이 언제 일을 마치고 복귀할지 몰라 한 말이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호 인근이라 관광객이 많을 수 있어요. 미리 객실 예약을 하려구요.”
“그래? 그럼 일단 이틀 정도로 해. 객실 등급은… 침실이 두 개 이상인 스위트룸으로 하고.”
“네에, 회장님!”
생긋 미소 지은 스테파니는 열심히 통화를 한다.
들어보니 현수와 테리나는 8층짜리 메리어트 호텔이고, 윌리엄과 스테파니는 인뚜리스트 호텔로 예약한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자신들이 어찌 회장님과 같은 호텔에 묵겠느냐며 웃는다. 윗사람의 사생활을 가급적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배려인 듯싶어 뭐라 하려다 말았다.
테리나는 노트북으로 바이칼호에 대한 자료를 조사한다.
“폭이 27∼80㎞래요. 길이는 636㎞구요.”
“그래서 거의 바다처럼 느껴지지.”
“언제 와보셨어요?”
“응, 전에 한 번.”
웬만하면 꼬치꼬치 캐묻겠지만 조사한 자료를 보며 감탄하기에도 바쁜 모양이다.
“바이칼호엔 섬이 있는데 그중 알혼섬이 제일 크대요. 그리고 그 섬엔 불한바위라는 게 있대요.”
“불한바위?”
“네, 한국의 독도처럼 생겼는데 미국의 세도나와 더불어 영(靈)적인 에너지가 엄청 센 곳이래요.”
“그래? 한번 가봐야겠군.”
기(氣)와 마나가 어떻게 다른지는 알아보지 않았다.
분명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기에 이번 기회에 확인해 볼 생각을 한 것이다.
이르쿠츠크 공항에 당도한 현수는 택시를 타고 메리어트 호텔로 향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나니 해가 지고 있다.
“시내 구경 나가실래요?”
“그럴까?”
호텔 방이 안락하기는 하지만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여 일어섰다.
데스크에선 관광 지도 한 부를 준다. 초록색 실선으로 그어진 길을 따라가면 이르쿠츠크의 명소를 전부 볼 수 있다고 한다. 1번에서 30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가보자 하여 나섰는데 높은 건물이 드문 게 특징이다. 답답하지 않아서 좋다.
제정시대 때 지어진 우체국 건물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다. 트롤리버스와 트램이 인상적이다.
참고로 둘은 전기로 움직이는 버스와 전차이다.
요란한 경적이 들려 시선을 주니 결혼식을 마치고 퍼레이드를 하는 승용차들이 줄지어 달린다.
레닌광장에서부터 알렉산더 3세 동상이 있는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관광 명소들을 볼 수 있다.
관광객을 위해 보도블록에 색깔 테이프로 표시되어 있어 찾기 쉬웠다. 명소 건물 앞에는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